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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승수의 인생은 지금이 딱 좋다”

메모광 류승수의 배우학개론

글·구희언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채널A 제공

2013. 07. 16

생각보다 깊고, 예상외로 귀여웠으며, 상상 이상으로 인간미 넘치는 배우. 인터뷰를 마치며 류승수에게 한껏 취해버렸다.

“승수의 인생은 지금이 딱 좋다”


몰랐다. 배우 류승수(42)가 이 정도로 ‘메모광’인 줄은. 휴대전화에는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과 만남에서 얻은 영감을 적은 메모가 가득했다. 채널A 모큐드라마 ‘싸인’ 기자간담회 현장에서 그를 만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기자들은 ‘스크롤 압박’이 느껴지는 방대한 메모량에 입을 떡 벌렸다. 역시 작가였다. 2009년 ‘나 같은 배우 되지 마’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린 그가 아니던가.
그런 류승수가 채널A 모큐드라마 ‘싸인’의 진행자로 6월 25일부터 시청자를 다시 만난다. 모큐드라마는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합친 일종의 페이크 다큐로, 기존 사건에서 모티프만 가져와 재구성한 드라마다.
“2월 파일럿 방송 때는 스튜디오에서 진행자 역만 맡았는데, 이번에는 제가 참여하는 부분이 늘어날 거예요. 직접 사건 현장에 찾아가는 탐정이나 형사의 느낌을 살릴 생각이죠. 조금 더 긴박감 넘치는 장면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생소한 장르에 출연하게 돼 약간 두렵다”며 “제게도 새로운 도전인 셈”이라고 했다. 충격적인 사건을 다루고 남성 MC 한 명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포맷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와도 닮았다. 더군다나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자는 드라마 ‘추적자’에서 함께 호흡한 배우 김상중이 아닌가.
“김상중 선배랑은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만나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새로운 장르인 모큐드라마에 대한 염려와 조언을 해주셨어요. 이 작품을 하면서 MC라는 느낌보다는 나만의 드라마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진행자’도 하나의 ‘캐릭터’로 만들어보자는 거였죠. 그 부분을 제작진에게도 제안했는데, 회가 거듭될수록 달라지는 진행자의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최근 ‘추적자’의 의협심 넘치는 박정우 검사 이미지로 각인됐지만, 본디 그는 ‘달마야 놀자’의 묵언 스님이나 ‘얼렁뚱땅 흥신소’의 김용수 같이 코믹 연기로도 정평이 난 배우다. 그는 “코미디를 할 때는 별로 안 먹혔는데 ‘추적자’ 때 검사를 연기하니 조금씩 반응이 오더라”라고 했다.

