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을 날던 재킷은 일찍이 패션 디자이너들의 레이더망에도 포착됐다. 입생로랑은 1970년대 남성복 컬렉션에서 군복 스타일의 플라이트 재킷을 대거 선보였고, 이후 장폴고티에와 라프시몬스 같은 브랜드들이 MA-1의 전통적 요소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피스들을 내놓으며 항공 점퍼를 하이패션계에 당당히 입문시켰다. 2004년엔 헬무트랭이 탈착 가능한 탭 칼라를 적용한 미니멀한 플라이트 재킷을 고안해 화제를 모았다. 여성복에서도 항공 점퍼는 강렬한 영감의 뮤즈였다. 2018년 트루사르디는 1930년대 전설적인 여성 비행사 어밀리아 에어하트의 비행복에서 착안한 항공 점퍼를 컬렉션 전면에 내세워 깊은 인상을 남겼고, 2021년 샤넬은 트위드 소재를 적용한 항공 점퍼로 컬렉션을 우아하게 이끌며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국내에서도 2024년 앤더슨벨이 최초의 여성 파일럿인 권기옥에 대한 경외심을 담은 밀리터리 룩을 선보이며 시선을 끈 바 있다. 이처럼 항공 점퍼는 성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아이코닉 아이템으로 진화해왔다.

다채로운 매력으로 무장해
이번 F/W 시즌 항공 점퍼는 클래식부터 아방가르드까지 다채로운 변주 속에서 새롭게 비상했다. MA-1의 전통적 실루엣을 고스란히 살린 발렌시아가가 대표적인 예. 베이식 룩과 결합한 다양한 스타일의 항공 점퍼 룩을 선보이며 하이패션의 감도를 한층 높였다. 치카키사다는 항공 점퍼에 보디슈트와 패티코트 형태의 스커트를 매치해 남성성과 여성성의 충돌이 빚어내는 긴장감을 선사했고, 알렉산더맥퀸은 빅토리아풍 드레스 위에 항공 점퍼를 믹스 매치해 낭만적이면서도 강렬한 뉴 로맨티시즘을 표현했다. 실루엣을 변주하며 새로움을 추구한 브랜드들도 주목받았다. 에르메스는 항공 점퍼 디자인을 기반으로 한 맥시 길이의 퀼팅 점퍼를 선보이며 트렌드를 주도했다. 허리를 벨트로 단단히 조인 디자인은 마치 우아한 레이디의 코트를 연상시켰다. 준야와타나베 역시 극에 달한 과장된 소매 라인과 박시한 실루엣으로 독창적인 형태미를 드러냈다. 이런 극단적 볼륨은 듀란랜팅크 컬렉션에서 정점에 달했다. 어깨를 삼각 형태로 부풀린 패딩 항공 점퍼는 미래적인 무드까지 자아냈다. 사카이는 전형적인 항공 점퍼의 구조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데 앞장섰다. 점퍼의 소매를 잘라내 케이프처럼 두르거나, 밑단을 플리츠스커트처럼 펼치는 식으로 항공 점퍼의 틀을 새롭게 뒤집었다. 기존의 컬러와 소재를 달리해 항공 점퍼에 새 생명력을 불어넣은 브랜드들도 돋보였다. 키스는 가죽과 스웨이드를 패치워크한 항공 점퍼로 보헤미안 무드를 연출했고, 헨릭빕스코브는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화려한 프린트와 정교한 스티치 장식으로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했다.이처럼 디자이너들은 각자의 시선으로 항공 점퍼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한때 조종사의 방한복에 불과했던 이 옷은 실용과 미학을 겸비한 하이브리드 아우터로 비상하며 다시 한번 패션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그 옛날 어밀리아 에어하트가 그러했듯, 항공 점퍼는 여전히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꺼지지 않은 그 생명력에 다시 찬사를 보낼 때다.
#항공점퍼 #겨울점퍼 #여성동아
기획 강현숙 기자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발렌시아가 슈지 치카키사다 키스 헨릭빕스코브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