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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동메달 아쉽지만, 그래도 제 경기 재미있었죠?”

여자 복싱 최초 올림픽 메달 딴 임애지 선수

윤혜진 객원기자

2024. 08. 21

올림픽 8강에 오르자 비로소 TV 생중계가 생겼다. 무관심에 보란 듯이 동메달을 따 한국 복싱의 새 역사를 쓴 임애지 선수는 링 아래에서는 더 씩씩하고 당당했다. 

여자 복싱 최초 올림픽 메달 딴 
임애지 선수

여자 복싱 최초 올림픽 메달 딴 임애지 선수



“제가 출발했는데 메달을 못 챙겼어요. 죄송해요. 너무 아쉬워요.”

오전 인터뷰를 앞두고 5시 50분 임애지(25) 선수가 보내온 문자 메시지다. 전남 화순에서 서울까지 새벽에 수서고속철도(SRT)를 타고 온 임애지 선수는 “인사드릴 곳이 많아 메달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더니 다른 건 챙겨놓고 정작 메달을 깜박했다”며 연신 속상해했다.

2024 파리 올림픽 여자 복싱 54kg급 동메달리스트인 임애지 선수는 올림픽이 끝난 후 더 바빠졌다. 케이스가 무거워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는 그 동메달이 보통 동메달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여자 복싱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자, 2012 런던 올림픽 남자 복싱 은메달(한순철) 이후 12년 만에 복싱에서 나온 메달이다.

화순군청 소속의 임애지 선수는 사실 메달 예상권이라기엔 무리가 있었다. 임 선수는 파리 올림픽을 두 달 앞둔 6월에야 출전권을 따내 우여곡절 끝에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1회전(32강) 부전승으로 16강에 올라 브라질의 타티아나 레지나 지 헤수스 샤가스 선수를 상대로 압도적인 경기를 선보인 후 임 선수는 “8강에 올라갔는데 중계가 됐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복싱 많이 응원해주시면 열심히 해서 도움이 되겠다”는 소감을 남겼다. 그리고 생중계가 이뤄진 8강에서 실제로 콜롬비아의 마르셀라 아리아스 카스타네다 선수를 꺾고 준결승에 진출해 동메달을 확보했다. 올림픽 복싱은 동메달 결정전을 치르지 않고 준결승에서 패한 선수 2명 모두에게 동메달을 준다. 임 선수는 준결승전에서 튀르키예의 하티세 아크바시 선수에게 2:3으로 아쉽게 판정패했지만, 대회 폐막식에서 기수를 맡으며 생애 두 번째 올림픽을 알차게 마무리했다.

내 경기 보는 사람들도 재미있었으면

준결승에서 튀르키예 하티세 아크바시에게 2:3(28:29 27:30 29:28 27:30 29:28)으로 아쉽게 판정패했다.

준결승에서 튀르키예 하티세 아크바시에게 2:3(28:29 27:30 29:28 27:30 29:28)으로 아쉽게 판정패했다.

12년 전 복싱 메달리스트가 지금의 한순철 코치님이잖아요. 동메달이 결정된 후 어떤 얘기를 하던가요.
동메달이 확정됐을 때는 금메달까지 가자고 하셨는데, 막상 준결승에서 지니까 이제야 긴장이 풀린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파리에 있는 동안 휴대전화를 잘 안 봐서 몰랐는데 코치님이 인터뷰 때 우셨다는 거예요. 그때 알았더라면 코치님을 놀렸을 텐데 아쉬워요(웃음).

준결승전 판정이 간발의 차였어요. 격전을 펼치고 나서 “이긴 줄 알았는데 후회는 없다” “제 경기 재미있죠?”라고 말해서 놀랐습니다.
저도 져서 아쉽죠. 하지만 경기하는 동안 재미있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그냥 내가 재미있었던 만큼 다른 사람들도 내 경기를 즐겁게 봐줬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솔직히 그 경기 모니터링을 아직 안 했어요. 경기하면서 느낀 걸로만 얘기하자면, ‘내가 이겼겠다’ 생각은 했어요. 하지만 결과가 바뀌지 않을 거라면 받아들여야죠. 이번 경기는 내가 더 확실하게 하지 않아서 졌나 보다, 생각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게 마음이 편한 것 같아요.

