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아이 영재로 키워낸 유은정 주부
“자연스럽게 책읽기의 즐거움에 빠져들게 해주세요”
요즘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영어, 수학, 피아노, 논술 등 각종 학원을 다니느라 바쁘다. 하지만 서울 휘경동에 사는 김민주(13)·소정(12)·승우(7) 남매네 집 풍경은 다른 집과는 사뭇 다르다. 집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책이 빽빽하게 들어찬 책장들과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민주와 소정이는 생후 46개월 때 사설기관에서 영재 판정을 받았다. 민주는 다섯 살 때 영어동화책을 줄줄 읽어 TV에 출연한 적이 있고, 지금도 교내외 글짓기 상을 독차지하고 있다. 논리력과 창의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소정이는 벌써부터 부산에 있는 영재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생후 26개월 때 TV 프로그램에 ‘공룡박사’로 출연한 적 있는 승우 또한 ‘수호지’ ‘초한지’ 등 중국 고전들을 이미 다 읽었다고 한다.
“책 속에 모든 길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니까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학원에 다니지 않으니까 학교 수업시간에 더 집중하게 돼 성적도 잘 나오는 것 같아요.”
아이들을 왜 학원에 보내지 않느냐는 질문에 엄마 유은정씨(42)는 이처럼 자신 있게 답한다. 덕분에 집에서 노는 시간이 많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책읽기의 즐거움에 빠져들었다고.
“민주를 임신했을 때 육아 관련 서적을 집중적으로 읽다가 ‘생후 36개월 이전까지는 모든 아이들이 천재’라는 이론을 접했어요. 그때 처음 ‘우리처럼 평범한 부부에게서도 천재가 나올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책을 통해 교육을 하게 됐어요.”
아이들이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많은 책을 읽어줬다는 유은정씨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책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도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한다. 집안을 어지럽힌다고 혼을 내지 않았고 책 읽고, 종이를 오리고 붙이는 놀이를 하도록 장려함으로써 사고력과 창의력을 키우도록 했다고.
유은정씨는 책을 싫어하는 아이를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바꾸려면 엄마의 관심과 노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말한다. 아이가 책을 읽어달라고 할 때는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달려올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 또한 무턱대고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강요해서는 안 되며 아이가 책에 관심 가질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많은 책을 읽어주는 것이 좋다는 게 유씨의 생각이다.
많은 엄마들은 아이가 글을 스스로 읽을 줄 알게 되면 책 읽어주기를 그만둔다. 하지만 책 읽는 소리를 많이 듣다 보면 집중력이 높아지기 때문에 ‘듣기’는 매우 중요한 학습방법이다.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책과 가까워질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따라서 유씨는 책읽기를 싫어하는 아이는 ‘책 듣기’부터 시작하게 하라고 조언한다.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아이가 집어드는 책으로 독서교육 시작
유은정씨는 또한 가정 내에 ‘독서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일단은 발에 밟히도록 거실이나 방에 책들을 깔아놓으라고 권한다. 아이들 방에 책을 보기 좋게 정리해놓는 것보다는 온 가족이 함께 있는 장소에 책을 두어 눈과 손에 항상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것. 또 특정한 책 한 권만 반복해서 읽는다고 억지로 다른 책을 읽도록 하는 것보다는, 읽고 싶은 만큼 실컷 반복해 읽게 내버려두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에게 전집을 한 질씩 사주는 게 좋은데 한 번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바로 찾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 읽은 책은 바로 처분하지 말고 3년 정도는 보관해놓는 게 좋다고.
그리고 독서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해주는 게 바람직하다. 민주네 집에서는 TV 시청과 컴퓨터 게임 등을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있다. 유은정씨는 민주와 소정이가 어릴 때 TV만화조차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독서를 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해요. 많은 엄마들이 이 학원, 저 학원 다 보내고 남는 시간에 책을 읽히려고 하는데 아이들도 쉬어야 하기 때문에 그게 잘 안돼요. 아이들은 기계가 아니잖아요.”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수많은 책 중 우리 아이에게 딱 맞는 책을 고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유은정씨는 아이의 연령보다는 아이가 그동안 읽어온 책의 수준을 파악해서 단계를 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연령별 권장도서는 개인차가 고려되지 않기 때문에 무턱대고 그것에 의존하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요. 같은 초등학교 1학년생이라도 평소 독서량이 많은 아이는 고학년 수준의 책읽기가 가능하지만 독서습관이 길러지지 않은 아이는 그림책부터 시작하는 게 좋아요. 그래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를 땐 아이를 서점이나 도서관에 데려가세요. 아이가 관심을 보이며 집어드는 책을 시작 단계로 잡으면 대체로 맞더라고요.”
