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아모리에 대해 설명하는 홍승은 작가.
‘폴리아모리’. ‘많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폴리’(poly)와 ‘사랑’을 뜻하는 라틴어 ‘아모르’(amor)의 합성어다. 사전적 정의는 ‘비독점적 다자 사랑’이다. ‘다자’간의 사랑. 누군가 “나는 폴리아모리야”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에게서 어떤 모습을 떠올릴까. 혹자는 수많은 미녀와 은밀하고 방탕한 파티를 즐기는 하렘의 이미지를 상상할 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집단 난교를 일삼았던 ‘소라넷’ 회원들을 생각할 수도 있다. ‘세기말’을 떠올리면서 “말세야 말세”라고 혀를 끌끌 차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홍승은 작가는 두 명의 애인(우주, 지민)과 함께 폴리아모리로 살고 있다. “내게 붙은 여러 이름표 중 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것들이 있다. 가시를 하나씩 빼내며 글을 써 왔다”는 그의 이번 가시는 폴리아모리다. 2017년 페미니즘 에세이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올 1월 글쓰기 에세이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에 이어 7월 13일 출간한 세 번째 저서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는 홍 작가의 폴리아모리 에세이다. 대중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다. 7월 20일 이 책을 소개한 한 일간지 기사에 달린 4512개의 댓글(네이버 기준) 중 ‘애들이 볼까 무섭다’, ‘비정상을 애써 정상으로 만들지 마라, 그걸 변태라고 하는 거다’, ‘짐승이나 할 짓을 포장하고 미화하지 말자’는 댓글이 베댓(베스트댓글)이 됐다. 하지만 홍 작가는 말한다. 폴리아모리로서의 삶은 의외로 ‘평범’하다고. 아니, 정확히는 ‘평범’하지 않아도 존중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대중에게 폴리아모리는 낯설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폴리아모리로서의 삶을 택하시게 된 이유가 뭔가요.
‘상호 존중이 필요하다’, ‘평등한 관계를 위한 서로의 노력이 필요하다’라는 말에 반대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이 내용에 폴리아모리라는 형태가 입혀지는 순간 사람들은 내용엔 관심을 갖지 않고 형태에만 집중하면서 비난해요. 저는 형태보단 내용에 집중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 내용을 실천함에 있어 폴리아모리가 적합한 방식이라 생각했고요.
2008년 개봉한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의 현실판 같다는 말도 있어요.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 영화가 개봉한 시기를 고려하면 의의도 있었지만 그만큼 한계도 뚜렷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우선 여자 주인공 인아(손예진)가 한국 남성의 욕망이 투영된 존재라고 느꼈어요. 인아는 무척 섹시하고, 예쁘고, 돈도 잘 버는데 가사노동까지 다 해요. 아이도 첫 번째 남자 덕훈(故 김주혁) 사이에만 갖고, 두 번째 남자 재경(주상욱)과는 콘돔을 사용하고요. 급진적으로 보이지만 보수적인 거죠. 또, 덕훈이 질투를 느껴서 인아의 목을 조르는 등 폭력을 사용하는데, 마치 그것이 당연한 감정이자 행동이라는 듯이 묘사하거든요. 이것도 잘못됐다고 생각하고요.
간단한 책 소개 기사였음에도 댓글이 4500개나 달렸는데 반응이 호의적이진 않았어요. 이런 반응을 예상하셨나요.
그럼요(웃음). 이 책이 나오면 모두가 환영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무플보단 악플이 나아요. 비록 소수지만 ‘욕하려고 읽었다가 편견이 깨졌다’며 리뷰를 올려주시는 분도 계세요. 그런 반응이 소중하죠.
비난 여론이 있을 것을 알면서 책까지 내신 까닭은요.
