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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작가의 근황

수필집 펴낸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의 알려지지 않았던 모습

■ 글·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사진·김성남 기자

2003. 02. 07

“손자 자랑에 날새는 줄 모르는 할아버지, ‘아내는 내 하늘’이라는 팔불출 남편…” 지난해 대하소설 <한강>을 완간함으로써 우리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작가 조정래. 2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소설 집필하느라 이제껏 수필집 한권 엮어내지 못했던 그가 <누구나 홀로 선 나무>를 펴냈다. 수필집 발간을 핑계삼아 만난 ‘소설 밖의 작가’는 소설만큼이나 올곧은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정작 인상적이었던 건 손자가 예뻐 어쩔 줄 모르는 할아버지의 면모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작가 조정래의 고백.

수필집 펴낸 의 작가 조정래의 알려지지 않았던 모습

손자 재면이와 함께. 왼쪽부터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의 원고들.


지난해 우리 문학계에는 후대에 길이 남을 ‘사건’이 있었다. 소설가 조정래씨(61)가 대하소설 <한강>을 전 10권으로 완간한 것. 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이미 눈치챘겠지만, <한강>의 완간은 대하소설 한편의 출간이라는 단순한 의미 그 이상을 지닌다. 이는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잇는 ‘20세기 한국 근현대사 3부작’의 완성이자, 20년을 한결같은 행보로 소설에 매달려온 한 작가의 고집이 얼마나 가치있는가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단행본 32권, 원고지 5만여장에 달하는 장구한 여정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은 조씨는 그 심정을 ‘20년 글감옥에서 출옥’이라 밝힌 바 있다. 일체의 약속도 미루고 오로지 책상 앞에만 앉아있었으니, 자청한 일이었지만 ‘감옥’이 따로 없었던 셈이다. 때문에 건강도 많이 해쳤다. 그는 지난해 <한강>을 마치자마자 큰 수술을 받았다. 너무 오래 앉아있는 바람에 탈장이 일어난 걸 바로잡는 수술이었다. ‘수술하면 두달은 글을 쓸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7개월여 끔찍한 고통을 그대로 앓아내며 소설부터 끝냈던 조씨다.
그러나 1년 후 서초동의 한 전통찻집에서 만난 조씨는 퍽 정정해 보였다. ‘출옥’ 이후 휴식이 얼마나 달았던가 상상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십니까.
탈장수술이 잘 끝나서 이제는 괜찮습니다. 하루종일 앉아있기만 하다 보니, 장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 탈장이 됐다고 하더군요. 사실 이게 처음은 아니지요. 기침병, 위궤양, 몸살…. 게다가 늘 앉아있기만 하니 둔부에 종기도 났고요. <아리랑>을 쓸 때가 가장 힘들었는데 오른팔은 물론 등까지 마비가 왔어요. 그야말로 등이 짝짝 갈라지는 고통이어서, 가래를 늘 들고 다녔는데, 글감옥에서 나와서 그런지 이제는 괜찮습니다. 맨손체조를 하루에 세번씩 하는 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많이 좋아졌습니다.
-맨손체조라고 하셨는데, 전문가에게 특별히 익히신 겁니까.
전문가는요… 예전에 국민(보건)체조라고 하던 그겁니다(웃음). 전 일제가 만든 ‘국민’이라는 말이 싫어서 ‘맨손체조’라고 불러요. 그 기본 동작에, 제가 고안한 대여섯 가지 동작을 섞어서 운동을 합니다. 말하자면 ‘신 맨손체조’라고 할 수 있겠죠. 특히 노 젓기 동작 같은 건 전신에 좋아요. 매일 거르지 않고 합니다. 아내(<사랑굿>의 김초혜 시인)에게도 권하는데, 아내는 시인이라 그런지, 산문적 끈기가 부족해서 오래 하질 못해요(그외에도 그는 아침 저녁으로 2시간 정도씩 산책을 하고 일요일엔 등산을 간다. 아침마다 생식과 김을 먹고 커피 대신 녹차를 즐긴다.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건강을 지키는 일은 작가로서 오래 남고 싶다는 결기의 표현이라는 그의 말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번 산문집에 실린 손자(재면)에 대한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제 아내가 그 녀석이라면 깜빡 죽습니다. 손자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게 참 신기한 겁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재면이만 보면 절로 웃음이 나와요. 늘그막에 얻은 손자라는 존재는 가장 큰 기쁨이죠. 그런데 요 녀석이 애정 순위도에서 절 제일 뒷전으로 미뤄놨어요. ‘이거 하지 마라’ ‘이건 만지면 안되지’ 자꾸 제약하니까 ‘아비(할아비의 준말) 미워’ 이러면서 제 할머니 품에만 안깁니다.
말하는 중간에도 조씨의 얼굴에는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손자 자랑이 끊일 새 없는 그는 위대한 작가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할아버지만 같았다. 그가 쓴 ‘내 사랑 재면이’에는 손자와의 각별한 인연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손자 재면이는 이세상에 와도 참 공교롭고도 신기하게 왔다. 재면이는 2000년 9월29일 오전 열시 이십구분에 태어났다. 그날은 소설 <아리랑>의 발원무대인 김제시에서 ‘아리랑문학비’ 제막을 하는 날이었다. 나는 김제를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그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수필집 펴낸 의 작가 조정래의 알려지지 않았던 모습

