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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생생 체험기

두 아들과 1년5개월 동안 미국 생활하고 돌아온 주부 김희경의 ‘좌충우돌 조기유학 체험기’

“가장 큰 소득은 ‘미국은 천국’이라는 환상을 깬 것, 치밀한 준비 없이는 막대한 비용 들이고 상처만 줄뿐이에요”

■ 글·구미화 기자 ■ 사진·정경택 기자

2004. 04. 09

나라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영어가 글로벌 시대의 필수요소가 된 이상 조기유학 열풍은 쉬 수그러들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지난 2001년,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와 함께 미국행을 택했던 김희경씨는 조기유학 열풍에 한숨을 짓는다. 아이들 영어교육을 위해 직장마저 포기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년5개월만에 돌아온 김희경씨가 미국 조기유학에 대한 오해와 실체를 상세히 이야기했다.

두 아들과 1년5개월 동안 미국 생활하고 돌아온 주부 김희경의 ‘좌충우돌 조기유학 체험기’

“미국 아이들은 수학을 무지하게 못하니까 너희가 가면 날릴 거야. 그리고 미국 학교는 토요일에 논다. 숙제도 없고!”
지난 2000년 광고 마케팅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던 김희경씨(42)는 당시 초등학교 4학년과 1학년에 재학중인 두 아들에게 조기유학 이야기를 꺼내며 이렇게 말했다. 큰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웬만큼 영어실력을 갖추게 하고 싶었던 터라 한국에서 드는 사교육비에 조금 더 보태면 미국 조기유학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으로 아이들을 설득하기 시작한 것. 여섯살 때부터 영어학원에 보낸 큰아이의 영어실력이 수년째 제자리걸음인데다, 아이들을 여러 학원에 돌리는 것도 못마땅하던 차였다.
미국 학교엔 숙제가 없다는 말이 아이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덕분에 9·11 테러 직전인 지난 2001년 8월30일 그는 두 아들과 함께 미국 뉴저지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일을 포기했고, 사업을 하는 남편은 졸지에 ‘기러기 아빠’가 됐다.
등교 첫날 미국 아이들과 조잘대는 아이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던 그는 일주일쯤 지나면서부터 사태가 급변했다고 말한다. 미국 아이들과 한두 마디 주고받는 것과 미국 교과서로 수업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던 것. 사회 과학 등 교과서에 쓰여진 단어들은 아이에게 전혀 생소한 것들이었다. 한국 아이들이 강세를 보인다는 수학마저 영어로 된 서술형 문제들이 많아 쉬운 계산을 이끌어내기까지 문제를 해석하느라 끙끙대야 했다. 더욱이 미국 학교엔 숙제가 없다고 한 엄마의 말은 순전히 아이들을 꾀기 위한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미국 학교에 전학시키고 난 후 당연히 숙제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아이에게 숙제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알림장(Planner)을 펼치는데 그날 배운 모든 과목에 숙제가 있더라고요. 그날부터 그야말로 숙제와의 전쟁이 시작됐죠. 아이를 미국 땅에 던져놓기만 하면 모든 게 저절로 될 거라 생각했던 환상이 일주일만에 산산조각 난 거예요.”
미국은 지역마다 교육제도가 천차만별이라 정말 숙제가 없는 지역도 있겠지만 김씨의 아이가 다닌 학교는 숙제도 많고 까다롭게 관리하는 학교에 속했다. 과목당 숙제를 세번 안 해 가면 낙제를 받기 때문에 매일같이 아이를 책상 앞에 붙들어놓고 씨름을 해야 했다. 미국 아이가 1시간만에 끝낼 분량도 영어가 서툰 한국 아이에겐 4∼5시간이 족히 걸렸다. ‘초등학교 때는 놀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국에 있을 때는 공부를 시켜본 적이 없었는데 미국에 도착해 처음 1년 동안은 금요일과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세 식구가 밤 12시 이전에 잠자리에 든 날이 거의 없다고 한다.

세 식구가 숙제하느라 밤 12시 이전에 잠자리에 든 날 거의 없어
“책 10장 분량의 이야기를 읽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 독해(Reading) 숙제가 있는 날이면 앞이 캄캄했어요. 한 페이지에 모르는 단어만 수십개인데 내용을 전부 이해하고, 등장인물과 주제에 대해 요약까지 해야했으니 아이 혼자서는 밤을 새워도 불가능한 일이죠. 독해 숙제를 할 때 아이 옆에 앉아 책을 읽어주다 보면 아이는 몸을 뒤틀고,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어요. 아이가 힘들어 징징 울기라도 하는 날이면 저도 속이 상하고 화가 치밀었어요. 미국 사람들은 아이 때리는 걸 보면 신고한다고 해서 커튼을 치고 아이를 야단칠 때면 정말 못할 짓이다 싶었죠.”

