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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빠 된 감동의 아이콘 닉 부이치치

“제 아내를 공개합니다”

글·권이지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닉부이치치 아시아 재단 제공

2013. 06. 25

사지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팔로 많은 이의 아픔을 감싸 안으며 행복을 전도하는 호주판 오체불만족 닉 부이치치. 2012년 결혼해서 보금자리를 꾸민 그가 아들을 낳고 3년 만에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아빠가 된 그가 한국의 청소년들과 부모들에게 들려주는 희망 메시지.

아빠 된 감동의 아이콘 닉 부이치치


안녕하세요, 저는 닉 부이치치(33)입니다. 이번이 세 번째 한국 방문입니다. 한국 청소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다시 오게 됐어요. 지난번 방문 때는 결혼이라는 것이 저와는 먼 이야긴 줄 알았는데, 1년 전에 사랑스러운 반려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얼마 전엔 아들도 태어났죠.
이번에는 제 새로운 책 ‘닉 부이치치의 플라잉’과 함께 한국을 찾았어요. 이 책은 제가 2년 전 무척 우울한 시기를 보내다가 사랑을 통해 이를 극복해내고 쓴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뭐든 할 수 있는 슈퍼 히어로로 알고 있지만, 저 역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말하기 힘든 개인적인 어려움이 무척 많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삶 속에는 힘든 시절, 좋은 시절, 어려운 시절이 있는 것처럼요. 저 또한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삶을 포기하려는 순간 찾아온 희망
아시다시피 저는 팔다리가 없이 태어났습니다. 제 병명은 해표지증(phocomelia·바다표범처럼 팔다리가 짧은 기형)이라고 합니다. 제가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은 몇 달 동안 아이가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 이곳저곳 답을 찾으러 다녔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답을 얻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셨대요. 그리고 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하시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저를 품에 안고 키우지 않으셨어요. 스스로 앉는 법과 먹는 법을 가르치고, 수영과 컴퓨터를 배울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연필과 볼펜을 쥘 수 있는 특별한 플라스틱 틀을 만들어 제가 글씨를 쓸 수 있게 하셨죠. 그래서 어릴 때는 제 모습이 남들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유치원에 다니면서 상황이 달라졌어요. 친구들이 저를 보고 손가락질하며 놀렸거든요. 그때부터 저는 제 자신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어요. 일반 학교에 들어가면서는 더더욱 처절하게 실감했습니다. 제가 지나갈 때마다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기 일쑤고, 무섭다고 피하거나 휠체어에 앉은 저를 다른 자리로 옮기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러면서 열 살 무렵, 저는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한 번은 부엌 싱크대 위로 기어올라가 몸을 날렸어요. 아팠지만 죽지는 않았죠. 또 한 번은 물이 가득한 욕조에 몸을 던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저를 바로 꺼내셨고, 목숨을 건졌습니다. 얼마 뒤 어머니가 저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그때 부모님의 사랑을 알게 됐고, 용기를 얻었죠. 저를 놀렸던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에 도전하기 시작했어요. 서핑보드, 스케이트보드, 축구, 드럼, 요트…. 나중에는 스카이다이빙에도 성공했죠.
어린 시절 저는 평생 동안 직업을 가질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대학도 못 갈 것 같고, 결혼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죠. 당연히 아빠가 될 꿈은 꾸지 않았어요.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19세 때 학교 청소부가 제 모습을 보며 “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어”라고 응원해줬어요. 그분은 작은 모임에서부터 저의 목소리를 전하라고 조언해주셨답니다. 그분 덕분에 저는 대학도 졸업하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희망을 전할 수 있게 됐어요. 또한 부모님의 무한한 사랑 덕분에 이렇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절망에 날개를 달아주셨고요.
한국의 자살률이 높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집단 따돌림으로 목숨을 끊는 학생이 많다고요. 저도 어릴 때 따돌림을 당해 자살을 결심했지만, 부모님이 용기를 주셨기에 살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 사람이라도 자살로부터 구해내는 것이 제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청소년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부모님을 공경하고 존경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부모님의 큰 기대 때문에 너무 좌절하고 낙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요. 나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꼭 알려주고 싶어요. 제가 힘들고 지쳤을 때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분명 있었다는 것도요.
19세 때 처음 강연을 시작한 이후 비영리단체인 ‘사지 없는 삶’과 강연 및 DVD 제작을 돕는 회사 AIA(Attitude Is Altitude)를 운영하면서 저는 전 세계를 돌며 4백만 명 이상의 청중 앞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하지만 2010년 12월쯤 경기 침체기를 맞아 회사에 재정난이 닥쳤습니다. 그러면서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갔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때였죠. 하지만 그렇게 좌절했을 당시 여자친구였던 카나에가 제게 큰 힘이 됐습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이 도산 위기에 빠졌는데도 카나에는 조건 없이 사랑해주었죠.

아빠 된 감동의 아이콘 닉 부이치치


하늘이 내려준 짝 카나에의 조건 없는 사랑



아빠 된 감동의 아이콘 닉 부이치치

책의 원제 ‘Unstoppable(막을 수 없는)’처럼 닉 부이치치는 자신의 열정을 쉴 새없이 주변에 나눠주고 있다.



