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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인생 사용설명서 여덟 번째 | 내 인생의 플랜B

“먼 길 돌아왔지만 지금이 내가 꿈꾸던 삶!”

전신마비 사고 후 재활공학으로 재기 국립재활원 김종배 박사

글 | 김유림 기자 사진 | 지호영 기자

2012. 06. 25

한때 그는 미래가 보장된 카이스트 산업공학과 학생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로 전도유망했던 그의 앞날은 단번에 칠흑 같은 어둠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인생 역전, 그는 전신마비 장애를 딛고 재활공학 박사로 세상에 우뚝 섰다. 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에 재직 중인 김종배 박사의 사연이다.

“먼 길 돌아왔지만 지금이 내가 꿈꾸던 삶!”


초록의 나뭇잎들이 더욱 푸르게 빛나던 5월의 어느 날, 서울 수유동에 자리한 국립재활원 연구소 409호 창문 너머에도 화창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 방의 주인은 얼마 전 서울시복지상 장애인 분야에서 대상을 수여한 김종배(51) 박사. 현재 재활보조기술연구과장으로 재직 중인 김 박사는 그 역시 가슴 아래로 전신마비 증상을 보이는 중증 장애인이다.
휠체어에 앉아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자신의 명함을 직접 건네지는 못했지만 그는 환한 미소로 취재진을 맞았다.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능숙하게 휠체어를 이동시키고 휠체어에 붙어 있는 거치대를 이용해 스마트폰도 마음대로 조작했다. 휠체어는 그의 몸과 하나인 듯 보였다.
김 박사가 서울시복지상을 수상한 이유 역시 그동안 국가적인 재활공학 연구개발 사업을 이끌면서 장애인 참여형 연구를 정착시켰기 때문이다. 첨단재활공학을 적용한 식사보조로봇, 욕창 방지용 휠체어, 장애인 그림 도우미 기기, 휴대용 경사로와 운동이 부족한 장애인을 위한 휠체어 게임 등 특허 16건, 시제품 14건, 상용화 2건 등의 획기적인 성과를 낸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하지만 애초 그가 꿈꾸던 인생은 장애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자신이 장애인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건은 1985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카이스트 산업공학과 석사과정 마지막 학기를 남겨둔 김 박사는 친구가 거주하던 옥탑방에서 내려오다 그만 실족해 일층 높이의 위치에서 떨어졌다. 머리가 먼저 땅에 닿으면서 목뼈 경추 5번이 골절됐고, 가슴 아래로 전신이 마비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불행이 찾아온 순간이었다.
“그때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형수라고 할 수 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 부모님이 침대에서 저를 들어 책상 앞에 앉혀 놓으면 하루 종일 창을 통해 바깥만 바라보는, 정말 암흑 같은 삶이 펼쳐졌죠. 마지막 논문을 남겨둔 상태에서 어느 누구도 제가 다시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지금처럼 전동휠체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외국에서 선진문물을 접하고 돌아온 교수님들조차 안타깝지만 제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죠. 무엇보다 힘들었던 게 부모님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거였어요. 다 큰 아들이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됐다는 걸 믿기 힘드셨겠죠. 지금이야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암흑’이란 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아요.”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 읽기 시작한 성경책을 통해 마음을 치유할 수 있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훗날 신 앞에 가더라도 떳떳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날부터 마음이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처음 사고를 당했을 때는 집으로 찾아오는 친구들을 보며 통곡하기도 하고, 또 결국에는 사람들 만나는 것 자체를 거부했어요. 하지만 성경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고부터는 제가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했죠. 또 장애는 보는 관점에 따라 강도가 다를 수 있어요. 비록 여전히 육체적으로는 많이 불편하지만 27년 전 사고를 당했을 때와 비교하면 세상이 변하면서 장애 정도도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죠. 육체적인 장애가 전부가 아니라 환경적으로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면 그 또한 장애거든요. 당시에는 전동휠체어도 없었고, 컴퓨터도, 인터넷도, 활동보조인도, 장애인을 위한 교통시설도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많은 지원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장애인도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고, 저 역시 누구보다 바쁜 삶을 살고 있어요. 장애인이어서 불편한 건 있지만 불가능한 건 없어요.”

“장애인의 불편함 누구보다 잘 아는 게 힘”

“먼 길 돌아왔지만 지금이 내가 꿈꾸던 삶!”

김종배 박사가 개발한 스마트폰 휠체어 거치대. 손가락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지만 사진 촬영까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가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PC의 보급이다. 사고 후 5년 정도 지났을 무렵 컴퓨터가 등장했고, 그는 집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며 새로운 일을 모색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3년 뒤 전동휠체어를 처음 접하고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감동했다고 한다. 그동안 늙은 부모에게 몸을 맡겨야 했던 그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꿈을 꾸는 듯 기뻤다고.
그 일을 계기로 그의 또 다른 인생 플랜 B가 시작됐다. 장애인의 불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또 장애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절감하면서 그는 앞으로의 인생을 장애인을 위한 보조기기, 재활기기 개발을 위해 쓰기로 마음먹었다. 1996~2001년 한국척수장애인 수레바퀴선교회 정보통신센터 소장을 지내면서 중증장애인들을 도운 그는 이 과정에서 천안 나사렛대 재활학과에서 강의하면서 재활보조공학 분야에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느꼈고, 결국 사고를 당한 지 16년 만인 40세의 나이에 미국 피츠버그대로 유학을 떠났다. 4년 만에 재활공학 박사 과정을 마친 그는 박사 후 과정까지 거쳐 정식 조교수로 임명됐다. 그 무렵 한국 국립재활원이 재활연구소를 설립하면서 그를 연구원으로 초빙했고, 그는 미련 없이 미국 생활을 접고 가족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 공무원의 길을 택했다.
“처음부터 한국으로 돌아와 장애인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연구원 제의를 받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왔어요. 어찌 보면 저는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카이스트까지 다녔고, 부모님 역시 아픈 저를 돌볼 수 있을 만큼 경제력도 있으셨고, 사고가 일어나기 전 대학원 마치고 바로 계획대로 유학길에 오르진 못했지만 결국 먼 길을 돌아 처음 세웠던 인생목표대로 유학까지 마쳤어요. 하지만 주위에 보면 환경이 받쳐주지 못해 아무것도 못하는 장애인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기기들을 보급해야 하고 생화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제가 앞으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그가 어떤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고 보람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건 가족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고 후 교회에서 만난 아내는 평생 그를 우선으로 한 삶을 살아온 “천사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올해 대학생이 된 딸 역시 그가 열심히 살아야 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흔히들 저 같은 사람을 보고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라고 말하는데, 저는 몸이 불편하고 아니고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몸이 불편한 사람도 정상인과 같이 일할 수 있게끔 주변 환경이 얼마나 잘 받쳐주느냐의 차이죠. 제가 장애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경험했고, 누구보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게 끝까지 다해야 할 소임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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