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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힘내라고 삼계탕 끓여준 사장님도 있어요”

밀실 스릴러 주인공으로 돌아온 정성일

김명희 기자

2025. 09. 29

넷플릭스 ‘더 글로리’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 정성일이 영화 ‘살인자 리포트’에서 밀도 높은 연기를 선보인다. 무명 시절을 견뎌온 그는 “이제야 비로소 정규직 배우가 된 것 같다”는 소감을 전한다.

배우 정성일(45)은 흔히 말하는 ‘꽃중년’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부족하다. 단정한 얼굴선에서 풍기는 카리스마, 서늘함과 온기를 동시에 품은 눈빛, 정확한 딕션이 살아 있는 중저음의 목소리까지. 2022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에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 “어디서 이런 배우가 나타났지?”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문동은(송혜교)을 괴롭히는 박연진(임지연)의 남편 하도영 역으로 등장한 그는 차갑지만 인간적인 깊이를 놓치지 않는 연기로, 기존 드라마 캐릭터들의 익숙한 틀을 흔들어놓았다. 2002년 데뷔 이후 20년 가까운 무명 시절을 버텨온 그는 ‘더 글로리’를 기점으로 주머니 속 송곳처럼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후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트리거’, 영화 ‘전란’, 연극 ‘뷰티풀 선데이’와 ‘카포네 트릴로지’, 뮤지컬 ‘인터뷰’까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쉼 없이 달려왔다.

첫 주연작, 극장에서 관객들 반응 느끼고 싶어

그가 첫 주연을 맡은 영화 ‘살인자 리포트’는 연쇄살인범이자 정신과 의사 이영훈이 특종을 쫓는 베테랑 기자 백선주(조여정)에게 인터뷰를 제안하면서 시작된다. 호텔 스위트룸이라는 제한된 공간, 오직 두 배우의 대화에 의해 극이 전개되기 때문에 배우로서는 숨을 곳이 없다. 그럼에도 정성일은 연극 무대에서 다져온 내공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며 관객의 감정을 쥐락펴락한다.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배우들의 연기 대결에 손에 땀을 쥐었다”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특히 정성일과 조여정의 팽팽한 연기 호흡은 관객들로 하여금 마치 연극 무대를 눈앞에서 지켜보는 듯한 체험을 선사했다는 평가다. 

2015년 결혼해 아홉 살 난 아들을 둔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한 정성일은 무명 시절 연기와 생계를 병행하기 위해 대리운전, 주차 관리 등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더 글로리’로 얼굴을 알린 뒤에도 한동안 배달 아르바이트를 이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스크린 첫 주연작을 통해 배우 인생의 새로운 챕터에 들어선 정성일과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영화 ‘살인자 리포트’ 포스터.

영화 ‘살인자 리포트’ 포스터.

영화 완성본을 본 소감은 어땠나요.

객관적으로 보기가 쉽지 않아요. 편집본을 봤을 때와 시사회에서 느낀 점이 다르기도 했고요. ‘아, 저 장면이 이렇게 됐구나’ 하며 새삼스럽게 보게 됐습니다. 아쉬움도 있고, 만족스러운 부분도 있었죠. 나중에 극장에서 혼자 조용히 다시 보고 싶어요. 관객들 반응도 직접 느끼고 싶고요.



‘더 글로리’ 이후 섭외가 많이 들어왔다고 들었어요.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대본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더 글로리’ 이후 하도영과 비슷한 결의 캐릭터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살인자 리포트’의 이영훈은 하도영과 똑같은 정장을 입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틀 수 있는 여지가 있더라고요. 무대 위에서처럼 자유로움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습니다. ‘할 수 있을까’보다는 ‘꼭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죠. 그래서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회사에 “이거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어요. 

첫 스크린 주연작이라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건 작품이 극장에서 상영되는 건 모든 배우의 꿈이에요. 10년만 젊었더라면 어디 가서 소리도 지르고 크게 기뻐했을 텐데, 나이가 드니 담담한 면도 있습니다. 대신 부담은 훨씬 커졌죠. 저 혼자가 아니라 감독님과 스태프 모두가 공들인 작품이니까, 결과가 잘돼서 함께 기뻐했으면 합니다. 전작 ‘트리거’ 때는 제가 조금 더 유명했다면 작품이 더 잘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어요. 김혜수 선배와 제작진에게도 미안했고요.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예요. 마냥 신난다기보다는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큽니다.

관객 입장에서는 영훈을 응원하게 되는 지점도 있었습니다. 

영훈은 연쇄살인범이라 이해받기 힘든 인물이지만 배우로서 그 이해 불가능한 지점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자 선주를 설득해 이 판에 끌어들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현장에 섰습니다. 다만 영훈을 ‘다크 히어로’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의 행동을 평가하기보단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을 던지는 게 이 작품의 목표라고 생각했죠.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에 촬영을 마친 뒤엔 캐릭터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했어요. 

비주얼적으로는 차갑고 치밀한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나요.

안경부터 슈트 색상, 포마드를 바른 헤어스타일까지 세밀하게 조율했습니다. 사실 포마드 머리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조영준 감독님이 강력히 원하셨어요. 많은 사람을 죽였음에도 증거를 남기지 않는 인물이라면 자기 관리가 철저할 거라는 설정을 반영해야 했으니까요. 

연극 무대 경험 덕분에 밀도 높은 연기 가능 

호텔 스위트룸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대부분의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긴장감을 어떻게 유지했나요.