코믹 연기와 악역을 자유롭게 오가는 배우
“그래도 이전과는 달리 ‘싸인’ 같은 시사성 있는 작품의 진행을 맡는다는 건 기본적으로 배우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시청자에게 그런 신뢰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좋아요. 얼마 전에는 데뷔 후 처음으로 조직 보스 역을 해달라고 제의가 들어와서 KBS 드라마 스페셜 ‘시리우스’에서 완전 악역을 연기했는데 반응이 좋더라고요. 사람들은 ‘네 안에 악마가 있다’면서 ‘새로운 너를 발견하라’고 하지만, 사실 전 원래 다 할 수 있었어요(웃음). 그전에는 들어오는 역할이 한정돼 있어서 보여드리지 못했을 뿐이죠. 새로 시작하는 작품에서도 전직 조폭 역인데 자칫하면 이런 이미지로 굳어질까봐 살짝 걱정되긴 하죠.”
류승수라는 배우의 신뢰감 덕일까. 실제로 그는 은행과 카드사 광고 등 금융권 광고에 다수 출연했다. 그는 “장난도 많이 치고 웃긴 걸 좋아하는 스타일인데 이미지가 좋게 보였나 보다”라며 웃었다. 앞으로 주어진 숙제는 ‘배우 류승수’의 틀을 깨는 것이다. 그는 “코믹 연기와 악역을 자유롭게 오가는 좋은 배우, 신뢰 가는 배우로 자리 잡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말은 이렇게 해도 그는 충분히 신뢰받고 있다. 류승수가 나오면 ‘믿고 본다’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신뢰의 기저에는 노력이 있다. 백조가 수면 아래로 치열하게 물장구치듯 말이다.
“제가 배우 중에서도 대사가 많은 편이거든요. 대본을 받으면 독백만 아홉 장씩 나올 때도 있어요. 그렇게 대사를 지긋지긋하게 치면서 어느 정도 숙달됐다 생각했는데, 내레이션은 또 다른 세계더라고요. ‘싸인’을 진행하며 제가 발음이 참 좋지 않은 배우라는 걸 알았어요. 경상도 출신이라 쌍시옷이나 쌍기역 발음이 어렵더라고요. 그걸 고치려고 지금까지 내레이션한 대본을 전부 보관해두고 가끔 꺼내서 다시 읽고 연습하죠. 평소 말이 빠른 부분에서는 손동작을 크게 하며 호흡을 조절하고 있어요.”
그는 내레이션을 녹음할 때 자료화면을 보지 않는다고 했다. 잔인한 사건 영상을 보면 각인이 돼서 비슷한 장소에서 똑같은 장면이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한 무서운 인간을 원래 그곳에 살았던 것처럼 연기하는 배우가 수년 전 들은 귀신 이야기가 무서워 머리 감을 때도 고개를 들고 감는다니, 그 모습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밤에 혼자 자는데 무섭잖아요(웃음). 무서운 거요? 귀신, 여자, 세상이 무섭죠. ‘그것이 알고 싶다’를 자주 보는데 가면 갈수록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나더라고요. 처음에는 세상이 잘못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과거에도 있었지만 은폐된 사건이 소통의 길이 열리면서 표출되는 현상 같아 세상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도기구나 생각하고 있죠.”
류승수가 ‘싸인’ 진행자로 발탁된 결정적인 계기는 드라마 ‘추적자’의 박정우 검사 역이었다. 사회 고발에 대한 통렬한 메시지로 큰 울림을 준 작품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추적자’ 제작진이 다시 모여 만드는 SBS 월화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서 류승수는 변신을 꾀하려고 한다. 조폭 출신 사업가 조필두 역으로 전혀 다른 매력을 보여줄 예정이다. 함께 출연하는 손현주·박근형·장신영과는 ‘추적자’에서, 고수와는 영화 ‘고지전’에서 연기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친한 사람들이 뭉친지라 촬영장 분위기도 화기애애하다고.
“손현주 선배는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부르면 달려가고 싶을 정도로 존경하는 선배예요. 연출을 맡은 조남국 감독님은 행복한 현장을 만들어주시고 배우들에게 사랑을 주시는 영원한 멘토죠. 배우들이 연기하는 동안에는 배우가 다칠까 걱정하느라 식사를 못 하세요. 현장에서는 혼자 스태프들이 피우다 버린 담배 꽁초를 주우러 다니시죠. 아마 그런 감독님을 믿었기에 손현주·박근형 선배, 장신영 씨도 함께한 거 같아요. 다른 친구들은 참여를 못해서 많이 아쉬워하고 있어요.”
‘특정 배역 전문배우’의 틀에 갇히지 않는 비결을 물었다. 그는 “어제 연예인 지인과 밤새 얘기 나누다 그 비결을 알았다”며 씩 웃었다.

“승수의 인생은 지금이 딱 좋다”


