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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곁에서 지켜본 나훈아

이상벽이 말하는 ‘나훈아와의 36년 우정’

글·김명희 기자 / 사진·현일수 기자, 동아일보 출판사진팀

2008. 03. 21

나훈아가 지난 1월 말 기자회견을 가진 후, 연예계 안팎에서는 ‘나훈아 신드롬’이 일고 있다. 72년 기자와 취재원으로 처음 나훈아와 인연을 맺은 뒤 지금까지 각별한 우정을 쌓아온 MC 이상벽을 만나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관해 들었다.

이상벽이 말하는 ‘나훈아와의 36년 우정’

나훈아는 지난 1월 말 자신을 둘러싼 소문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는 내내 때로는 웃고 때로는 눈물을 내비치고 또 때로는 바지 지퍼를 내리려는 과감한 체스처를 취하며 좌중을 휘어잡았다. 기자회견 이후 세간의 관심은 ‘나훈아 스캔들’에서 ‘나훈아의 카리스마’로 옮아갔다.
나훈아와 가장 가까운 지인 중 하나로 알려진 MC 이상벽(61)에게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관해 듣고 싶다고 하자 그는 “나훈아는 가수로 남고 싶어할 뿐, 개인사가 알려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에 조심스럽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경향신문’ 기자 출신인 이씨는 72년 나훈아가 공연 중 괴한에게 피습당한 사건을 취재하면서 그와 친분을 맺게 됐다고 한다. 당시 나훈아는 공연 중 무대로 뛰어올라온 괴한의 습격을 받아 왼쪽 뺨에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피습사건 이후 크고 작은 스캔들이 있을 때마다 취재를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기자와 취재원이라는 벽을 뛰어넘어 서로 속내를 털어놓는 사이가 됐죠. 다른 기자들은 기사를 쓸 때 다들‘남진, 나훈아’라고 썼지만 나는‘나훈아, 남진’이라고 썼어요(웃음). 함께 목욕탕에도 가고, 2000년 내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그 친구가 하룻밤 꼬박 함께 있어주기도 했어요. 또 그 친구가 공연을 할 때는 내가 진행을 봐주기도 했죠. 30주년, 35주년, 40주년 기념공연 모두 제가 사회를 봤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상벽에 따르면 나훈아는 자기관리에 무척 철저하다고 한다.‘스타는 하늘의 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음악적인 부분 외에는 자신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80년대 이후로는 매체와의 접촉을 점점 줄여왔다는 것. 또한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30%쯤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야 나머지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슈퍼스타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위치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과 여유가 있다고 한다.
자부심이 강한 만큼 공연에 있어서는 완벽을 추구했다고 한다. 그는 평소 “팬들 앞에서 당당하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한 공연을 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는 순간, 은퇴 선언도 할 것 없이 조용히 노래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 같은 노래는 수만 번도 더 불렀을 텐데 공연 시작 전 항상 악단과 정식으로 리허설을 해요.‘눈 감고도 부를 텐데 그렇게 할 필요까지 있냐’고 물었더니‘악단 멤버 중에는 나와 호흡을 맞춰보지 못한 친구가 분명히 한 명은 있을 텐데 그 친구를 위해서 끝까지 부른다’고 하더군요.”
이씨에 따르면 나훈아는 외부로는 철저히 신비주의 전략을 취하면서도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과는 평생 의리를 지키는 ‘남자 중에 남자’라고 한다. 몇 년 전 그와 함께 일하던 공연 스태프 중 한 명이 갑자기 사망했는데 이 일로 상심이 컸던 나훈아는 그의 부인에게 “재혼하지 않는 한, 죽은 친구의 월급을 평생 주겠다”고 약속하고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형편이 어려운 가요계 선후배를 꾸준히 도와온 것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라고.

사생활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지만 미국 명문대에서 박사과정 밟고 있는 아들 무척 자랑스러워해
이상벽이 말하는 ‘나훈아와의 36년 우정’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지난해 첫 개인전을 열기도 했던 이상벽. 그는 사진을 찍고 나훈아는 그림을 그렸던 덕분에 두 사람은 ‘코드’가 잘 맞았다고 한다.


“한번은 그 친구와 와인을 마시는데 대여섯 시간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내심 바쁜 친구를 내가 잡아둔 게 아닌가 걱정돼 ‘바쁘지 않으냐,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좋은 사람과 마주 앉아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르고 재미없는 사람과 있으면 바빠진다’고 하더군요. 사람을 가리기는 하지만 일단 마음을 열면 한없이 따뜻한 친구예요. 그 친구와 인연을 맺은 사람은 끝까지 가죠.”
나훈아는 지난 1월 기자회견을 하면서 “대한민국 공공장소에 3분 이상 서 있어서 제가 거기에 온 것이 소문이 안 난다면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말했다.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만큼 생활하는 데 많은 불편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이씨에 따르면 나훈아는 기타를 치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그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고 한다. 특히 나훈아의 그림 솜씨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이씨가 보기에도 수준급이었다고.
“집에 갔더니 한번은 그림을 봐달라고 하더라고요. 정물화 풍경화 추상화 등 장르가 다양했고 그 가운데는 자화상도 있더군요. 그림 실력이 상당해서 ‘나는 사진을 찍고 너는 그림을 그려서 전시회를 열자’고 했더니 ‘너는 미대 나온 프로고 나는 아마추어 아이가, 안 한다’라며 고사하더라고요(웃음). 국전에 출품하라고도 해봤지만 그것도 내켜하지 않았고요. 그 친구에게 그림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중 속의 두려움, 적적함을 달래는 수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씨가 나훈아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06년 연말 디너쇼에서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분장실에서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그날 웃통을 벗고 공연 준비를 하고 있는데 몸이 굉장히 좋더라고요.‘팬서비스 차원에서라도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하더군요(웃음). 그리고 아이들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했어요. 당시 부인과 딸은 하와이에서 살고 있고 아들은 미국에서 첫손에 꼽히는 명문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거든요. 그동안 외국을 자주 드나들었던 것도 아이들을 보기 위해서였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동안 곁에서 나훈아를 지켜봐왔던 이상벽은 그를 둘러싼 최근의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궁금했던 것은 소문의 진위보다 ‘나훈아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 상황을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고.
“이 친구는 자기 사람을 거느리고 다스리는 능력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사업가적 기질도 있고 위기대처 능력도 뛰어나죠. 상황을 간파한 뒤 힘으로 해결할 건 힘으로 해결하고, 기술로 해결할 건 기술로 해결하고…. 이번 기자회견은 남자답게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가장 나훈아다운 방법이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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