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달마야 놀자’에는 3년간 묵언 수행 중인 명천 스님이 나온다. 중반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던 그는 한 번 말문이 트이자 다른 사람들이 입을 막을 때까지 쉴 새 없이 떠든다. 지난 몇 년간 TV 출연도 기피하고, 영화 홍보 인터뷰마저도 마다하던 한석규(49)가 영화 ‘베를린’과 ‘파파로티’ 개봉을 전후로 묵언 수행을 끝낸 스님처럼 언론 인터뷰, 관객과의 대화 등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베를린’은 독일 베를린에서 펼쳐지는 남한과 북한 그리고 각 나라의 첨예한 대립 관계를 그려낸 첩보 액션 영화로 한석규는 유통기한 지난 상품처럼 취급되는 국정원 요원 정진수 역을 맡았다. ‘베를린’의 차기작 ‘파파로티’는 조직에 몸담고 있지만 노래에 천부적 재능을 지닌 건달 장호가 조직의 큰형님보다 까칠하고 시니컬한 음악 선생을 만나며 꿈을 이루는 이야기다. 한석규는 음악 선생인 상진 역을 맡았다.
3월 초 한석규는 SBS 토크쇼 ‘힐링캠프’에도 출연했다. 그가 오랜만에 인터뷰에 응한 이유는 나이가 들면서 전보다 여유가 생긴 것도 있지만, ‘파파로티’가 잘됐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그는 함께 주연을 맡은 배우 이제훈이 군 입대로 부재중이라 영화 흥행에 더 큰 책임감을 느껴 홍보에 적극 뛰어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석규는 경력 23년 차에 접어든 배우지만 그동안 자신의 인생관과 연기론을 털어놓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사생활에 대한 언급도 철저히 제한했다. 계기가 어찌 됐건 그는 긴 침묵을 깨고 자신의 생각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듣다보니 한석규라는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영화 ‘파파로티’의 음악 선생과 닮은꼴 인생
배우로서 한석규의 가장 큰 매력은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다. 사실 그는 학창 시절 성악가를 꿈꿨지만 사정 상 그 꿈을 포기했다. ‘파파로티’에서 성악가의 꿈을 접고 음악 선생이 된 상진과 닮은꼴인 셈이다. 음악 선생이 된 상진과 달리 한석규는 배우가 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보고 연기 또한 무대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고 배우를 꿈꿨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연기를 공부했다. 대학 생활은 퍽 다채로웠다. 같은 대학을 다니던 네 남자가 모여 군 입대 전 추억을 만들고자 ‘덧마루’라는 남성 4중창단을 결성해 1984년 제5회 강변가요제에 출전했고 ‘길 잃은 친구에게’라는 노래로 장려상을 수상해 연기보다 노래로 먼저 유명해진 것이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한석규는 강변가요제 이후 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상병 때 허리 부상으로 수술을 받고 의가사제대했다. 제대 후에도 허리는 좋아지지 않았다. 고민 끝에 몸을 써야 하는 배우의 꿈을 포기했다. 학교로 돌아온 그는 단편 영화 ‘무지개를 찾아서’를 연출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했지만 썩 잘되지는 않았다. 졸업 후 국립극단 오디션에서 떨어졌고, 대학로 연극 무대에서도 얼마 버티지 못했다. 꿈을 접고 일반 회사에 들어가려 했지만 이조차 쉽지 않았다. 배우가 되려던 그의 꿈은 잠시 접어야 했다.
대학 졸업 후 1년 가까이 방황하던 그는 성우가 됐다. 하지만 불쑥 떠오르는 꿈은 언제나 배우였다. 1년간 혹독하게 성우 훈련을 받은 게 도움이 됐는지 이듬해인 1990년 MBC 공채 탤런트 시험에 합격했다. 그때부터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 ‘아들과 딸’에 연달아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고, 1994년 ‘서울의 달’에서 주인공 홍식 역을 맡아 큰 인기를 얻었다. 뒤이어 영화계에 진출해 ‘닥터 봉’을 시작으로 ‘은행나무침대’ ‘초록물고기’ ‘넘버 3’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텔 미 썸딩’에 출연, 작품의 흥행과 함께 성공가도를 달렸다. 2000년 이전 한석규는 손대면 톡 하고 대박이 터지는 배우였다. 그래도 그는 늘 겸손했다.
“저는 어디 가서 감히 고생했다는 얘기 못해요. 너무 순탄하게 잘된 편이고, 금세 주연 배우가 됐으니까요.”