많은 엄마들은 아이가 만화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유씨는 만화든 아니든 아이가 진심으로 관심을 보인다면 거기서부터 독서교육을 시작하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다만 같은 수준의 책을 여러 권씩 충분히 읽으면서도 조금씩 단계를 높여갈 수 있도록 책을 공급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 ‘독서광’ 두 아이 키우는 아빠, 출판평론가 표정훈
“먼저 책을 장난감으로 갖고 놀게 해보세요”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 성준이(10)와 여섯 살배기 딸 현진이의 아빠이자 출판평론가인 표정훈씨(39). 그는 1만 권 이상의 책을 모아온 애서광(愛書狂)답게 아이들과 늘 책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을 ‘직업 독서꾼’이라 일컫는 그는 자녀의 독서 지도에 있어서도 남다른 장기를 발휘한다. 그는 아이들의 손이 닿는 모든 곳에 책꽂이를 배치함으로써 두 자녀가 책과 쉽게 친숙해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일단 독서를 시작하는 어린아이에게는 ‘책은 놀이’라는 개념을 심어줘야 해요. ‘책은 지루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면, 책과 거리를 두려고 하거든요. 아이들이 책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책으로 도미노 놀이, 탑쌓기 놀이를 함께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책을 장난감 삼아 갖고 놀다 보면, 책 속의 내용도 궁금해하기 마련이거든요.”
표정훈씨는 “부모의 조급증이야말로 자녀에게 독약”이라고 강조한다. 자녀가 읽는 책의 수준이 또래에 비해 뒤떨어진다거나 책읽기를 싫어한다고 해서 부모가 조급하게 반응하면 아이에게 부담만 준다는 것. “부모는 자녀가 책읽기의 즐거움을 깨닫도록 환경을 조성해주고, 그 다음은 아이의 흥미와 감수성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표씨의 지론이다.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뒹굴며 자라온 성준이는 하루에 4, 5권의 책을 독파하는 독서광이다. 학원에 다니며 지식을 암기하는 데 급급한 또래 친구들과 달리, 성준이는 집에서 책과 씨름하며 궁금한 것들을 해결한다. 자연·사회·국어 과목의 경우 책을 통해 공부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로봇의 세계와 역사 이야기에 심취한 성준이는 과학잡지인 ‘어린이 과학동아’와 ‘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과학자가 될지 역사학자가 될지 고민’이라는 성준이는 책을 통해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중이다. 표정훈씨는 이처럼 아이가 특정 분야에 빠져 있더라도 심각하게 고민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아이들은 성장 단계에 따라 관심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성준이는 다섯 살 때 공룡을 무척 좋아해서 공룡의 종류, 크기, 습성 등을 줄줄 외웠거든요. 그때 공룡에 관한 책을 아이에게 참 많이 보여줬어요. 요즘은 성준이가 역사와 과학에 흥미를 붙여 그쪽 분야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아이가 어느 한 분야의 책에 푹 빠질 때, 부모는 걱정하기 쉽지요. ‘이러다가 한 분야에만 몰두하는 외골수가 되는 게 아닌가’ 하고요. 하지만 아이의 관심은 늘 바뀌기 마련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이가 한 분야의 책에 몰두할 때 더욱 빠져들게끔 북돋워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이에 따라 관심 분야 달라지므로 한 분야에 몰두해도 걱정할 필요 없어
책을 사랑하는 이들 부자의 대화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표씨는 아들이 무슨 책을 읽는지 관심을 갖고 그 내용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 슬쩍 물어보곤 한다. 아이의 관심사를 꾸준히 격려하고, 책의 내용에 관해 퀴즈를 냄으로써 복습효과까지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준이가 숙제를 하거나 TV를 보다가 모르는 것이 생겨 물어볼 때, 그는 아이가 책에서 답을 찾도록 노련하게 유도한다.
“성준이가 ‘○○을 모르겠다’고 물어보면, 특정한 책을 읽으라고 권합니다. 요즘은 부모가 초등학생 자녀의 질문에 다 대답해주기도 어렵잖아요. 그럴 때 ‘책 속에 모든 답이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책에 흥미를 느낍니다. 저는 아이들과 함께 ‘TV 동물농장’을 보면서 옛날에 읽었던 동물도감을 꺼내 궁금한 동물 이야기를 다시 찾아봅니다. 언젠가는 성준이가 인쇄기술 이야기를 다룬 역사 만화를 읽다가 제게 구텐베르크에 대해 묻기에 ‘둘리와 함께 떠나는 박물관 여행’이라는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 책은 근대 활판인쇄술의 발명자인 구텐베르크와 박물관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고 있거든요. 성준이는 두 책을 함께 읽음으로써 인쇄기술에 대한 지식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출판평론가인 아버지와 출판사에서 근무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성준이와 현진이는 독서광이 될 만한 유전자와 환경을 두루 타고났다. 하지만 표정훈씨는 “문맹인 부모라도 자녀에게 얼마든지 좋은 독서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책과 책읽기를 소중히 여기는 부모의 자세만으로도 아이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
“책을 사거나 책 속에서 답을 찾는 것이 ‘즐거운 일’임을 자녀에게 알려주세요. 그것만으로도 아이는 책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평소 부모가 꾸준히 책 읽는 모습을 보이면, 자녀는 저절로 부모의 습관을 따릅니다.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서점에 자주 데려가세요. 가족 나들이 코스에 서점을 늘 끼워넣으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책과 가까워집니다. 서점에 들를 때 장난감도 함께 사주면 더 좋고요. 아이는 ‘서점에 가면 신나는 일이 생긴다’고 여기게 돼 책과 저절로 친해집니다.”
