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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 내 어머니|하늘로 띄우는 편지

소프라노 신영옥이 전하는 절절한 그리움

“딸 교육에 매달린 열성 엄마, 제 무대를 지켜보고 계신 것을 믿어요”

■ 기획·최호열 기자 ■ 구술정리·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5. 05. 10

세계적인 소프라노 신영옥(44). 그의 성공 뒤에는 딸의 재능을 소중히 여기며 키워준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과 정성이 있었다. 그가 93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딸의 공연을 걱정했던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전했다.

소프라노 신영옥이 전하는 절절한 그리움

“엄마 잘 있지?” 하늘만 보면 이렇게 중얼거리는 습관이 생겼어요. 엄마, 정말 거기 하늘에서는 아프지 않고 편안한 거죠? 엄마가 늘 걱정하던 막내딸 영옥이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항상 달고 사는 알레르기 비염 말고는 다 괜찮아요.
참, 요즘 들어 부쩍 나잇살이 붙는 것 같아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일주일에 4∼5일은 댄스클럽에 가서 재즈댄스도 추고 힙합도 추는데, 땀을 흠뻑 흘리며 신나게 추고 나면 기분이 한결 좋아져요.
저는 요즘 오페라 공연을 앞두고 한창 연습 중이에요. 5∼6월 미국에서 열리는 스폴레토 페스티벌 준비도 같이 하고 있어 정신이 없어요. 스폴레토 페스티벌은 88년 제 데뷔 무대라 신경이 많이 쓰여 어제는 줄리어드 음대 선생님한테 레슨도 받았어요.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다 문득 예전 생각이 났어요.
엄마는 네 살밖에 안된 저를 KBS 어린이합창단에 들여보내기 위해 직접 풍금을 연주하면서 노래 연습을 시키셨죠. 아무것도 모르는 저는 그냥 엄마하고 같이 노래 부르는 게 즐거워 열심히 했고요. 엄마는 그렇게 제 첫 음악 선생님이셨어요.
엄마 손에 이끌려 남산에 있는 KBS 방송국으로 어린이합창단 오디션을 보러 갔던 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엄마가 노래 잘 부르면 초콜릿을 사주겠다고 해서, 다른 것은 생각 안 하고 오로지 초콜릿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따라갔었죠. ‘옹달샘’을 불러 합격이 됐는데, 전 그때 최연소 합창단원이 된 것보다도 초콜릿 먹는 게 더 좋기만 했어요.
어렸을 때 엄마는 참 무서웠어요. ‘호랑이 엄마’였죠. 말도 못하게 엄해서 엄마한테 맞기도 참 많이 맞았잖아요. 집에 늦게 들어왔다고 맞고, 남학생을 차에 태워줬다고 맞고…. 매 안 맞겠다고 제가 이리저리 쪼르르 도망 다니니까 언니들이 제 별명을 쥐라고 붙여준 거 엄마 생각나요? 그땐 겁도 나고 또 혼내는 엄마가 밉기도 했는데….
엄마가 특히 더 밉고 싫었던 게 언제인 줄 알아요? 바로 미국에 처음 왔을 때였어요. 그땐 정말 호기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엄마는 제게 노래만 강요했잖아요. 어려서부터 노래뿐만 아니라 무용도 좋아했던데다가, 뉴욕에서 브로드웨이 공연을 보면서 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커진 제가 뮤지컬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엄마는 너무나 강하게 반대했죠. 뮤지컬에 대한 제 꿈보다 노래에 대한 엄마의 바람이 더 컸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어요. 엄마가 고등학교 때까지 성악가를 꿈꾸다가 변성이 잘못되는 바람에 그 꿈을 포기해야 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죠.
소프라노 신영옥이 전하는 절절한 그리움

엄마는 또 부모니까 자식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미국에 오면 늘 제 곁에서 떠나질 않았죠. 제가 잠을 잘 때나 밥을 먹을 때조차도 엄마는 늘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게 저는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간섭받는 것 같아 답답하고 싫었어요.
미국에서 제 매니저 한다고 새벽에 일어나 영어 테이프를 들으며 외우던 엄마의 열성이 그땐 왜 그리도 싫었는지 모르겠어요. 저에 대한 엄마의 기대가 너무나 커 부담이 됐고, 그 부담이 커져 반항심으로 변했었나 봐요.
공연 때문에 엄마 마지막 가는 길 못 본 게 끝내 한으로 남아
청개구리는 엄마가 죽고 나서야 뒤늦게 철들고 후회를 했다더니, 저도 청개구리처럼 엄마가 돌아가시니까 그제야 철이 들었어요. 왜 진작 철이 들어 괜찮은 딸이 되지 못했는지 후회가 참 많이 돼요.