미국에 가면 사교육비 부담에서 벗어날 거라 생각했던 것도 착각으로 드러났다. 미국 공립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대부분은 공부나 입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온 아이들은 예외였다. 좋은 성적으로 우수한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한국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받는 것. 김씨가 살던 뉴저지에도 한국학원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온 아이들은 영어 수학 과외는 물론 학습지에 음악 야구 농구 과외까지 받는다고.

두 아들과 1년5개월 동안 미국 생활하고 돌아온 주부 김희경의 ‘좌충우돌 조기유학 체험기’

귀국을 앞두고 반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는 작은아이(왼쪽). 나이애가라 폭포에서 두아들과 함께. 아이들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좋아했다.


김씨의 아이들도 과외를 받았는데 처음에는 숙제를 도와주기 위해 한국말과 영어에 능통한 교민이 필요했고, 나중에는 아이들 회화와 문법, 작문을 지도해줄 미국인 가정교사까지 있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4학년부터 참여하는 밴드 활동에서 큰아이가 난생 처음 플루트를 잡게 됐을 때는 따로 악기 레슨을 받았고, 스포츠 활동 시간에 날아오는 공 하나 제대로 받지 못해 친구들의 눈총을 받고 돌아온 아이를 위해 야구 클리닉도 알아봐야 했다. 결국 계산해보니 한 달에 1백50만원 가량의 과외비가 들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들었던 학원비에 조금만 더 보태면 될 거라 예상했던 미국에서의 생활비는 한국에서보다 2∼3배가 더 들었어요. 말 그대로 길에다 돈을 뿌리며 산 거죠.”
지역에 따라 물가가 다르지만 동북부 지역에서 지낸 김씨의 경우만 보면 두 아이를 공립학교에 보내고, 세 식구가 두 개의 침실이 있는 허름한 주택을 빌려 살았는데도 집세와 사교육비, 공과금, 식비와 기타 잡비를 모두 포함해 월평균 8백만∼9백만원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앞서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자동차와 살림살이를 마련하고, 최소 석달 반치의 집세를 미리 준비해야 했다.
미국행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김씨는 미국의 좋은 자연환경을 마음껏 경험하기 위해 주말이면 아이들과 여행을 즐기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줄곧 직장생활을 한 탓에 늘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그는 미국에서만이라도 아이들과 다양한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숙제와 시험 준비에 지쳐 세 식구가 주말이면 아무것도 못하고 집에 있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김씨는 “젊어서 미국 유학 다녀온 사람들이야 미국 생활이 좋다고 하겠지만 마흔살 넘은 아줌마가 아이들 데리고 미국 생활을 한다는 건 너무 힘들었다”고 말한다.
한국에 홀로 남은 남편의 기러기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김씨의 남편은 개인 사업을 하는 덕분에 한두달에 한번씩은 미국에 건너올 수 있었지만 직장에 다니는 대부분의 기러기 아빠들은 1년에 한번 가족들을 보기도 힘들다고.
“처음에야 ‘잠시 떨어지는 건데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남편은 혼자 외롭게 살면서 생활비 대느라 힘들고, 아내는 낯선 땅에서 아이들 돌보며 서럽게 사는 일이 쉽지 않아요. 그래서 오랜만에 만나면 묵은 회포를 풀기도 전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느냐’며 상대에게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자칫 부부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해요. 처음엔 ‘1∼2년 떨어져 있다가 오겠지’하는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3년이 지나면 한국학교에 적응할 게 두려워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가족이 해체될 위험이 큰 거죠.”
그런 점에서 김씨는 성공적인 조기유학을 위해서는 반드시 아이와 부모가 동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행을 결정할 때부터 이미 중고등학교는 한국에서 보내겠다고 생각했던 김씨는 큰아이의 중학교 입학시기를 맞춰 1년5개월만인 2003년 1월에 미국생활을 정리했다. 그가 아이들과 함께 귀국했을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가 “미국 갔다 온 거 정말 효과 있어?”였다고 한다.
“잠을 줄여가며 피나는 노력을 한 덕분인지 두 아이 모두 완벽하지는 않아도 영어로 된 책을 부담 없이 읽고, 미국 영화를 자막 없이도 대충 이해하는 정도가 됐어요. 이렇게 말하면 많은 분들이 ‘이제 아이들 영어 성적 때문에 걱정하는 일은 없겠다’며 부러운 눈길을 보내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두 아들과 1년5개월 동안 미국 생활하고 돌아온 주부 김희경의 ‘좌충우돌 조기유학 체험기’