자녀의 독서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는 데 시리즈물은 훌륭한 미끼가 된다. 표정훈씨는 성준이에게 여러 권으로 된 시리즈물을 한꺼번에 사주지 않고, 한두 권씩 사서 읽혔다. 이 과정을 통해 아이는 책을 모으는 일이 즐겁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또 한권 한권 읽어나가다가 시리즈물 전체를 통독했을 때 아이는 큰 성취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5, 6세 유아에게는 여러 권의 얇은 그림책을 돌아가면서 반복적으로 읽혀야”
자녀가 독서에 흥미를 갖고 있어도, ‘아이가 균형 있는 독서를 하도록 어떻게 지도할 것이냐’는 여전히 부모의 고민거리다. 요즘 그림 위주의 책이나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책이 범람하면서 학생들은 긴 호흡의 글을 읽는 것을 기피한다. 만화만 읽으려 하는 자녀에게 부모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만화라고 해서 무조건 못 읽게 하면 아이는 독서에 대한 좌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책은 재밌다’는 생각을 계속 갖게 하려면 자녀의 독서 욕구를 막지 말아야죠. 다만 부모는 만화 외에도 다른 종류의 흥미로운 책이 많다는 것을 자녀에게 꾸준히 알려줘야 합니다. 성준이도 만화에만 푹 빠진 시기가 있었지만 만화를 두 권 볼 때마다 글과 약간의 삽화로 이뤄진 책을 한 권 보기로 약속하고 이를 실천케 했습니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에 대한 만화를 보고 난 다음에는 만화가 아닌 세종대왕 위인전을 읽게 한 것이죠. 이때 백과사전을 찾아보게 한 것도 큰 도움이 됐어요.
성준이가 읽는 책을 살펴보면, 반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고 나머지 반은 저와 아내가 추천한 것입니다. 아이 엄마는 주로 성준이에게 세계 명작을 읽도록 추천하는 편입니다. 만약 아이가 ‘죽어도 만화만 읽겠다’고 고집한다면 그냥 내버려두세요. 어떤 책도 읽지 않는 것보다는 여러 종류의 만화를 읽는 것이 낫거든요.”
자녀에게 책을 가까이하는 습관이 몸에 뱄다면, 부모는 아이의 독서 능력에 따라 좀 더 ‘도전적인 과제’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자녀의 경우 책읽기에 흥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면, 고학년은 긴 내러티브(이야기)의 책을 읽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스토리 자체에 빠져 두꺼운 책을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독서 능력이기 때문. 긴 글을 소화할 수 있어야 아이는 중·고교에 진학해서도 학습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성준이는 유아기용 책에서 창비의 ‘재미있다!우리 고전’ 시리즈로 넘어갔는데, 책을 읽고 엄마랑 한두 마디라도 나눈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된 듯합니다.
요즘은 성준이가 중학생 권장도서인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를 가장 재밌게 읽었다고 해요. 열한 마리 토끼가 고향마을을 탈출해 새로운 이상향을 찾아가는 모험 이야기인데, 책이 무려 4권으로 이뤄져 있죠. 아이가 긴 스토리의 맛을 알게 된 데는 엄마의 역할이 컸습니다. 엄마가 책을 먼저 읽고 대강의 줄거리를 이야기해주면서 아이의 흥미를 유발한 거죠. 지금은 아이가 먼저 아내와 저에게 책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합니다.”
그는 ‘지식 전달 및 학습을 위주로 하는 책과 감성을 중시하는 책(명작동화류)을 아이에게 반반씩 읽히자’는 원칙을 갖고 있다. 아이의 지능과 감성을 고루 발달시키기 위해서다. 그는 인터넷 서점의 ‘어린이 도서’란이나 신문의 ‘북 섹션’을 적극 활용해 아이에게 좋은 책을 골라주는 데도 만전을 기한다.
표정훈씨는 미취학 아동인 딸 현진이를 위해서도 ‘눈높이 독서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성준이와 달리 현진이는 삽화가 많은 그림책을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라고. 그는 딸과 함께 그림책을 읽으며 즐겁게 대화한다.
“5, 6세 된 아이가 독서에 흥미를 느끼려면 얇은 책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책을 다 읽었다는 성취감을 자주 맛보게 하기 위해서죠. 아이들은 좋아하는 것을 반복하는 습성이 있으므로 여러 권의 얇은 책을 돌아가며 계속 읽히세요.
아이는 어른보다 집중력이 뛰어나 무엇이든 잘 암기합니다. 그렇게 반복해서 읽은 책의 내용을 외우는 것도 아이의 사고력 개발에 도움이 됩니다. 어른들은 책 속 활자의 의미만 습득하지만, 아이는 어디서 어떻게 책을 읽었는지 상황 자체를 기억하고 있어요. 부모와 책을 읽는 분위기 자체가 아이의 지능 및 정서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거죠. ‘책을 읽은 후 아이가 꼭 독후감을 써야 하느냐’고 묻는 부모님이 있는데, 독후감 쓰기를 억지로 강요하면 역효과가 납니다. 아이가 긴 글을 쓰는 데 어려움을 호소한다면, 먼저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나 기억에 남는 부분에 대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눠보세요. 부모와 아이가 같은 책을 읽고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공부가 됩니다.”
▼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2천 권 독파한 ‘독서 영재’ 푸름이 부모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때는 대화한다고 생각하세요”
최푸름군(16)은 워낙 박학다식해서 친구들로부터 ‘인터넷 지식 검색보다 빠르고 정확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생후 29개월 때 한글을 떼고 책 읽는 것을 노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는 최군은 다섯 살 때 속독을 시작해 여섯 살에 영재 판정을 받았다.