조명이나 카메라 워크는 연출의 몫이지만, 공간 안의 밀도를 만드는 건 배우의 몫이었죠. 상대 배우와의 대화에서 ‘다음 수를 어떻게 둘까’라는 긴장감을 끊임없이 만들려 했습니다. 여유를 보이다가도 갑자기 돌변하는 식으로 변칙적인 템포를 주려고 노력했는데, 그런 부분에선 연극 무대 경험이 큰 도움이 됐어요. 무대 자체가 한정된 공간이라 집중력을 키우는 데 익숙했거든요. 영화지만 공연처럼 밀도 높은 경험을 가져올 수 있었고, 동시에 카메라 앞이라 새로운 시도도 가능했습니다.

대사 분량이 굉장히 많았다고요.

기자간담회에서 “대사가 많아 감독님을 죽이고 싶었다”고 농담을 했었죠(웃음). 영훈이 스위트룸 안에서 어떤 사건을 벌인 후 “형사가 올라올 거”라고 하잖아요. 그게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스위트룸 아래층에 있던 한상우(김태한) 형사가 올라오는 게 아니라 또 다른 형사가 올라와서 사건을 확인하는 거였어요. 그 장면이 통째로 빠졌죠. 저도 영화를 보면서 ‘저렇게 연결해 붙인다고요?’ 생각하며 놀랐어요. 그것 말고도 여러 장면이 그런 식으로 편집됐어요. 그렇게 가는 게 더 템포가 좋겠다, 판단하신 것 같고 저도 감독님의 뜻을 존중합니다. 영화가 잘돼서 감독판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럼 또 다른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조여정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저는 상대 배우와의 호흡에 따라 연기가 크게 달라지는 편입니다. 이번 작품의 영훈이라는 캐릭터도 결국 조여정 배우 덕분에 완성됐다고 생각해요. 촬영 전에는 대본을 공연처럼 완전히 외웠고, 현장에서는 오직 호흡에만 집중했습니다. 조여정 배우가 베테랑이자 워낙 잘해서, 제가 따로 계산할 필요가 없었죠. 상대가 다른 배우였다면 전혀 다른 영훈이 나왔을 거예요. 세트 안에서는 숨 막힐 정도로 치열했지만 컷 소리가 나고 밖으로 나오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웃고 떠들며 긴장을 풀었기에 버틸 수 있었어요. ‘코미디빅리그’처럼 서로 누가 더 웃기나 내기하는 분위기였어요. 

‘더 글로리’와 이번 작품 모두 가족 때문에 흑화하는 인물을 연기했는데, 이유가 있을까요.

실제로 아이 아빠라서 그런 것 같아요. 제 나이대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설정이니까요. 감독님 한 분이 제 얼굴에 선과 악이 함께 있다고 한 적이 있는데, 배우로서 양면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몇 년간 숨 가쁘게 달려왔는데 재충전은 어떻게 하나요.

복싱이나 야구 같은 운동을 주로 합니다. 몸을 움직이며 스트레스를 푸는 걸 좋아하거든요. 술은 거의 안 마시는 편이고 영화나 공연을 보면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살인자 리포트’는 호텔 스위트룸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배경이지만 배우들 간의 밀도 높은 연기 호흡으로 러닝 타임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게 된다.  

‘살인자 리포트’는 호텔 스위트룸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배경이지만 배우들 간의 밀도 높은 연기 호흡으로 러닝 타임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게 된다.  

‘더 글로리’ 이후에도 배달 알바

나이가 들면 연기가 쉬워지지 않나요.

예전에 선배들에게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냐”고 물어보면 “나이 들면 다 잘하게 돼 있어”라고 말씀들 하셨는데, 막상 제가 나이 들고 보니 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경험이 쌓일수록 선택지가 많아지기 때문에 그만큼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걸 느낍니다. 공연을 보러 다니는 이유도 그 자체가 즐겁기도 하지만, 요즘 후배 연출이나 배우들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배우기 위해서예요. 

‘더 글로리’로 얼굴이 알려진 후에도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셨다고요.

예전에 생계가 불안정해 빚도 있었고, 생활을 위해 알바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더 글로리’ 파트 1 방송 후에야 알바를 그만둘 수 있었죠. 예전엔 운동화 하나 살 때도 세 번 네 번 고민했는데, 이제는 두 번 정도 고민하면 살 수 있어요. 큰 부자는 아니지만 알바를 안 해도 되는 정도입니다. 배달할 때는 알아보는 분들도 많았죠. 식당 사장님이 힘내라고 삼계탕을 끓여주신 적도 있고, 어떤 가게 사장님은 “우리 식당 것만 배달해달라”고 하신 적도 있어요(웃음). 따뜻한 응원 덕분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 배우로서 지향점이 궁금합니다.  

지금처럼 꾸준히 가는 게 목표입니다. 연기만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무엇보다 오디션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습니다. 예전엔 오디션 준비와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거든요. 지금은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 된 기분이에요. 그럼에도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라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불안합니다. 그래서 대중이 원하고 쓰임을 받는 배우가 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정성일에 대해 말할 때는 아직 ‘더 글로리’라는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살인자 리포트’는 그 울타리를 넘어 그의 내공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확인할 계기가 될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살인자리포트 #정성일 #여성동아 

사진제공 소니픽처스 에이투지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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