만으로 마흔에 <태백산맥>을 쓰기 시작해 <아리랑>과 <한강>을 끝내고 나니 환갑이 되었다는 조정래씨.


-아드님이 대학에 입학하자 <태백산맥> 전 10권을 원고지에 베끼라고 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결혼 후에는 며느리까지 <태백산맥> 원고를 베끼고 있다고 알려졌는데요.
며느리가 벌써 7권째 들어갔습니다. 한자 한자 또박또박 정서해서 옮기는 일이기에 보통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깐깐한 시아버지가 한권 끝낼 때마다 검사를 하니, 속으로 죽겠다 싶을 건데도 내색 하나 안해요. 남들은 별나다고 할 텐데 나는 작가의 아들, 며느리로써 최소한 아비가 어느 정도 고생을 겪어냈는지 체득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한 겁니다.
재밌는 건 <한강>의 ‘작가의 말’에 이 일화를 고백해놨더니, 독자들 중 다섯분이 ‘나도 <태백산맥>을 베껴쓰는 일을 하겠다’고 나선 거예요. 그중 한분은 벌써 8백매 분량까지 썼다고 합니다.
내년 3월에 벽제에 ‘아리랑문학관’을 개관할 예정인데, 이미 제 원고는 거기로 보냈고 며느리의 원고가 끝나는 대로 아들 것까지 모두 거둬서 그곳에 둘 생각입니다. 원고지 기둥 3개가 나란히 놓여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정말 사상 유례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혹시 손자에게도 쓰라고 할 생각이십니까.
사실 전 그럴 생각이 있는데…. 아내는 그 말만 꺼내면 질색을 해요. 애들 고생시킨 걸로 모자라 손자까지 그러느냐고 혼을 냅니다. 그런데 소설은 사후 50년까지 저작권이 유지되거든요. 그러면 재면이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 아빠도 썼고, 엄마도 썼는데 그러면 저 스스로 “쓰겠어요” 하지 않을까요? 다는 무리더라도 세편 중 한편 정도는 쓰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가 있습니다(웃음).
-43년생이시니까 올해가 환갑입니다. 아무래도 소회가 남다르실 텐데요.
마흔에 시작해 소설 3부작을 끝내니 예순이 됐네요. 그런데 환갑이라고 해도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환갑연이라는 게 예전에 성인 남자 평균수명이 40세가 미처 못될 때나 의미가 있던 것이지, 평균수명이 76세로 올라간 지금에서야 부질없는 거 아닙니까. 전 환갑연도 생략할 생각입니다. 가끔 대학교수들 중에 보면 ‘환갑기념 논문집’ 출간이다 뭐다 부산스럽던데, 별로 좋아보이지 않아요. 환갑이니 하는 게 봉건적 유습 아닌가요? 이른바 깨어있는 사람들부터 떠들썩한 환갑연은 하지 말자고 나서줬으면 좋겠어요.