“책읽기가 생활화됐어요. 제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네 가지가 있는데, 바로 의(衣)식(食)주(住)서(書)예요.”
푸름군이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자신의 재능을 키워가는 것을 지켜보는 아버지 최희수씨(44)는 이 행복을 다른 많은 부모도 맛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2001년 독서 영재교육 사이트 ‘푸름이닷컴(www.prumi.com)’을 열었다. 또 최군을 키우며 깨닫게 된 독서교육의 중요성을 담아 ‘푸름이 이렇게 영재로 키웠다’ ‘아빠와 함께 책을’ ‘배려 깊은 사랑이 영재를 만든다’ 등 여러 권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최군의 어머니 신영일씨(40)에게 특별한 육아법이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아이 키우는 것을 자신 없어했다고 한다. 신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탁구를 치기 시작해 줄곧 선수생활을 했고 결혼 전까지 코치로 일했다. 그래서 탁구를 가르칠 순 있어도 아이의 지성을 키우는 데는 보탬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는 것. 남편 최씨가 서울대 조경학과와 환경대학원을 나왔지만 아이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엄마이기 때문에 적잖이 염려가 됐다고.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남편과 함께 육아서적을 읽고, 수시로 아이와 대화하는 연습을 해두었다고 한다.
최씨 부부는 푸름군이 백일이 될 즈음 ‘자연보다 좋은 스승은 없다’는 생각에 최씨의 고향인 경기도 파주로 이사를 했다. 아이를 강가에 데리고 나가 물고기를 잡으며 놀고 물고기 이름도 함께 외웠다고 한다. 산에 꽃이 피면 꽃을 보러 가고 책에서 꽃 이름을 찾아 일러주었다고. 자연에는 나무, 풀, 곤충 등 가르쳐야 할 것들이 넘쳐났고, 아이는 놀이처럼 사물을 배워갔다고 한다. 장난감 대신 책을 많이 사주었는데 최군은 입으로 빨고 물고 찢으면서 책과 친해졌다고.
“푸름이가 17개월 됐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줬어요. 밤 12시에라도 아이가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새벽 2시가 다 되도록 읽어줬죠. 아이가 책에 집중하느라 잠을 안 자면 푸름이 엄마가 제 뒤를 이어 새벽 6시까지 읽어주곤 했고요. 그때 푸름이는 밤낮이 바뀌어 있었거든요.”
생후 백일 무렵 교외로 이사해 자연과 친숙하게 하고, 17개월부터 책 읽어줘
부부는 책이 부모와 아이의 대화를 위한 좋은 매개체가 된다고 말한다. 아이와의 일상적인 대화는 몇 가지 단어로 한정되기 마련이지만 책은 정교하고 다양한 언어 표현을 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에 아이의 언어 능력을 발달시키는 자극제가 된다는 것. 그래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때는 지식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언어로 대화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부부는 책을 읽어줄 때마다 제목을 손으로 짚으면서 읽어 아이가 글씨에 친숙해지도록 했는데 책 한 권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주다 보니 최군이 생후 29개월 됐을 무렵 완전히 한글을 깨쳤다고 한다. 그 후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혼자서 엄청난 양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부부는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다. 유치원에 보낼 시간과 돈을 책 구입에 투자했다. 하루 종일 꼼짝 않고 책을 읽고, 코피가 터져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푸름군에게 책을 사주는 데 드는 비용이 한 달에 15만원이 훌쩍 넘었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책을 다 사주는 것이 부담스러워지자 부부는 아이를 서점에 데려가 마음껏 책을 읽게 했다.
그러나 최씨 부부는 “아이들은 책을 반복해서 읽고, 책 한 권의 지식을 흡수하는 데 때로는 1, 2년이 걸리기도 하므로 읽고 싶어하는 책은 되도록 사주는 게 좋다”고 말한다. 푸름군의 동생 초록군(14)만 해도 형이 읽은 책을 물려받기만 했는데 새 책이 생기니까 읽고 또 읽고, 잠잘 때마저 품에 안고 자더라는 것. 그 모습을 보면서 최씨 부부는 어릴 때는 책을 소유하는 것도 교육적인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최씨는 책을 사줄 때 아이의 관심 분야를 파악한 뒤 영역을 점점 넓혀가는 방법을 썼다. 아이가 개구리에 관심을 보이면 먼저 개구리의 종류가 나와 있는 책을 사고, 다음에는 양서류에 대한 책을 사고, 그 다음은 동물 전반에 관한 책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그렇게 방향을 정해서 책을 구입하면 단행본을 구입해도 나중에는 특정 분야의 전집이 생기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푸름군은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무려 2천여 권을 읽었다. 여러 번 반복해 읽은 것까지 따지면 1만 권 이상의 책을 읽은 셈이다. 최씨 부부의 독서지도법은 최대한 아이의 관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아이들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부모의 욕심에 따라 이리저리 몰아붙이거나 다른 아이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이들 부부는 남들이 하는 것이 아닌 내 아이만의 교육법을 찾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푸름이와 초록이는 형제여도 책 읽는 스타일이 아주 달라요. 푸름이는 방대한 양의 책을 쉬지 않고 읽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멈춰요. 제가 아무리 재미있고 쉬운 책으로 자극을 해도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요. 불안하고 답답하지만 그냥 기다리죠.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해요. 반면 초록이는 책을 꾸준히 읽는 편이에요. 그런 점에서 부모가 아이의 특성을 알고 기다려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책읽기의 즐거움에 빠져들게 해주세요”
요즘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영어, 수학, 피아노, 논술 등 각종 학원을 다니느라 바쁘다. 하지만 서울 휘경동에 사는 김민주(13)·소정(12)·승우(7) 남매네 집 풍경은 다른 집과는 사뭇 다르다. 집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책이 빽빽하게 들어찬 책장들과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민주와 소정이는 생후 46개월 때 사설기관에서 영재 판정을 받았다. 민주는 다섯 살 때 영어동화책을 줄줄 읽어 TV에 출연한 적이 있고, 지금도 교내외 글짓기 상을 독차지하고 있다. 논리력과 창의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소정이는 벌써부터 부산에 있는 영재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생후 26개월 때 TV 프로그램에 ‘공룡박사’로 출연한 적 있는 승우 또한 ‘수호지’ ‘초한지’ 등 중국 고전들을 이미 다 읽었다고 한다.
