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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여전히 ‘인간실격’ ‘모순’이 베스트셀러인 이유

김성신 출판평론가

2024. 05. 16

지난 3월 기준 ‘모순’ ‘구의 증명’ ‘인간 실격’은 교보문고 소설 부문 종합 월간 베스트에서 각각 2위, 3위, 7위를 차지했다. 2024년을 살아가는 청년들은 왜 여전히 옛 소설들에 열광할까. 

베스트셀러는 당대의 결핍을 반영한다. 그 시대에 차고 넘치도록 ‘많은 것’이 아니라, 있어야 마땅하지만 ‘없는 것’에 대해 독자는 큰 관심을 가진다. ‘독자’라는 존재가 소비자와 구분되는 지점이다.

대표적으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2010년 10월에 출간돼 2011년까지 기록적인 판매가 이뤄지며 그해 연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대중서도 아닌 학술서에 가까울 만큼 난도 높은 사회과학 도서가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것부터가 초유의 일이었다. 2011년은 참여정부로부터 정권을 교체하며 집권한 실용정부(이명박 정부)가 3년 차에 들어선 시기다. 실용과 효율이 최우선의 시대적 가치로 부상하자, 사회적 정의에 대한 요구가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정의란 무엇인가’ 붐은 정의에 대한 시대적 결핍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했다. 2021년 출간돼 150만 부 이상 팔린 ‘불편한 편의점’은 각자의 어려움을 품고 살아가는 이웃들의 희로애락을 감동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단절의 시대에서 타인에 대한 친절과 배려, 다정함에 대한 결핍이 단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닐까.

2023년 교보문고 연간 베스트셀러 100위 안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양귀자의 ‘모순’ 최진영의 ‘구의 증명’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등 출간 10여 년에서 수십 년이 넘은 문학작품까지 대거 포함돼 눈길을 끈다. 100위권 안에 출간 2년이 넘은 구간이 무려 33권이었다. 구간의 비중이 예년보다 훌쩍 많아졌다. 이 작품들의 역주행에는 어떤 요인이 있을까? 나아가 이런 현상의 이면에서 우리 시대의 어떤 결핍이 작동하고 있을까?

돈 쓰고 시간 내서 ‘노잼’인 책 읽어야 할까

출판업계에선 최근 몇 년 사이 대중적 영향력을 크게 확장한 독서 인플루언서와 북튜버(책 유튜버)들의 추천과 특히 유튜브 ‘플레이리스트’가 구간 도서들의 판매량 증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모순’은 ‘시한책방’ ‘편집자K’ ‘해죽이북카페’, ‘구의 증명’은 ‘오늘책방’ ‘불 켜진 밤’ 등의 북튜버 채널에서 추천했다. 플레이리스트는 북튜버들의 콘텐츠와 결이 조금 다르다. 책이나 작가에 대한 설명이 없고, 음악만 나온다. 그러다 소설의 한 구절을 짧게 곁들이는 정도다. 누군가가 추천하는 책과는 다르게, 사용자끼리 공유하는 감상 평을 통해 바이럴 효과가 계속 확장되는 특성이 있다. ‘인간 실격’이 바로 이런 플레이리스트 효과를 누린 대표적인 경우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라는, 소설 속 대사를 제목으로 한 플레이리스트는 조회수 500만을 돌파했다.
이미 충분히 검증된 책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속내도 반영됐다. 역주행 구간 도서의 독자층을 살펴보면 기존의 문학 주 독자층인 40대 여성이 아니라 10~30대 여성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상대적으로 시간도, 경제력도 부족한 만큼 문학작품을 읽는 것에 있어서도 기회비용까지 염두에 두고 선택에 더욱 신중함을 가진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또 ‘모순’ ‘구의 증명’ ‘인간 실격’

소설의 한 문장을 제목으로 한 플레이리스트들이 높은 인기를 구사하고 있다.

소설의 한 문장을 제목으로 한 플레이리스트들이 높은 인기를 구사하고 있다.