별나다고 할 거 같은데, 아들 결혼식 때도 그랬습니다. “그동안 뿌린 부조금 거두고 싶으신 마음도 이해하지만, 제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시면 도와주십시오”라고 사돈의 양해를 구하고 하객수를 신랑 신부측 각 50명으로 제한했죠. 좌석에 이름을 다 써 붙여놓는 바람에 이름표가 없는 하객들은 별수없이 돌아가야 했죠. 그런데 지인들 반응이 재밌어요. 처음엔 “서운하다” 운운하더니 한참 뜸을 들인 후에는 “참 잘했다” 그러더군요.
-출판사에서 책을 부쳐올 때 쓰는 두꺼운 노란 종이는 버리지 않고 반드시 재활용해서 쓰고, 책을 묶은 노끈 하나 버리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앞서 말한 허례를 줄이자는 것이나 환경을 생각하는 자세나 매양 한가지 같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처럼 짐승을 욕되게 하는 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짐승의 위를 해부해보십시오. 70% 정도만 음식물로 차 있어요. 짐승은 제가 먹을 만큼만 사냥하고, 결코 쓸데없이 다른 동물을 죽이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만이 제 덩치의 몇배를 소비하고 배출해냅니다. 그게 다 쓰레기고, 환경오염이죠.
이쯤에서 얘기는 소설로 넘어갔다. <태백산맥>은 해방공간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을 아우른다. <아리랑>은 일제강점시대를, 그리고 마지막 <한강>은 1950년대말부터 광주항쟁 초입까지 이른바 개발독재시대를 다루었다. 이제껏 그의 책들은 팔린 부수만 9백만부가 넘는다. 따라서 작가로서 ‘갑부’축에 든다. 십 사오년 동안 세금만도 억대에 가깝게 물었다는 그다. 그러나 대가 역시 톡톡히 치렀다. 잃은 건강도 그렇지만 오랫동안 ‘친북주의자’로 낙인찍혀 당한 괴로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국가보안법 위반 항목으로 기소된 <태백산맥> 소송이 대표적인 예. 94년 우익단체들은 <태백산맥>에 대해 5백여개 고발사항을 담은 고발장을 검찰에 접수했고, 검찰은 그중 1백20개를 추려 작가에게 입증할 객관적 자료를 대라고 요구했다. 당시 그는 일일이 해당 항목에 대한 자료를 모두 찾아서 제출했다. 답변서에 인용한 책만 17권이요, 취재 메모, 노트가 한 보따리였다고 한다.
-그 사건은 아직도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아마 검찰사상 최장기 미제사건이 아닐까 싶어요. 하긴 검찰도 골치가 아프겠지요. 그래서 세월에 그냥 맡겨두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전 국민이 읽다시피 한 소설을 유죄로 기소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무혐의 처리를 내리면 저쪽에서 들고 일어설 테니 말이지요. 사실 이 문제는 국가보안법의 폐지, 안되면 부분 개정이 이뤄지면 자동 해결됩니다. 대표적 독소조항으로 꼽히는 제7조 ‘고무 찬양죄’만 없어져도 소멸될 소송이에요. 이번 정부에서는 좀 기대해볼까 합니다(웃음).