“옛날에는 아주 잘생겼거나 아예 못생겨야 배우로서 많은 러브콜을 받았는데, 제 얼굴은 정말 이도 저도 아니잖아요. 아무 색도 없고…. 그게 쌓이니까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어요.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까 얼굴이 변하더라고요. 이제는 아무거나 다할 수 있는 얼굴이 된 거예요. 그래서 요즘엔 후배들에게 ‘배우는 길게 봐야겠다’고 말해줘요.”
장혁, 김지석, 조동혁, 최필립…. ‘연기자들의 연기 선생’으로 통하던 류승수로부터 연기의 초석을 다진 배우들이다. 그러나 그는 “배우를 꿈꾸는 친구를 만났을 때 ‘내가 포기시킬 수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포기시킨다”는 의외의 말을 했다.
“남이 포기하라 한다고 포기되는 길이라면 가지 말아야 해요. 너무 힘들기 때문이죠. 누군가 말리고 설득하는데도 기어코 가야 하는 사람들만이 배우로서 살아남을 수 있어요. 연예인이 특권의식을 가졌다고 하지만, 대부분 특권의식이 아니라 피해의식이 있어요. 식당에서 막힌 룸을 찾는 것도 차별화가 아니라 식사 도중 오해를 사거나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죠. 연예인은 돈을 쉽게 벌고, 또 잘 버는 줄 알지만 그건 극소수일 뿐, 생활을 겨우 유지하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빚을 져가며 연기하고, 막연히 작품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다 우울증에 걸리는 배우도 많아요.”
그는 “아무리 훌륭한 스타라고 해도 ‘갑’이 될 수는 없다”고 했다.
“남자 배우로서 가장 꽃피는 나이가 마흔이고, 가장 위험한 나이도 마흔이에요. 현장에 나가보면 감독도 스태프도 다 저보다 어려요. 어떤 현장에서는 제가 최고 연장자일 때도 있죠. 그럴 때 남자 배우들이 교만에 빠져요. 안하무인이 돼 직접 연출을 해버리는 거죠. 배우는 영원한 ‘을’이에요. 누군가에게 선택받아야 하는 직업이라 아무리 톱스타라도 결코 ‘갑’이 될 수 없죠. 내가 갑이 되려 하는 순간 영원히 을도 될 수 없는 거예요. 내로라하는 스타였다가 꺾어지고 뿌리째 뽑힌 배우들이 대부분 마흔 무렵에 그랬어요. 기지개를 켤 때가 아니라 움츠리고 낮춰야 하는 나이가 마흔이에요.”
모든 질문에 정공법으로 답해서였을까. 대답에 ‘깊이’가 있었다. ‘나 같은 배우 되지 마’에서 “수많은 상처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고 배우에게 연기의 깊이를 만들어준다”고 썼던 그였다. 바꿔 말하면 그에게도 상처투성이의 과거가 있었다는 뜻. 아역 배우만도 못한 무명 배우의 설움, 중심이 아닌 변방을 배회하는 모습, 작품에 출연하기까지 영겁 같은 기다림…. 그는 “연기에 대한 실패를 무수히 맛봤다”고 했다.
“심각하게 연기를 관둘까, 배우가 내 길이 아닌가 오래 고민했어요. 그런데 다른 걸 할 자신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을 것 같아 끝까지 온 거죠. 연기하면서 항상 주변인이던 제 모습도 싫었어요. 제 이름 앞에는 꼭 누구의 친구 류승수라는 수식어가 붙었죠. 누구나 세상의 중심이 나였으면 좋겠잖아요. 참 재미난 거는 이제는 굳이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주인공이 아니고 큰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행복하면 좋겠어요. ‘겨울연가’ 일본 팬 미팅을 가서 오랜만에 윤석호 감독님을 만났는데, 술 취해서 둘이 걷다 감독님이 그러더라고요. ‘승수야, 내가 볼 때는 네 지금이 딱 좋다’라고요. ‘왜요?’ 하니까 ‘톱보다는 너 정도 위치에서 꾸준히 연기하는 게 가장 좋은 것 같다. 톱은 정상과 바닥을 오르내리지만 그런 폭 없이 연기할 수 있다는 건 배우에게 가장 큰 행복이다’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굉장히 공감했죠.”



“승수의 인생은 지금이 딱 좋다”

류승수는 채널A 모큐드라마 ‘싸인’에서 진행자로서의 매력을 보여줄 예정이다.



방송 마치고 집에 돌아와 글쓰기 삼매경
철학책을 좋아해서 많이 읽고, 칼릴 지브란의 책을 즐기며 최근에는 인문서적을 뒤적인다는 그는 올해 하반기와 내년에 두 권의 책을 낼 예정이다. 방송 촬영 후 남은 시간은 운동과 집필로 정신없이 보낸다.
“올해 가을쯤 나올 책은 ‘너무 큰 거울에 나를 비추지 마라’라는 제목의 에세이예요. 어느 날 거울을 봤는데 제가 너무 작아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적당한 크기의 거울 앞에 서니까 얼굴의 잡티까지 선명하게 보이고 제대로 저를 볼 수 있었죠. 불현듯 인생도 똑같구나 생각했어요. 나한테 맞는 적당한 거울에 나를 비춰볼 때 인생에서 행복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배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지혜로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죠. 내년에 낼 책은 ‘배우의 바이블’이에요. 현장에서 연기하는 기술적인 모든 걸 집약해 신인 배우를 위한 정통 교육서가 될 거예요. 현장의 목소리를 그대로 살린 제 야심작입니다. 하하.”
책을 낸 연기자 중 유난히 원고량 많기로 손꼽히는 이 ‘괴물’ 같은 남자는 시나리오 작가에도 도전할 생각이라고. 벌써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연출은 아니고 작가로 이르면 내년쯤 만날 수 있을 거다. 로맨틱 코미디인데 다른 부분은 아직 비밀”이라며 웃었다.
“내가 생각하는 배우의 길은 취미로 운동을 하거나 외국어를 배우듯, 그저 ‘한 번 해볼까’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시작되는 길이 아니다. 인생을 걸 각오로, 자신의 모든 꿈이 돼버려 도저히 그 꿈을 버릴 수 없다는 진지한 무게가 느껴질 때 그렇게 시작하는 길이다. (‘나 같은 배우 되지 마’ 252p)”
그랬다. 저 뚝심. 선택을 기다리는 ‘을’의 세계에서 16년째 배우로 살아남은 맷집. 배우로서 평생 하나만 쥐고 가야 한다면 ‘실력’을 쥐고 갈 거라는 류승수는 ‘조연처럼 부딪히고 주연처럼 빛나는’ 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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