“책 속에 모든 길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니까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학원에 다니지 않으니까 학교 수업시간에 더 집중하게 돼 성적도 잘 나오는 것 같아요.”
아이들을 왜 학원에 보내지 않느냐는 질문에 엄마 유은정씨(42)는 이처럼 자신 있게 답한다. 덕분에 집에서 노는 시간이 많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책읽기의 즐거움에 빠져들었다고.
“민주를 임신했을 때 육아 관련 서적을 집중적으로 읽다가 ‘생후 36개월 이전까지는 모든 아이들이 천재’라는 이론을 접했어요. 그때 처음 ‘우리처럼 평범한 부부에게서도 천재가 나올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책을 통해 교육을 하게 됐어요.”
아이들이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많은 책을 읽어줬다는 유은정씨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책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도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한다. 집안을 어지럽힌다고 혼을 내지 않았고 책 읽고, 종이를 오리고 붙이는 놀이를 하도록 장려함으로써 사고력과 창의력을 키우도록 했다고.
유은정씨는 책을 싫어하는 아이를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바꾸려면 엄마의 관심과 노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말한다. 아이가 책을 읽어달라고 할 때는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달려올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 또한 무턱대고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강요해서는 안 되며 아이가 책에 관심 가질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많은 책을 읽어주는 것이 좋다는 게 유씨의 생각이다.
많은 엄마들은 아이가 글을 스스로 읽을 줄 알게 되면 책 읽어주기를 그만둔다. 하지만 책 읽는 소리를 많이 듣다 보면 집중력이 높아지기 때문에 ‘듣기’는 매우 중요한 학습방법이다.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책과 가까워질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따라서 유씨는 책읽기를 싫어하는 아이는 ‘책 듣기’부터 시작하게 하라고 조언한다.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아이가 집어드는 책으로 독서교육 시작
유은정씨는 또한 가정 내에 ‘독서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일단은 발에 밟히도록 거실이나 방에 책들을 깔아놓으라고 권한다. 아이들 방에 책을 보기 좋게 정리해놓는 것보다는 온 가족이 함께 있는 장소에 책을 두어 눈과 손에 항상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것. 또 특정한 책 한 권만 반복해서 읽는다고 억지로 다른 책을 읽도록 하는 것보다는, 읽고 싶은 만큼 실컷 반복해 읽게 내버려두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에게 전집을 한 질씩 사주는 게 좋은데 한 번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바로 찾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 읽은 책은 바로 처분하지 말고 3년 정도는 보관해놓는 게 좋다고.
그리고 독서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해주는 게 바람직하다. 민주네 집에서는 TV 시청과 컴퓨터 게임 등을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있다. 유은정씨는 민주와 소정이가 어릴 때 TV만화조차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독서를 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해요. 많은 엄마들이 이 학원, 저 학원 다 보내고 남는 시간에 책을 읽히려고 하는데 아이들도 쉬어야 하기 때문에 그게 잘 안돼요. 아이들은 기계가 아니잖아요.”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수많은 책 중 우리 아이에게 딱 맞는 책을 고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유은정씨는 아이의 연령보다는 아이가 그동안 읽어온 책의 수준을 파악해서 단계를 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연령별 권장도서는 개인차가 고려되지 않기 때문에 무턱대고 그것에 의존하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요. 같은 초등학교 1학년생이라도 평소 독서량이 많은 아이는 고학년 수준의 책읽기가 가능하지만 독서습관이 길러지지 않은 아이는 그림책부터 시작하는 게 좋아요. 그래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를 땐 아이를 서점이나 도서관에 데려가세요. 아이가 관심을 보이며 집어드는 책을 시작 단계로 잡으면 대체로 맞더라고요.”
많은 엄마들은 아이가 만화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유씨는 만화든 아니든 아이가 진심으로 관심을 보인다면 거기서부터 독서교육을 시작하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다만 같은 수준의 책을 여러 권씩 충분히 읽으면서도 조금씩 단계를 높여갈 수 있도록 책을 공급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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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광’ 두 아이 키우는 아빠, 출판평론가 표정훈
“먼저 책을 장난감으로 갖고 놀게 해보세요”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 성준이(10)와 여섯 살배기 딸 현진이의 아빠이자 출판평론가인 표정훈씨(39). 그는 1만 권 이상의 책을 모아온 애서광(愛書狂)답게 아이들과 늘 책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을 ‘직업 독서꾼’이라 일컫는 그는 자녀의 독서 지도에 있어서도 남다른 장기를 발휘한다. 그는 아이들의 손이 닿는 모든 곳에 책꽂이를 배치함으로써 두 자녀가 책과 쉽게 친숙해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일단 독서를 시작하는 어린아이에게는 ‘책은 놀이’라는 개념을 심어줘야 해요. ‘책은 지루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면, 책과 거리를 두려고 하거든요. 아이들이 책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책으로 도미노 놀이, 탑쌓기 놀이를 함께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책을 장난감 삼아 갖고 놀다 보면, 책 속의 내용도 궁금해하기 마련이거든요.”