올림픽 2개월을 앞둔 6월에야 파리행을 확정했잖아요. 내내 마음 졸였을 것 같아요.‌
파리에 있으면서 제가 올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돌아봤어요. 올 3월에 이탈리아에서 열린 1차 세계 예선에서 지고, 한국 오자마자 선발전을 다시 하고 6월에 태국에서 열린 올림픽 2차 세계 예선에서 티켓을 땄거든요. 그 기간은 올림픽에 나가는 게 목표였고 해냈잖아요. 이제 올림픽을 목표로 다시 불타올라야 하는데, 너무 지치더라고요. 쉴 수 없어서 그게 좀 힘들었어요.

그 와중에 왼쪽 어깨와 햄스트링 부상을 입었는데, 경기에 지장은 없었나요.‌
다리 아픈 건 제가 스텝을 많이 뛰는 스타일이어서 예전부터 아팠어요. 어깨는 처음으로 부상을 입다 보니 좀 예민해지더라고요. 불안하니까 연습을 더 하게 되고, 그러면 또 어깨와 다리에 부담이 되고. 쉬어야 낫는다는 걸 알지만 쉬면 못하게 될까 봐 훈련을 안 할 수 없었어요. 오히려 올림픽 기간에는 몸이 안 따라준다면 이런 전략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해 연습을 좀 쉬고 상대 영상을 많이 봤어요. 그런데 제가 운동을 안 하니까 선생님들이 엄청 긴장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공격하고 방어할지 다 생각해놨으니 저만 믿으라고, 다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경기는 잘 뛸 거라고 안심시켜드렸어요(웃음).

값진 동메달이네요. 게다가 이번에 북한의 방철미 선수와 나란히 시상대에 올라 화제였어요.‌
방철미 선수와 처음 만난 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때예요. 그때 방철미 선수는 아래 체급이었고 저는 위 체급이었어요. 이번에 언니는 살을 찌워 체급을 올리고 저는 체급을 낮춰 만나게 된 거죠. 그때만 해도 (남북 선수단이)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서로 잘 어울리고 체급이 다르니까 같이 말도 많이 하고 응원하기도 했는데, 같은 체급까지 되니까 분위기가 좀 삭막해졌죠. 안타까웠어요.

특히 같이 셀카 찍을 때 임 선수는 활짝 웃고 방 선수는 무표정이더라고요.‌
언니가 도통 웃지를 않으니 여러 생각이 스쳤지만,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냥 그대로 사진 찍었어요. 솔직한 심정은 언니 빨리 웃으라고 툭툭 치면서 장난하고 싶었어요.

운동 마니아 가족, 선수 시작 1년 만에 우승

다소 무표정한 북한 방철미 선수(왼쪽)와 달리 발랄한 표정으로 함께 셀카를 찍고 있는 임애지 선수.

다소 무표정한 북한 방철미 선수(왼쪽)와 달리 발랄한 표정으로 함께 셀카를 찍고 있는 임애지 선수.

임애지 선수의 가족은 생활체육을 즐긴다. 어머니는 마라토너이자 마라톤 행사 업체를 운영 중이고, 동생 임하진은 경기도청 소속 크로스컨트리 선수다. 어려서 잠깐 육상선수를 했던 임애지는 “복싱은 안 된다”는 부모님의 반대를 이기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복싱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학교에 복싱부가 없어 다니던 체육관에서 운동했는데, 선수 시작 1년 만에 지역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복싱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2017년 세계유스여자복싱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여자 복싱 최초로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화려하게 세계 무대에 데뷔했다.

항상 이기기만 한 건 아니다. 현재 여자 복싱은 국내 대회와 국제 대회의 체급이 다르다. 평소 몸무게가 58kg 정도인 임애지는 전국체전에는 3개 체급(51kg·60kg·75kg급) 중 그나마 가까운 60kg급으로 증량해 출전하고,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는 54kg급으로 나간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선 60kg급 간판 오연지 선수에게 우승을 내줄 때가 많았다. 또 한국체대 재학 당시 한국 여자 복싱 사상 처음으로 2020 도쿄 올림픽의 본선 출전권을 따냈으나 세계의 벽은 생각보다 더 높았다. 당시를 떠올리며 임애지 선수는 “잘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되니까 샌드백 치면서 울고 그랬다”고 회상했다.