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어요. ‘지민’의 경우 기독교 대학을 다니다가 폴리아모리라는 이유만으로 무기정학을 당했어요. 해명이 저희의 일상이었고, 이럴 바엔 ‘우리의 언어로 세상에 이야기하자’라는 생각이 든 거죠. 또 제가 청소년 때 ‘두개의 선’이라는 독립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두 사람이 사랑을 하는데, 몇 년째 동거만 하고 결혼은 하지 않죠. 결혼제도에 포섭되지 말고 자신들만의 삶을 살 거라면서요. 그러다 임신을 하게 되고, ‘아이가 생겨도 결혼제도에서 벗어나 살 순 없을까’를 주제로 이야기가 펼쳐져요. 전 결혼이라는 토대 위에서 남자 한 명과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영화를 보고 나니 ‘다른 방식도 가능하겠네’하는 상상력이 생기더라고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제 책이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상상력이 되길 바랐죠.
폴리아모리는 ‘문란하다’는 인식이 비판의 근거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아요.
당연히 동의하지 않죠. 소수자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가해지는 잣대와 같다고 생각해요. 그들에게 가해지는 비판이 주로 ‘문란하다’, ‘더럽다’잖아요. 게이에 대해선 ‘항문 섹스’, ‘에이즈’라는 단어로 비난하는 것처럼요. 폴리아모리에 대해서도 그렇죠. “일대일이 아니라 다자? 그러면 초대남? 쓰리섬?”이렇게 떠오른 이미지만 갖고 욕을 해요. 일단, 저희는 쓰리섬 안 합니다. 하지만 설령 하면 어떤가요? 성적 판타지는 누구나 다를 수 있죠. 강제로 하는 것도 아니고 합의 하에 하는 거라면 뭐가 문제인가요. 이성애 관계에서 그러지 않듯, 폴리아모리를 상상할 때 언제나 성적인 부분만 부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책에서 폴리아모리는 의외로 ‘평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평범의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실 ‘평범’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편집자님과 의견 대립이 있었어요. 각자 평범에 대한 기준이 다르고,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척도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대중이 책에 다가오기 쉽게 하기 위해 사용하기로 했어요. 그래도 평범이라는 단어는 좀 그렇죠. 평범하지 않더라도 존중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모노가미(일부일처제)를 평범 혹은 정상의 기준이라고 한다면, 이 기준이 자연적인 것인가 질문을 해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정답인지, 본능인지, 정말 우리 스스로 선택한 것인지요. 정상을 정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이 있어야 하잖아요. 지금껏 정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존재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배제해왔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사랑하면 소유하고 싶은 것은 자연적인 감정 아닐까요. 사랑=소유는 극복돼야 할 등식인가요.
그러한 감정을 모든 사람이 극복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에요. 저 개인적으로 모노가미라는 제도에 대해서 부정적인 거죠. 이 제도가 인간의 자연적인 특성에 부합한다는 믿음에 비판적이에요. 일부일처제가 제도화된 건 역사적으로 얼마 되지 않았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유욕과 독점욕을 느낄 수는 있겠죠. 하지만 독점욕으로 인해 많은 폭력이 발생하고 있고, 독점하지 않아도 사랑은 얼마든지 가능해요.
가족 혹은 두 애인과의 갈등은 없었나요.