표정훈씨는 “부모의 조급증이야말로 자녀에게 독약”이라고 강조한다. 자녀가 읽는 책의 수준이 또래에 비해 뒤떨어진다거나 책읽기를 싫어한다고 해서 부모가 조급하게 반응하면 아이에게 부담만 준다는 것. “부모는 자녀가 책읽기의 즐거움을 깨닫도록 환경을 조성해주고, 그 다음은 아이의 흥미와 감수성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표씨의 지론이다.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뒹굴며 자라온 성준이는 하루에 4, 5권의 책을 독파하는 독서광이다. 학원에 다니며 지식을 암기하는 데 급급한 또래 친구들과 달리, 성준이는 집에서 책과 씨름하며 궁금한 것들을 해결한다. 자연·사회·국어 과목의 경우 책을 통해 공부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로봇의 세계와 역사 이야기에 심취한 성준이는 과학잡지인 ‘어린이 과학동아’와 ‘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과학자가 될지 역사학자가 될지 고민’이라는 성준이는 책을 통해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중이다. 표정훈씨는 이처럼 아이가 특정 분야에 빠져 있더라도 심각하게 고민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아이들은 성장 단계에 따라 관심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성준이는 다섯 살 때 공룡을 무척 좋아해서 공룡의 종류, 크기, 습성 등을 줄줄 외웠거든요. 그때 공룡에 관한 책을 아이에게 참 많이 보여줬어요. 요즘은 성준이가 역사와 과학에 흥미를 붙여 그쪽 분야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아이가 어느 한 분야의 책에 푹 빠질 때, 부모는 걱정하기 쉽지요. ‘이러다가 한 분야에만 몰두하는 외골수가 되는 게 아닌가’ 하고요. 하지만 아이의 관심은 늘 바뀌기 마련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이가 한 분야의 책에 몰두할 때 더욱 빠져들게끔 북돋워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이에 따라 관심 분야 달라지므로 한 분야에 몰두해도 걱정할 필요 없어
책을 사랑하는 이들 부자의 대화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표씨는 아들이 무슨 책을 읽는지 관심을 갖고 그 내용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 슬쩍 물어보곤 한다. 아이의 관심사를 꾸준히 격려하고, 책의 내용에 관해 퀴즈를 냄으로써 복습효과까지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준이가 숙제를 하거나 TV를 보다가 모르는 것이 생겨 물어볼 때, 그는 아이가 책에서 답을 찾도록 노련하게 유도한다.
“성준이가 ‘○○을 모르겠다’고 물어보면, 특정한 책을 읽으라고 권합니다. 요즘은 부모가 초등학생 자녀의 질문에 다 대답해주기도 어렵잖아요. 그럴 때 ‘책 속에 모든 답이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책에 흥미를 느낍니다. 저는 아이들과 함께 ‘TV 동물농장’을 보면서 옛날에 읽었던 동물도감을 꺼내 궁금한 동물 이야기를 다시 찾아봅니다. 언젠가는 성준이가 인쇄기술 이야기를 다룬 역사 만화를 읽다가 제게 구텐베르크에 대해 묻기에 ‘둘리와 함께 떠나는 박물관 여행’이라는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 책은 근대 활판인쇄술의 발명자인 구텐베르크와 박물관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고 있거든요. 성준이는 두 책을 함께 읽음으로써 인쇄기술에 대한 지식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출판평론가인 아버지와 출판사에서 근무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성준이와 현진이는 독서광이 될 만한 유전자와 환경을 두루 타고났다. 하지만 표정훈씨는 “문맹인 부모라도 자녀에게 얼마든지 좋은 독서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책과 책읽기를 소중히 여기는 부모의 자세만으로도 아이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
“책을 사거나 책 속에서 답을 찾는 것이 ‘즐거운 일’임을 자녀에게 알려주세요. 그것만으로도 아이는 책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평소 부모가 꾸준히 책 읽는 모습을 보이면, 자녀는 저절로 부모의 습관을 따릅니다.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서점에 자주 데려가세요. 가족 나들이 코스에 서점을 늘 끼워넣으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책과 가까워집니다. 서점에 들를 때 장난감도 함께 사주면 더 좋고요. 아이는 ‘서점에 가면 신나는 일이 생긴다’고 여기게 돼 책과 저절로 친해집니다.”