소프라노 신영옥이 전하는 절절한 그리움

세계적인 성악가들과 함께 무대에 서며 ‘천상의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신영옥은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로 손꼽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엄마가 돌아가시기 1년 전쯤 유난히 엄마가 그리웠어요. 왜 그랬는지는 저도 몰라요. 어느 날 밤, 자다 일어나 갑자기 베개를 들고 엄마와 아버지가 자는 방으로 갔던 거 기억나요?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 누워 저를 두고 엄마는 “나잇값도 못하고 이게 뭐냐”고 하면서도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지요. “옆에 있어도 그립다”는 어느 싯구처럼 그땐 늘 엄마가 그리웠어요. 잠을 잘 때조차도.
93년 엄마는 간암 판정을 받았는데, 그게 사망 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 없었죠. 그때 그 사실을 몇 개월 동안 저만 모르고 있었어요. 엄마가 가족들에게 저 신경 쓴다고 알리지 말라고 했죠. 그러지 말지 그랬어요. 형부가 팩스를 보내줘서 알았는데, 그거 받고 3일 동안 너무 울어 목소리가 안 나왔어요.
곧바로 서울로 날아와 병실에 있는 엄마를 본 순간 고개를 돌리고 말았죠.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때 엄마의 발을 봤어요. 발바닥이 많이 터져 있었지요. 마사지 크림을 발라주면서 느꼈던 엄마 발의 감촉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엄마 그때 참 많이 힘들었죠?
그래도 아픈 내색 한번 안 하던 강한 엄마였는데, 제가 “엄마 살아야지. 그래서 나 결혼하는 것도 봐야지” 그랬더니, “난 이제 아무것도 못 한다” 그러셨지요. 그때 얼마나 섭섭하고 마음이 아팠는지 엄만 모를 거예요. 항상 강한 모습만 보여주던 엄마가 포기를 한다는 거, 저한텐 너무나 큰 충격이었어요.
엄마 곁에 있고 싶은데 공연 날짜는 다가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저에게 엄마가 화를 내셨죠. “내가 어떻게 너를 그 자리에 있게 했는데, 네가 나를 정말 위한다면 가서 공연을 해라” 하던 엄마의 말이 아직도 들리는 듯해요. 엄마는 “여기 사람이 몇 명인데, 내가 당장 어떻게 되느냐”며 저를 떠밀었어요.
독일로 가서 공연을 하고 미국으로 갔을 때 둘째 형부의 고모님한테 전화가 왔어요. “자넨 왜 여기 있나? 어머님 돌아가셔서 언니와 형부는 한국에 갔는데.” 그 순간 제 주위의 모든 것이 다 멈춰버리는 것 같았어요.
제가 엄마한테 갈 때까지만이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좋았을 것을. 마지막 가는 길을 보지 못한 것이 끝내 한이 되고 죄스러움이 됐어요.
엄마, 하늘에서 혹시 봤나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얼마 있다가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일본에서 공연을 했잖아요. 파바로티와의 공연 스케줄이 잡히던 날 엄마는 막내딸이 세계적인 성악가와 공연을 하게 됐다며 너무도 기뻐하셨죠. 그러면서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꼭 보러 가겠다고 했는데….
엄마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공연을 아버지 혼자 보셨어요. 공연이 끝나고 나서 아버지가 저를 보자마자 우시는 거예요. 엄마가 많이 보고 싶어 했는데 당신만 보셨다면서요. 하지만 전 믿어요. 하늘에서 엄마도 틀림없이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을.
결혼은 나중에, 지금은 엄마 생각해서 더 열심히 노래 부를게요
비록 엄마는 떠나갔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계셔서 전 견딜 수 있어요. 칠순을 넘긴 아버지가 이미 불혹을 넘긴 딸을 아직도 “이쁜아”라고 부른다고 하면 사람들이 다 웃어요. 그래도 전 좋기만 한걸요. 아버지는 지금도 식사할 때면 생선뼈를 다 발라서 제 밥 위에 얹어줘요. 그러니까 자꾸 아버지만 보면 어리광을 부리게 되나 봐요.
요즘도 미국에서 매일같이 눈만 뜨면 바로 아버지한테 국제 전화를 하는데, 그러면 아버지는 늘 “강아지는 침대에 두지 마라. 아침은 꼭 챙겨 먹어라. 저녁엔 일찍 들어와라. 나가면 항상 차 조심하고, 남자 조심해라. 남자는 다 늑대다”라는 똑같은 말씀을 하세요. 아버지가 이렇게 저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한 저는 언제까지나 귀여운 막내딸 노릇을 할래요.

소프라노 신영옥이 전하는 절절한 그리움

얼마 전 아버지한테 “나는 오래 살 테니까 아버지도 나랑 같이 오래 사셔야 한다”며 “나한테 맞춰서 아버지는 1백20세까지 사셔야 한다”고 했어요. 물론, 날마다 두 번씩 꼭 운동을 하러 가시며 아버지 스스로도 철저하게 건강관리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엄마가 거기서 아버지를 보살펴주셔야 해요. 저도 해외 공연 일정이 아무리 빠듯하더라도 아버지를 보기 위해 1년에 두 번 정도는 국내 무대에 꼭 서려고 해요.
여기저기 공연 있는 곳마다 돌아다니다 보니, 가방 하나 들고 오가는 제 신세가 좀 처량하게 생각될 때도 있어요. 가끔은 정착하고 싶은 마음도 들고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제가 유학을 안 하고 언니들이 시집도 안 간 시절에 우리 가족이 모두 한집에 살았을 때가 자꾸 생각나고 그리워요. 지금 생각하면, 가족들과 함께 마당에서 숯불로 갈비도 구워 먹고 하던 그때가 바로 파라다이스에서의 삶이었어요.
아버지한테 여기저기 아프다고 어리광을 부리면, 아버지는 늘 “다 관두라우!” 그래요. “그동안 많이 했는데 뭘 그리 돌아다니냐”며 이젠 건강하게 당신 옆에 있으라는 거예요. 제 동반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시기도 하고요. 하지만 전 아직 결혼 생각이 없어요. 결혼 안 한 친구들이 많아서 그런가봐요.
무엇보다 저한테는 노래가 있으니까요. 60이 넘어서도 노래하는 분들도 있잖아요. 그분들 보면 자극받아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요. 엄마도 제가 여기서 그만두고 정착하는 걸 원하지는 않죠?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게요.
엄마에게 제 앨범 ‘my songs’에 실려 있는 ‘Mother of mine’이란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요. 노랫말 중에 “Without your love, where would I be?” 라는 소절이 있는데, 정말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엄마가 아니었으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어요. 너무나 그립고 보고픈 엄마, 고맙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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