‌부모님이 반대했을 때 어떻게 설득했나요.‌
부모님께서는 제가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건 거의 해주셨어요. 그런데 복싱은 유독 안 된다고 하셨죠. 반대하시니까 더 하고 싶어져서 고집을 피웠어요. 힘들게 허락받아서 그런지 체육관에서 배운 동작을 늘 엄마한테 보여줬어요(웃음). 그때까지만 해도 취미로 하다가 중학교 때 본격적으로 선수반에 들어갔어요. 그래야 복싱을 계속할 수 있었거든요. 당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제가 복싱 빼곤 아무런 학원도 다니지 못했어요. 엄마는 “선수 할 것도 아닌데 이제 그만 다니면 좋겠다”고 하셨죠. 그때 복싱을 계속 배울 이유를 만들어야겠다 생각하고 선수를 한 거예요.

부모님이 마라톤, 검도 등 운동에 능한 분들이라 유전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운동을 자연스럽게 접하긴 했죠. 엄마한테 줄넘기를 배운 기억도 나요. 제가 줄넘기를 못해서 엄마가 같이 줄넘기를 해줬는데, 방법을 알려주지는 않고 엄마 혼자 계속하시는 거예요. 엄마만 잘하니까 자극을 받아서 저도 열심히 했어요. 그렇게 같이 운동한 시간이 좋았어요.

학창 시절엔 어땠나요.
그만 연습하라고 해도 나와서 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생각해요.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선수들이 진로를 결정해야 하니까 연습량도 많고 힘들어해요. 저는 2학년 때 선배들을 보면서 힘들겠다 싶으면서도 ‘곧 나도 저렇게 할 수 있겠지?’ 하고 기대했던 것 같아요. 그만큼 실력이 더 성장하는 거잖아요. 제가 선수 생활을 한 지 10년이 됐어요. 돌이켜보니 ‘10년 뒤에 나는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따야지’ 정하고 ‘이제 9년 남았다, 8년 남았다’ 하면서 자신을 압박하면 힘들어져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열심히도 좋지만 포기하지만 않으면 좋겠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저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진짜 많았거든요.

슬럼프가 온 적이 있었나요. 어떻게 이겨냈나요.‌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국제 대회인 세계선수권대회 나가서 금메달을 땄는데, 당시에는 그게 대단한 건 줄 잘 몰랐어요. 그 상태로 무조건 금메달을 따겠다는 자만심을 가지고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을 뛰었죠. 첫판에 졌어요. 그때 충격을 많이 받았는데 그 후로도 계속 졌어요. 진짜 많이 울고 포기하고 싶고 좌절감에 빠져 시간을 보내다가 ‘내가 그만두더라도 메달은 따고 그만둬야겠다, 이길 때까지 해보자’고 생각했죠. 이길 때까지 포기만 안 하면 돼요.

링 아래선 계획 세우고 글쓰기 좋아해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팀에 있을 때보다 선수촌에 있는 시간이 더 많다 보니 선수촌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오전 6시부터 7시 30분까지 한 번, 오후 2시 30분부터 6시까지 운동해요. 야간에 1시간 정도 더 할 때도 있고요. 쉴 때는 주로 제 방에 있어요. 제가 MBTI가 ESTP예요. 일단 해야 할 일을 다 적고, 하고 싶은 일은 운동하고 나서 빈 시간에 해요. 그런데 E와 I의 중간쯤이라 할 일이 없으면 방에서 블로그에 글을 써요. 글감이 없으면 독후감이라도 올리려고 해서 겸사겸사 책도 더 읽게 되고 좋아요.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몬스타엑스가 이번 올림픽 때 SNS에 응원 메시지를 올려줬는데요. 힘이 됐겠어요.
SNS 알림을 꺼놔서 못 보고 있다가 몬베베(몬스타엑스 팬덤)들이 알려줘서 알았어요. 내 존재를 알고 있다니, 깜짝 놀랐어요. 또 그 덕분에 몬베베들이 저를 응원해주니까 힘이 많이 됐고요. 평소 몬스타엑스 노래도 즐겨 듣고 멤버들을 다 좋아하는데, 이런 날이 오다니 신기했어요.