김씨는 조기유학을 가려면 대단한 각오와 꼼꼼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씨의 두 아이는 미국에서 돌아온 뒤로 미국에서 익힌 영어를 잊지 않도록 원어민 교사가 가르치는 어학원에 다니고, 학교 시험에 대비해 한국인 선생님으로부터 영문법 수업을 따로 받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사용하던 영어와 한국의 영어수업시간에 강조하는 내용은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1년반 사이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이 크게 떨어져 어려운 단어나 복잡한 문장을 도리어 영어 단어로 바꿔 설명해야 했다고. 심지어 도덕 과목 시험에 대비해 과외를 해야 했을 정도라고 한다. 김씨는 “미국에 도착해서 1년,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1년은 정말 죽도 밥도 안됐다”며 조기유학의 효용성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김씨는 아이들 영어 실력 때문에 고민하는 엄마들에게 조기유학보다 만화영화를 활용할 것을 권한다. 한 작품을 완벽하게 암기할 정도로 여러 번 반복해서 보면 아이가 영어 문장의 구조를 자연스럽게 익히기 때문에 그렇게 두세편을 떼고 난 뒤에 영어 단어를 보충하면 영어 실력이 향상된다는 것. 작은아이를 통해 효과를 확인한 방법이라고 한다.
“큰아이 숙제에 매달리는 동안 2학년에 편입한 작은아이는 놀아줄 사람이 없으니까 매일 TV 앞에서 5시간 이상을 보냈어요. 미국 만화 케이블에서 같은 만화를 자주 반복해 본 덕분에 아이는 TV 만화를 보면서 영어 문장을 통째로 흡수해버리더라고요.”
큰아이를 통해 영어 학원이 별 효과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작은아이의 경우 미국으로 떠나기 전 석달 정도 영어 학원에 보낸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미국 학교에 들어가서도 선생님과 아이들이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혼자서 딴 짓을 하거나 졸기 일쑤였다. 그런데 미국 생활 7개월을 넘어설 무렵부터 선생님이나 아이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감으로 알아듣기 시작하더니 여름방학동안 캠프를 다녀온 뒤로 영어를 유창하게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큰아이보다 발음이나 억양면에서 더 완벽한 영어를 구사한다고. 4주 동안 캠프에서 미국 아이들과 생활하며 영어로 생각하고 듣고 말했던 것이 영어 실력 향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긴 했지만 김씨는 그 밑바탕에는 TV 만화가 있었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미국생활 1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영어실력도 유창해지고, 미국 환경에 적응하면서 신나게 지냈다. 그러나 지난해 1월에 한국에 돌아가자고 했을 때 아이들은 달력에 ‘아싸 조아조아조아 이히 한국으로 가자!’ 라고 써놓고 집에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국에 돌아와 여러 곳의 학원에 다니고 있지만 아이들은 다시 미국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해요.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사먹을 수 있는 한국이 좋대요. 아이들이 ‘미국이 천국’이라는 환상을 깨고, 고국인 한국의 장점을 많이 발견했다는 점이 1년5개월간의 조기유학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지요.”
‘미국에 보내놓기만 하면 영어가 술술 나온다’는 미국 조기유학에 대한 학부모들의 그릇된 환상을 확실히 깨야 한다는 생각에 김씨는 귀국한 뒤 틈틈이 자신의 경험을 글로 정리했다. 최근 완성된 ‘죽도 밥도 안된 조기유학’이라는 책은 제목만 봐서는 조기교육 실패담 같지만 조기유학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확실하게 준비해야 할 것들을 꼼꼼하게 일러주는 일종의 조기유학 보고서다.
김씨는 조기유학을 고려하는 부모들에게 아무쪼록 가정형편, 아이의 능력과 의지, 그리고 아이의 미래까지 모두 고려한 뒤에 조기유학을 결정할 것을 당부했다. 막대한 비용과 고생이 뒤따르고 자칫 가정이 해체될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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