자녀의 독서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는 데 시리즈물은 훌륭한 미끼가 된다. 표정훈씨는 성준이에게 여러 권으로 된 시리즈물을 한꺼번에 사주지 않고, 한두 권씩 사서 읽혔다. 이 과정을 통해 아이는 책을 모으는 일이 즐겁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또 한권 한권 읽어나가다가 시리즈물 전체를 통독했을 때 아이는 큰 성취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5, 6세 유아에게는 여러 권의 얇은 그림책을 돌아가면서 반복적으로 읽혀야”
자녀가 독서에 흥미를 갖고 있어도, ‘아이가 균형 있는 독서를 하도록 어떻게 지도할 것이냐’는 여전히 부모의 고민거리다. 요즘 그림 위주의 책이나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책이 범람하면서 학생들은 긴 호흡의 글을 읽는 것을 기피한다. 만화만 읽으려 하는 자녀에게 부모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만화라고 해서 무조건 못 읽게 하면 아이는 독서에 대한 좌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책은 재밌다’는 생각을 계속 갖게 하려면 자녀의 독서 욕구를 막지 말아야죠. 다만 부모는 만화 외에도 다른 종류의 흥미로운 책이 많다는 것을 자녀에게 꾸준히 알려줘야 합니다. 성준이도 만화에만 푹 빠진 시기가 있었지만 만화를 두 권 볼 때마다 글과 약간의 삽화로 이뤄진 책을 한 권 보기로 약속하고 이를 실천케 했습니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에 대한 만화를 보고 난 다음에는 만화가 아닌 세종대왕 위인전을 읽게 한 것이죠. 이때 백과사전을 찾아보게 한 것도 큰 도움이 됐어요.
성준이가 읽는 책을 살펴보면, 반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고 나머지 반은 저와 아내가 추천한 것입니다. 아이 엄마는 주로 성준이에게 세계 명작을 읽도록 추천하는 편입니다. 만약 아이가 ‘죽어도 만화만 읽겠다’고 고집한다면 그냥 내버려두세요. 어떤 책도 읽지 않는 것보다는 여러 종류의 만화를 읽는 것이 낫거든요.”
자녀에게 책을 가까이하는 습관이 몸에 뱄다면, 부모는 아이의 독서 능력에 따라 좀 더 ‘도전적인 과제’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자녀의 경우 책읽기에 흥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면, 고학년은 긴 내러티브(이야기)의 책을 읽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스토리 자체에 빠져 두꺼운 책을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독서 능력이기 때문. 긴 글을 소화할 수 있어야 아이는 중·고교에 진학해서도 학습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성준이는 유아기용 책에서 창비의 ‘재미있다!우리 고전’ 시리즈로 넘어갔는데, 책을 읽고 엄마랑 한두 마디라도 나눈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된 듯합니다.
요즘은 성준이가 중학생 권장도서인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를 가장 재밌게 읽었다고 해요. 열한 마리 토끼가 고향마을을 탈출해 새로운 이상향을 찾아가는 모험 이야기인데, 책이 무려 4권으로 이뤄져 있죠. 아이가 긴 스토리의 맛을 알게 된 데는 엄마의 역할이 컸습니다. 엄마가 책을 먼저 읽고 대강의 줄거리를 이야기해주면서 아이의 흥미를 유발한 거죠. 지금은 아이가 먼저 아내와 저에게 책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합니다.”
그는 ‘지식 전달 및 학습을 위주로 하는 책과 감성을 중시하는 책(명작동화류)을 아이에게 반반씩 읽히자’는 원칙을 갖고 있다. 아이의 지능과 감성을 고루 발달시키기 위해서다. 그는 인터넷 서점의 ‘어린이 도서’란이나 신문의 ‘북 섹션’을 적극 활용해 아이에게 좋은 책을 골라주는 데도 만전을 기한다.
표정훈씨는 미취학 아동인 딸 현진이를 위해서도 ‘눈높이 독서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성준이와 달리 현진이는 삽화가 많은 그림책을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라고. 그는 딸과 함께 그림책을 읽으며 즐겁게 대화한다.
“5, 6세 된 아이가 독서에 흥미를 느끼려면 얇은 책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책을 다 읽었다는 성취감을 자주 맛보게 하기 위해서죠. 아이들은 좋아하는 것을 반복하는 습성이 있으므로 여러 권의 얇은 책을 돌아가며 계속 읽히세요.
아이는 어른보다 집중력이 뛰어나 무엇이든 잘 암기합니다. 그렇게 반복해서 읽은 책의 내용을 외우는 것도 아이의 사고력 개발에 도움이 됩니다. 어른들은 책 속 활자의 의미만 습득하지만, 아이는 어디서 어떻게 책을 읽었는지 상황 자체를 기억하고 있어요. 부모와 책을 읽는 분위기 자체가 아이의 지능 및 정서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거죠. ‘책을 읽은 후 아이가 꼭 독후감을 써야 하느냐’고 묻는 부모님이 있는데, 독후감 쓰기를 억지로 강요하면 역효과가 납니다. 아이가 긴 글을 쓰는 데 어려움을 호소한다면, 먼저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나 기억에 남는 부분에 대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눠보세요. 부모와 아이가 같은 책을 읽고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공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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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2천 권 독파한 ‘독서 영재’ 푸름이 부모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때는 대화한다고 생각하세요”
최푸름군(16)은 워낙 박학다식해서 친구들로부터 ‘인터넷 지식 검색보다 빠르고 정확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생후 29개월 때 한글을 떼고 책 읽는 것을 노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는 최군은 다섯 살 때 속독을 시작해 여섯 살에 영재 판정을 받았다.
“책읽기가 생활화됐어요. 제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네 가지가 있는데, 바로 의(衣)식(食)주(住)서(書)예요.”