-그동안 심야에 협박 전화, 해당 출판사의 세무조사 등등 고초가 많았습니다. 작가에게 가해진 이런 핍박이 억울하진 않습니까.
전 이제 미움이 없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합니다. 불안한 거지요. 물론 절 고소한 그들까지 끌어안고 갈 자신은 없습니다만, 그대로 두어도 자연 도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로서 전, 고난은 도리어 달게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그는 그러면서 <한강>을 끝내고 쓴 ‘작가의 말’ 중 한 부분을 인용했다. “진정한 작가란 그 어느 시대, 그 어떤 정권하고도 불화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권력이란 오류를 저지르게 돼있고 진정한 작가는 그 오류들을 파헤치며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정치성과는 전혀 관계없이 진보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요즘 인터넷이나 언론지상에서 ‘반미 촛불시위’가 이슈가 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 그걸 ‘반미’가 아니라 ‘민족자존 회복운동’이라고 봅니다. 미국 싫다, 물러가라 이게 아니라 우리 자존심을 짓밟지 마라, 우리를 우방으로서 정당하고 공평하게 대하라는 요구가 담겨있는 겁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분명히 미국은 우리나라를 재인식할 겁니다.
‘촛불시위’를 보면서 전 또한 이걸 생각합니다. 촛불시위의 80~90%는 10대 후반에서 20대들이 이끌고 있어요. 가장 미국적인 문화의 최대 수혜자들이 이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걸 구분지을 줄 알더라 이겁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자존적 질서의식’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걸 두고 ‘반미’라 해석하는 건 기성세대의 오류라고 봅니다. ‘축제는 축제고 질서는 질서다’라는 자존적 질서의식을 우린 7백만 거리응원에서 이미 보지 않았나요? 이런 변화된 지점을 읽어내지 못하는 기성세대는 모두 버림받고 말 겁니다.
이어 대화는 대통령 선거 결과와 언론 개혁, 친일세력 청산 등과 같은 정치적 사회적 사안으로 이어졌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해야 할 듯싶다. “<여성동아>와 동떨어지는 얘기를 오래 해서 미안하다”던 그가 말미에 뜻밖의 얘길 꺼냈다.
“이제 늙었는가… ‘내 사랑 재면이’와 같은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예전에 쓴 칼럼들을 보면 글이 마치 칼날 같아요. 작가로서는 마땅히 비판정신이 있어야 하고 그런 글을 써야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할아비가 손자에게 보여주는 그런 애정어린 글을 쓰는 게 훨씬 소중하고 그래요.”
-깐깐하실 거라는 선입견과 참 다르십니다. 참, 문단 내 잉꼬부부라면서요? 그 비결이라도 있으십니까. (조정래 김초혜 부부는 동국대 국문과 62학번 동기동창이다. 결혼생활 36년째로, 연애기간까지 합치면 40년 세월에 이른다).
전 아내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려 해요. 결혼해서 사는 동안 너무 고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제 뒷바라지하느라 시 쓰는 일도 때로 중단할 정도였지요. 그래서 아내는 제게 하늘이나 진배없습니다. 제 첫번째 독자이면서 감수자고 조정자로서 아내의 자리는 너무나 큽니다.
그런 아내가 우울증을 심하게 앓은 적이 있었죠. 결혼 15년째 되는 해였는데, 그때 전 아내에게 99송이의 장미꽃을 선물했어요. 그건 아흔아홉살까지 건강하게 살아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전 사람들에게 언어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해요. “사랑해”라는 말, 그런 작은 표현들이 사랑을 윤기 있게 해주는 법이에요. 작년 아내가 부인과 관련 질환으로 대수술을 했을 때도 전 직접 아내를 간호했습니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입원기간 동안 매일 사랑의 편지를 써서 건넨 것도 그것 외에는 아내를 달리 위로해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랬지요. 다행히 아내의 상태가 좋아서 한시름 놓았습니다.
-앞으로 계획이 있으시다면.
70세가 될 때까지 10년 안에 그동안 못 쓴 중단편소설을 포함해 약 7권 정도의 책을 내려 합니다. 거기엔 손자를 위한 동화도 포함되겠지요. 1년에 1권씩 쓰면 10년이면 10권인데, 지난 20년 동안 32권을 썼으니 초과달성한 셈 아닙니까. 체력 떨어지는 걸 감안해서 정한 목표입니다(웃음).
-서른세해가 되도록 글을 써오셨는데, 힘들지 않습니까.
아직도 글쓰는 일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로 느껴집니다. 또 할수록 조금씩 달라지고 발전하는 게 확실히 보입니다. 힘들기는요, 전 재밌습니다. 그러니 꾸준히 할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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