카나에를 만난 건 2010년 4월 미국 텍사스 주 댈러스의 한 강연장에서였어요. 그곳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답고 슬기로운 눈을 지닌 여성을 보고 한눈에 반했어요. 카나에는 일찍 세상을 뜬 일본인 아버지와 멕시코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언니와 함께 강연을 들으러 왔었는데, 대화를 거듭할수록 매력적인 여성이었어요. 하지만 카나에에게는 1년 정도 만난 남자친구가 있었죠. 제가 속으로 낙담하고 있을 때 카나에는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할까 고민하고 있었다더군요. 그리고 제가 첫눈에 반한 것처럼 카나에도 제 눈을 보며 똑같이 느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한 듯했어요.
하늘에 뜻을 맡긴 몇 달 뒤, 카나에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카나에는 제게 “평생을 함께할 친구와 살고 싶다”고 고백했어요. 그동안 봤던 로맨스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로맨틱한 장면 속에 들어간 느낌이었죠. 카나에의 어머니와 언니는 제 장애에도 불구하고 망설이지 않고 우리 둘을 축복해줬어요.
제 아버지와 어머니도 카나에를 보고 깊이 사랑하게 됐어요. 그 나이 때 여성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지혜로움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혹 나중에 제가 상처받게 될까봐 부모님은 카나에에게 다소 까다로운 질문을 던졌어요. 제가 유전적 요인 탓에 팔다리 없이 태어난 게 아니었음에도 만에 하나 저와 같은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요. 카나에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어요.
“다섯 아이가 모두 팔다리 없이 태어난다 해도 똑같이 사랑하겠어요. 저는 훨씬 쉬울 거예요. 두 분은 느닷없이 닉을 만났지만, 제게는 아이들이 보고 따를 롤 모델이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카나에는 부모님께 저를 깊이 사랑하고 있으며, 장차 태어날 아이들도 그렇게 키우겠다고 말했어요. 그 말에 부모님은 카나에를 인정하고 또 사랑하게 되셨죠.
카나에는 어느 면에서든 저보다 더 슬기로운 여성이에요. 그 깊이를 실감한 것은 2010년 12월이었죠. 교제를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았고, 상대에게 가장 빛나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시절에 운영하는 회사가 자금난에 빠지고 말았어요. 저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짊어진 부채 탓에 쓸모없는 존재가 됐다는 자책에 시달렸어요. 가치 있는 인간이란 확신마저 들지 않았죠. 하지만 카나에는 그때마다 사랑에는 가격표가 없다는 사실을 제게 일깨워줬어요. 제가 용기를 내서 사업이 이익을 내지 못하게 됐다고 털어놓자 카나에는 “상관없어요.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쯤은 나도 할 수 있어요. 둘이 벌면 얼마든지 먹고살 수 있을 거예요”라고 위로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언젠가 만날 아내에게 바라는 열 가지 조건을 꼽는 일기를 쓴 적이 있어요. 하루는 바타 삼촌이 그걸 기억해내곤 “카나에는 그 조건들과 잘 들어맞는 아가씨니?” 라고 물으셨죠. 저는 일기장을 꺼내 다시 읽어보고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예, 딱 맞아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똑같아요!”
2011년 7월 저는 바다 위 요트에서 카나에와 약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7개월 후인 2012년 2월 결혼에 골인했어요. 많은 분이 어떻게 카나에 같은 현명한 짝을 만날 수 있었는지 물어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상대방이 순결하기를 바란다면 자신이 먼저 순결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해요. 상대방이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기대한다면 먼저 스스로를 바꿔야겠죠. 존경받고 싶다면 상대를 존경해야 한다는 말처럼요. 독신으로 살 때 행복하지 않으면, 결혼해서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혼자 살 때도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정리한 뒤 결혼하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짝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도 꼭 가지시고요.

아들을 지키는 슈퍼맨이 되리라

아빠 된 감동의 아이콘 닉 부이치치


결혼 1년 만인 올 2월에 아들 키요시가 태어났습니다. 키요시를 보면서 정말 놀랐어요. 15~20분 동안 아이를 쳐다보면서 감격에 젖었죠.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보통의 아버지들처럼 아이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 대신 아이와 침대에 함께 누워 교감을 나눴습니다. 저는 앞으로 키요시가 어떤 일에도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격려하고, 겸손할 수 있게 가르치려고 합니다.
저는 온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수만 명의 어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그리고 어느 누구도 괴롭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오래도록 심하게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들은 내향적인 외톨이가 되기 쉽고, 자존감이 낮아 싸우기보다는 회피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한 반 친구든, 괴롭힘의 표적이 된 이를 알고 있다면 도움의 손길을 내미세요. 제 경험에 비춰볼 때, 괴롭힘을 당하는 피해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고민이나 우울한 마음을 숨깁니다. 특히 어른들을 속상하게 하거나 부담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하는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됨됨이를 규정해선 안 됩니다. 근거 없이 깎아내린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이야말로 가해자들이 가장 고소해하는 모습입니다.
초보 아빠로서 저는 아이를 지키는 일에도 세계 챔피언이 되려 합니다. 제 아이 역시 언젠가는 누군가가 날려 보낸 잔인한 화살을 맞고 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저는 아이에게 또래의 독기 어린 말을 중화하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 아들에게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아이에게 삶의 가치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전하기 위해 또 다른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참, 내년에는 저희 아버지(보리스 부이치치)가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에요. 그리고 2년 뒤엔 저도 아내 카나에, 아들 키요시와 함께 올 거고요. 그 사이에는 닉 부이치치 한국 재단을 설립해 한국에 있는 고아와 장애인뿐 아니라 북한 사람들을 도울 예정입니다. 그리고 2년 뒤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면 이번에는 큰 강연장에 서서 한국의 모든 청소년에게 어떤 나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꿈을 크게 갖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타인을 괴롭히지 말라는 메시지를 생방송으로 전하고 싶습니다.

참고도서·닉 부이치치의 플라잉(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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