푸름군이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자신의 재능을 키워가는 것을 지켜보는 아버지 최희수씨(44)는 이 행복을 다른 많은 부모도 맛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2001년 독서 영재교육 사이트 ‘푸름이닷컴(www.prumi.com)’을 열었다. 또 최군을 키우며 깨닫게 된 독서교육의 중요성을 담아 ‘푸름이 이렇게 영재로 키웠다’ ‘아빠와 함께 책을’ ‘배려 깊은 사랑이 영재를 만든다’ 등 여러 권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최군의 어머니 신영일씨(40)에게 특별한 육아법이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아이 키우는 것을 자신 없어했다고 한다. 신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탁구를 치기 시작해 줄곧 선수생활을 했고 결혼 전까지 코치로 일했다. 그래서 탁구를 가르칠 순 있어도 아이의 지성을 키우는 데는 보탬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는 것. 남편 최씨가 서울대 조경학과와 환경대학원을 나왔지만 아이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엄마이기 때문에 적잖이 염려가 됐다고.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남편과 함께 육아서적을 읽고, 수시로 아이와 대화하는 연습을 해두었다고 한다.
최씨 부부는 푸름군이 백일이 될 즈음 ‘자연보다 좋은 스승은 없다’는 생각에 최씨의 고향인 경기도 파주로 이사를 했다. 아이를 강가에 데리고 나가 물고기를 잡으며 놀고 물고기 이름도 함께 외웠다고 한다. 산에 꽃이 피면 꽃을 보러 가고 책에서 꽃 이름을 찾아 일러주었다고. 자연에는 나무, 풀, 곤충 등 가르쳐야 할 것들이 넘쳐났고, 아이는 놀이처럼 사물을 배워갔다고 한다. 장난감 대신 책을 많이 사주었는데 최군은 입으로 빨고 물고 찢으면서 책과 친해졌다고.
“푸름이가 17개월 됐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줬어요. 밤 12시에라도 아이가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새벽 2시가 다 되도록 읽어줬죠. 아이가 책에 집중하느라 잠을 안 자면 푸름이 엄마가 제 뒤를 이어 새벽 6시까지 읽어주곤 했고요. 그때 푸름이는 밤낮이 바뀌어 있었거든요.”
생후 백일 무렵 교외로 이사해 자연과 친숙하게 하고, 17개월부터 책 읽어줘
부부는 책이 부모와 아이의 대화를 위한 좋은 매개체가 된다고 말한다. 아이와의 일상적인 대화는 몇 가지 단어로 한정되기 마련이지만 책은 정교하고 다양한 언어 표현을 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에 아이의 언어 능력을 발달시키는 자극제가 된다는 것. 그래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때는 지식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언어로 대화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부부는 책을 읽어줄 때마다 제목을 손으로 짚으면서 읽어 아이가 글씨에 친숙해지도록 했는데 책 한 권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주다 보니 최군이 생후 29개월 됐을 무렵 완전히 한글을 깨쳤다고 한다. 그 후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혼자서 엄청난 양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부부는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다. 유치원에 보낼 시간과 돈을 책 구입에 투자했다. 하루 종일 꼼짝 않고 책을 읽고, 코피가 터져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푸름군에게 책을 사주는 데 드는 비용이 한 달에 15만원이 훌쩍 넘었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책을 다 사주는 것이 부담스러워지자 부부는 아이를 서점에 데려가 마음껏 책을 읽게 했다.
그러나 최씨 부부는 “아이들은 책을 반복해서 읽고, 책 한 권의 지식을 흡수하는 데 때로는 1, 2년이 걸리기도 하므로 읽고 싶어하는 책은 되도록 사주는 게 좋다”고 말한다. 푸름군의 동생 초록군(14)만 해도 형이 읽은 책을 물려받기만 했는데 새 책이 생기니까 읽고 또 읽고, 잠잘 때마저 품에 안고 자더라는 것. 그 모습을 보면서 최씨 부부는 어릴 때는 책을 소유하는 것도 교육적인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최씨는 책을 사줄 때 아이의 관심 분야를 파악한 뒤 영역을 점점 넓혀가는 방법을 썼다. 아이가 개구리에 관심을 보이면 먼저 개구리의 종류가 나와 있는 책을 사고, 다음에는 양서류에 대한 책을 사고, 그 다음은 동물 전반에 관한 책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그렇게 방향을 정해서 책을 구입하면 단행본을 구입해도 나중에는 특정 분야의 전집이 생기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푸름군은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무려 2천여 권을 읽었다. 여러 번 반복해 읽은 것까지 따지면 1만 권 이상의 책을 읽은 셈이다. 최씨 부부의 독서지도법은 최대한 아이의 관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아이들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부모의 욕심에 따라 이리저리 몰아붙이거나 다른 아이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이들 부부는 남들이 하는 것이 아닌 내 아이만의 교육법을 찾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푸름이와 초록이는 형제여도 책 읽는 스타일이 아주 달라요. 푸름이는 방대한 양의 책을 쉬지 않고 읽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멈춰요. 제가 아무리 재미있고 쉬운 책으로 자극을 해도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요. 불안하고 답답하지만 그냥 기다리죠.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해요. 반면 초록이는 책을 꾸준히 읽는 편이에요. 그런 점에서 부모가 아이의 특성을 알고 기다려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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