우주와는 2014년부터 교제했고 2016년에 지민과 교제를 시작했죠. 다 같이 산 것은 3년째고요. 지민과 교제하고부터 셋의 관계가 시작된 건데, 솔직히 따로 살던 첫 1~2년 동안은 힘들었죠. 셋이 폴리아모리에 동의하긴 했지만 저는 둘 사이에서 시간을 배분하는 게 힘들었고 둘은 질투, 박탈감, 불안감으로 힘들어했어요. 그렇지만 오히려 셋이 모이고 나서부턴 오히려 갈등이 사라졌어요. 그 이유가 서로 만나기 전엔 상대에 대한 상상력이 너무 컸던 거예요. 상대방은 마치 ‘침대의 왕’아닐까, 어마어마하게 잘난 사람 아닐까 하면서요. 그런데 막상 만나니까 서로 유대감이 생긴 것 같아요(웃음). 부모님도 처음엔 싫어하셨지만 지금은 인정해주세요. 특히 엄마는 “승은이는 승은이의 삶을 살아”라고 말해줬죠. 눈물이 나더라고요.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라는 에세이를 펴낸 홍 작가는 진정한 폴리아모리는 페미니즘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폴리아모리도 각자만의 다양한 합의로 이뤄지기 때문에 하나의 원형으로 설명할 순 없어요. 그럼에도 공통으로 공유하는 가치는 있어요. 비독점성, 평등한 관계에 대한 노력. 폴리아모리에서 이것을 뺄 수는 없죠. 권력관계, 위계관계 등을 이용해 단순히 여러 사람과 섹스를 즐기면서 “나는 폴리아모리니까 괜찮아”라는 것은 합리화에 불과해요. 또, 합의만을 폴리아모리의 기준이라고 볼 수도 없어요. 합의의 토대가 기울어진 상태일 수도 있거든요. 배우자에게 “폴리아모리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생존의 위협을 받을 수 있다거나 통보가 곧 합의가 되는, 상대방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관계라면 이걸 합의라고 볼 순 없잖아요.
페미니즘을 떼놓곤 폴리아모리를 얘기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인가요.
네. 전 그렇게 생각해요. 페미니즘이 없는 폴리아모리는 일부다처제와 다를 바 없어요. 페미니즘이 말하는 성평등이라는 가치를 삭제하면 폴리아모리라는 다자 관계에서 한 사람이 다수를 거느릴 수 있게 되거든요. 또 하나의 이유는 폴리아모리라는 개념이 생긴 역사가 페미니즘과 밀접하게 연관 돼있어요. 여태까지 결혼제도에 있어서 여성은 거래되는 대상이었다고 생각해요. 여성이 성적 권리의 주체로서 이야기를 꺼낸 적이 많지 않죠. 그렇기에 여성이 스스로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주체가 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페미니즘이 폴리아모리를 가능하게 한다고 믿어요.
모든 것을 ‘그럴 수 있다’라고 인정해주다보면 보편성이 사라져버리지 않을까요. 옳고 그름의 잣대도 없어지고요.
보편성을 평가함에 있어서 특정한 틀로만 접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혹자는 “그러면 수간도, 로리타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극단적인 형태를 예로 들어요. 저는 보편적 가치를 없애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의 내용을 다시 고민해보자는 거죠. 예를 들어 ‘사람이 사람을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관계 안에선 평등해야 한다’처럼요.
‘폴리아모리는 사랑을 폭력이 아닌 돌봄의 기능으로 바꾸는 관계’라고 하셨어요.
사랑이라는 단어는 추상적이잖아요. 저는 지금껏 연애를 하면서 사랑이 폭력과 긴밀히 이어지는 것을 정말 많이 봤어요. 가장 친밀한 관계가 가장 잔인한 폭력을 저지를 수도 있잖아요. 폴리아모리가 아니었을 때와 지금이 다른 점은 지금은 이 관계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상호간의 노동(돌봄, 가사)을 끊임없이 해야만 된다는 것을 느낀다는 거예요. 폴리아모리에 대한 일상의 느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좀 추상적일까요(웃음).
다른 폴리아모리, 성소수자, 청소년 등 사랑을 드러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선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게끔 하는, 그 사람들을 소수자로 만드는 사람들에게 먼저 이야기 하고 싶어요. 판단하려는 사람이 없으면 판단되지 않고, 해석하려는 사람이 없으면 해석되지 않아요. 세상엔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들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품을 열어준다면 소외되고 위축된 사람들이 보다 존중받는 사회가 될 거라고 믿어요. 사랑을 숨기게 되는 분들께는, 우리는 N개의 존재이고, N개의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되고요. 당신이 이상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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