상승세를 타던 한석규에게 갑작스럽게 공백이 생겼다. 충무로 섭외 0순위로 하루 한 편씩 시나리오가 들어올 만큼 ‘핫’ 했던 때 그는 돌연 휴식기를 가졌다. 2003년 ‘이중간첩’으로 스크린에 돌아오기 전까지 3년간 그의 필모그래피는 빈 칸으로 남아 있었다.
“그냥 쉬었어요. 여러 가지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요. 그때 쉬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 오히려 득이 됐나 봐요. 만일 계속 좋았다면 제 모습이 형편없어졌을 것 같아요. 그런데 쉬고 나서 연기를 하고 싶었지만, 하려니 잘 안 됐어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죠.”
한석규는 26세 때 잠깐 들어갔던 극단에서 공연을 마친 뒤 “빨리 마흔 살이 되고 싶다”라고 말한 적 있다고 회고했다. 나이가 들면 편안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40대가 지나고 50대와 마주하게 되니 오히려 더 생각이 많아졌다고 한다. 나이 들수록 완성되는 게 아니라 혼란스럽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요? 늘 슬럼프예요. 요즘 들어 연기를 하면 할수록 자괴감이 들어요. 앞으로도 평생 시달리며 살 것 같아요. 평생 만족감도 못 느낄 것 같고요. 그래도 끝까지 해 볼 생각입니다. 내가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지 그 끝이 궁금해서죠. 그러다 보니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그는 언제까지 연기를 하고 싶을까. 한석규는 자신의 직업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 깨끗하게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한석규는 2003년 영화 ‘이중간첩’ 이후 1년에 한 편씩 영화에 출연했지만 드라마 출연은 전무했다. 드디어 2011년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 역으로 브라운관에 복귀했다. 마침 세종은 왜 한글 창제를 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던 한석규에게 이 드라마는 꼭 출연해야 할 작품이었다. 그는 세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놨고, 사람들은 그의 연기에 몰입했다. 그가 그린 이도는 기존의 세종대왕 이미지를 벗어난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
한석규는 ‘뿌리깊은 나무’ 촬영을 시작하기 전 작가로부터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 이야기를 듣자 한석규는 작가들 앞에서 장난삼아 욕을 했다. 바른 이미지의 한석규 입에서 욕설이 나오니 주변 사람들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한석규의 욕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작가는 인간과 왕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세종을 만들었다. 작가의 의도를 파악한 그는 대본 속에서 설득력 있는 세종을 꺼내 눈앞에 내보였다.
욕도 고급스럽게 구사하는 바른생활 사나이
1 그의 첫 첩보 영화 ‘쉬리’는 7백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2 심은하와 두 번째로 함께한 영화 ‘텔 미 썸딩’. 한석규에게 심은하는 예나 지금이나 다시 함께 일하고 싶은 여배우다. 3 영화 ‘음란서생’. 오달수는 한석규 덕분에 목숨까지 구했다. 한석규는 오달수와 이후 ‘구타유발자’ ‘파파로티’에서 호흡을 맞췄다. 4 한석규는 영화 ‘베를린’을 촬영하며 ‘쉬리’ 그 후를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쓸모없어진 요원의 마지막은 무엇인지 상상하게 됐다고. 5 영화 ‘파파로티’ 속 까칠한 음악 선생 상진은 한석규의 과거와 퍽 닮았다.
한석규는 어느덧 중견 배우가 됐다. 함께 출연하는 동료 배우에게 그는 어떤 존재일까? ‘베를린’에서 상대역을 맡은 하정우는 한석규에 대해 진지하지만 재미있는 사람이라 평했다. 오래도록 촬영을 진행하며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진지하지만 그 이면에 유머러스하고 엉뚱한 면이 있어요. 재미있는 단어를 골라 쓰고, 욕도 고급스럽게 구사하고요.”
한석규는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뿐 아니라 교훈이 될 만한 화두도 함께 던진다. 특히 그는 ‘왜 연기를 하느냐’라는 질문을 주로 한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와 영화 ‘파파로티’에 함께 출연했던 후배 조진웅에게 14번이나 물었을 만큼 그에게는 중요한 질문이다.
“후배들에게 물어보면 별별 사연이 다 있어요. 제 사연이 가장 재미없더라고요(웃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거예요. 처음 무대를 보고, 느끼고, 연기하고 싶다고 느낀 그 마음. 즉 초심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한석규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는 후배 연기자도 있을 만큼 그는 주변 사람을 극진히 챙기는 편이다. ‘음란서생’ ‘구타유발자’에 이어 신작 영화 ‘파파로티’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오달수는 2006년 무렵 한석규에게 큰 빚을 졌다고 ‘파파로티’ 제작발표회에서 깜짝 고백했다.