하지만 ‘추천’만으로 장기 베스트셀러에 등극할 수는 없다. 이 시대의 독자들이 충분히 공감을 느껴야만 오래도록 선택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최근 화제가 된 역주행 구간 도서에는 어떤 시대적 공감의 요소가 있을까?



‘모순’에는 집안 형편 때문에 휴학하고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주인공 안진진이 등장한다. 그녀에겐 나영규와 김장우라는 두 남자가 있다. 나영규는 삶을 철저하게 계획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운 편인 그는 안진진에게 청혼한다. 반면 야생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김장우라는 남자는 형편이 여유롭지 못하다. 당장 결혼할 처지는 못 되지만 안진진을 사랑한다. 주인공의 마음은 김장우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늘 자신의 계획대로만 사는 나영규의 삶 속에서 안진진이 존재감을 만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안진진의 엄마와 이모는 일란성쌍둥이다. 엄마는 시장에서 잡다한 물건을 팔며 술주정뱅이 남편에다 사고만 치는 아들까지 부양하는 신세지만 이모는 세상 고민이 없다. 유명 건축가 남편을 둔 사모님이라 우아하게 살아간다. 그런 이모는 삶이 지루하다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는 스스로 삶을 끝내버린다. 주인공은 엄마와 이모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그런데 반전이다. 주인공은 가난하지만 마음이 끌렸던 김장우가 아닌, 이모부와 닮은 나영규를 선택한다. 주인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한편 2015년에 출간된 ‘구의 증명’도 화제의 역주행 도서다. 사채업자에게 쫓기다 결국 죽임을 당한 연인의 시체를 먹는다는 줄거리다. 일변 끔찍하고 엽기적인 스토리지만, 작가는 젊고 아름다운 남녀의 열정적인 사랑, 죽음 그리고 사랑의 궁극 등의 주제를 애절한 감수성의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낸다. 작가는 사랑 후 남겨진 것에 대해 이렇게 쓴다.

“고통스럽게 나를 뜯어먹는 너를 바라보고 있자니 있고 없음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있든 없든 그건 어디까지나 감각의 영역일 텐데, 나는 죽은 자다. 죽어 몸을 두고 온 자에게 감각이라니 무슨 개소리인가. 하지만 느껴진다. 나는 분명 너를 느끼고 있다.”

‘인간 실격’에서는 주인공이 이런 대사를 내뱉는다.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서로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1948년에 출간되어 전후 패전국 일본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인간 실격’, 1998년 국가부도라는 초유의 사태로 모두가 실의에 빠져 있던 그 시절에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모순’, 4·16 세월호 참사 이듬해인 2015년 출간된 최진영의 ‘구의 증명’은 세상에 나온 시기와 공간은 각각 다르지만 작품 모두 가난과 혼란과 고통과 슬픔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어쩌면 지금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패전국의 젊은이들처럼, IMF 때의 실직자처럼, 세월호 참사를 목도할 때처럼 그렇게 심하게 마음이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한 해의 마지막 날 자정 무렵, 편의점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젊은 학생 무리를 본 적이 있다. 혹시 점원이 문을 잠그고 잠시 자리를 비웠나 살펴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날의 궁금증이 풀린 건 몇 달이 지나서였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가 대학생이 된 딸아이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요즘 애들 얼마나 웃긴지 아세요? 19세가 되는 해부터 술을 마실 수 있잖아요. 그래서 1월 1일 0시에 술을 마시는 게 일종의 이벤트예요. 편의점 가서 주민등록증 제시하고 술 사서 인증 샷을 찍고 난리 블루스를….”

그때서야 의문이 풀렸다. 1월 1일 0시 연령제한 해제와 동시에 음주를 하고 이를 인증하는 행위는 우리 10대들만의 저항과 연대의 행위일 것이다. 어쩌면 오래된 책들을 찾아 읽는 특별한 현상 안에도 청년들이 우리 사회에 보내는 중요한 메시지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젊은이들의 이런 마음을 섬세하게 잘 읽어내는 사람만이 다음 시대를 주도할 것이라 믿는다.


#구의증명 #모순 #인간실격 #여성동아

사진출처 유튜브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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