전국체전에 나가려면 다시 체급 조절을 해야겠네요. 평소 몸무게가 몇 kg인가요.
평소 58kg인데 국제 경기는 감량해서 54kg급에 나가요. 아무래도 저보다 원래 마른 선수들과 경기하면 더 유리하죠. 하지만 제 소속 팀 입장에서는 제가 전국체전에 60kg급으로 나가야 하니까 살을 뺀다면 곤란하죠. 그렇다 보니 찌우고, 빼는 게 늘 부담이에요. 특히 복싱은 당일 계체를 해요. 하루에 한 경기밖에 안 하다 보니 매번 시합 바로 전 몸무게를 재요. ‘이렇게까지 하면서 국가대표를 해야 할까’ 고민한 적도 있어요.

살을 뺄 때와 찌울 때 어느 쪽이 더 힘든가요.
찌우는 거요. 진부한 대답이지만 적게 먹고 많이 운동하면 살은 빠져요. 더 이상 빠지지 않는 때가 오면 옷을 껴입고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달리기가 가장 많이 빠지는 것 같아요. 이번에는 다리 부상 때문에 사이클 위주로 운동했어요. 반대로 찌울 때는 많이 먹어요. 그런데 열심히 먹고 운동하면 또 빠져요. 그래서 살 찌우는 게 더 힘들어요. 국내 대회에선 항상 살찐 상태로 사진이 찍히니까 속상해요(웃음).

현재 복싱이 올림픽에서 퇴출 위기라 더 마음이 복잡하겠어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일단 준비는 해야 할 것 같아요. 만약 퇴출이 안 되면 준비한 대로 밀어붙이고, 퇴출되더라도 아시안게임이라든지 다른 시합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이번에 메달을 따면서, 복싱을 잘 모르는 분들한테 제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책임감이 좀 생겼어요.

복싱의 매력이 뭔가요.
멋있어요. 재미있고요. 이렇게 재미있는데 선수층이 얇아 아쉬워요. 특히 복싱선수가 늘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달리기 훈련을 줄여야 해요. 물론 달리기의 중요성과 효과를 잘 알죠. 다만 선수들이 경기하다 다치는 게 아니라 연습 때 뛰다가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훈련 때문에 포기하지 않도록 시스템이 바뀌면 좋겠어요. 그래야 지금보다 선수층이 두꺼워지고 체급도 세분화할 수 있어요. 선수가 부족해서 체급을 늘릴 필요가 없다는 의견과 반대로요. 체급이 세분화돼 있다면 오히려 체급 맞추기 위해 들여야 하는 부담이 줄어서 도전하는 사람이 더 늘겠죠.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말할 기회를 만들려고 더 열심히 했어요. 저, 야망 있죠? 하하.

야망 있는 임애지 선수의 버킷 리스트는 뭔가요.
저는 버킷 리스트를 해마다 짜요. 매해 목표를 설정해 그 목표를 달성했을 때 추가 목표를 또 세우고요. 그러면 조금씩 제가 원하는 대로 이뤄져요. 선수가 아닌 개인으로서는 책도 내고 싶고, 제가 해외로 시합 나가서 혼자 머리를 예쁘게 할 수 있도록 헤어 관련 자격증도 따보고 싶어요. 올해 버킷 리스트 중에 대형 운전면허 따기가 있었는데 그건 2월에 땄어요.

왜 대형 면허를 따고 싶었나요.
멋있잖아요(웃음). 멋있기도 하고, 부모님이 마라톤 행사를 하면서 필요한 물품을 대여해주는 일도 하는데 짐을 옮기려면 대형 트럭이 필요해요. 이번에 면허를 따고 엄마한테 일손이 부족하면 언제든 불러달라고 했어요. 좋아는 하시는데 위험하다고 안 된대요. 언젠가 대형 면허를 쓸 일이 있겠죠. 저는 제가 세운 목표가 다소 어렵겠다 싶어도 지우진 않아요. 쉬운 일이면 남들도 다 하겠죠. 다른 사람들이 안 하는 일, 못 하는 일을 해낼 때 더 성취감이 크잖아요.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요(웃음).




#임애지 #복싱 #올림픽 #여성동아

‌사진 이상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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