“한석규 선배가 저를 보고 건강검진을 받아보라고 했어요. 어느 날은 새벽 6시에 전화해서 꼭 받으라고 신신당부했죠. 병원까지 잡아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선배가 하도 닦달해서 병원에 갔더니 2년만 늦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고 하더라고요. 선배 덕에 목숨을 구한 셈이죠.”
한석규는 이에 대해 “그즈음 달수의 낯빛이 검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갑자기 달수 생각이 문득 나더라. 새벽에 전화하는 게 다소 어이는 없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여서 해봤다”라고 멋쩍게 웃으며 당시를 회상했다. 주변 사람들의 변화까지 꼼꼼히 살핀 한석규 덕에 건강검진을 받은 오달수는 제때 치료를 받고 완쾌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호흡을 맞춘 상대 배우 중 그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2001년 은퇴한 심은하를 꼽았다. 한석규와 심은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와 ‘텔 미 썸딩’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그는 심은하가 스크린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안타깝다고 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심은하 씨가 밝음과 어둠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표현력이 참 뛰어난 배우라는 인상을 받았죠. 기회가 되면 심은하 씨와 다시 연기하면 좋겠어요.”
지금의 한석규를 있게 한 존재 ‘가족’
한석규는 자타공인 연예계 낚시 마니아다. 그가 ‘힐링캠프’에서 단짝 낚시 파트너로 소개한 사람은 놀랍게도 어머니. 그는 “아버지와 형들도 있지만 어머니와 가는 낚시가 즐겁다”며 웃었다.
“저는 주로 캠핑하듯 낚시를 가요. 1998년쯤 소양강댐에서 배 타고 2시간 들어가야 나오는 무인도에 가서 어머니와 낚시를 한 적 있어요. 저는 텐트를 치고, 어머니는 밥을 짓고요. 남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좋았어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냐는 질문에 그는 “어머니와 낚시하러 가서 불장난했던 때”라고 어머니와의 추억을 꼽았다. 한밤중 물가에다 장작을 쌓은 뒤 불을 크게 피우고 이를 바라보면서 가졌던 추억 속 감정을 떠올리면 지금도 참 행복하다고 털어놨다. 함께 여행을 떠나고, 같은 취미를 즐길 만큼 한석규에게 어머니는 소중한 존재다. 4형제 중 막내여서만이 아니라 어머니와 있으면 유달리 마음이 편안하다고 설명했다.
한석규는 작품을 쉬는 동안 영화관에 들러 상영되는 영화를 꼭 챙겨 본다고 한다. 그가 영화 관람을 즐기게 된 것도, 또 배우가 된 것도 어머니 덕분이다. 한석규의 어머니는 여섯 살 때부터 그를 극장에 데려갔고, 아무것도 모르던 아들에게 영화를 보여줬다. 그는 가장 인상에 남는 영화로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와 함께 본 ‘혹성탈출’을 꼽았다. 모자 사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살갑다고 한다.
가장 한석규는 어떤 모습일까. 한석규는 1998년 10년간 연애한 임명주 씨와 결혼했다. 아내 임씨는 KBS 성우 출신으로, 두 사람은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현재 임씨와 네 아이는 미국에 있다. 류승완 감독이 “(한석규가) 기러기 아빠라 영화 촬영을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하기 위해 미국에 갔다”라고 촬영 후 그의 근황을 설명했듯이 그는 영화 촬영이 끝나면 꼭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아빠로서 아이들이 무엇이 되거나 어떻게 자랐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텐데 한석규는 아이 중 한 명은 배우가 됐으면 한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하)정우가 아버지(김용건)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당연히 배우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랐다고 하더라고요. 제 아이들 중에서도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할 것 같아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배우라는 직업은 인생을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이들은 그의 영화를 본 적 있을까? 한석규는 “아직 아이들이 볼 만한 영화를 찍지 못했다. 그나마 ‘파파로티’는 볼 수 있을 텐데 아마 좋아할 것 같다”며 아이들과 연기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한석규는 이제까지 20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골프에 비유한 그의 말을 빌리자면 1라운드 18번 홀을 돌고 이제 새로운 라운드를 시작한 셈이다. 배우로서 한석규의 꿈은 무엇일까.
“제 인생에 추억의 영화가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추억에 제 영화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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