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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와인과 춤 | 돈시칠리아섬의 바람과 태양이 만든 찬란한 맛, 돈나푸가타 세라자데 2019

이찬주 무용평론가

2025. 11. 21

무심코 바라본 와인 라벨 속 춤.
전 세계 와인과 그에 얽힌 춤 이야기를 연재한다.

시칠리아섬의 와이너리 돈나푸가타(Donnafugata)는 토착 품종인 네로 다볼라(Nero d’Avola)로 와인을 만든다. 돈나푸가타의 대표 와인인 ‘세라자데(Sherazade)’는 2006년 처음 선보일 당시 100% 네로 다볼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시라즈와 반반 섞은 블렌딩 와인으로 생산되고 있다. 

세라자데는 ‘셰에라자드’로 알려진, ‘아라비안나이트(천일 야화)’에 등장하는 왕비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와인 라벨에는 얇은 보랏빛 드레스 위에 금장의 붉은색 가운을 겹쳐 입은, 검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마치 무용을 하듯 한 팔을 우아하게 들어 올리고 다른 한 손엔 와인 잔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여인은 19세기 나폴리와 시칠리아왕국 페르디난트 1세의 왕비이자 오스트리아 여대공이었던 마리아 카롤리나(1752~1814)를 모티프로 그렸다고 한다. 

20세기 초 발레의 혁신을 이끈 댜길레프의 발레단 ‘발레뤼스’는 셰에라자드가 술탄 샤리아르왕에게 들려준 첫 번째 이야기를 토대로 40분짜리 단막 ‘셰에라자드’를 만들었다. 줄거리는 술탄 샤리아르의 총애를 받았던 여인 소베이다가 어리석음 때문에 환락에 빠져 죽음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어느 날 술탄의 동생 샤크헤즈만이 소베이다를 시험해보자고 제안하자 왕은 멀리 사냥 가는 척하며 왕궁을 떠난다. 그러자 소베이다는 곧장 노예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함께 춤을 추며 환락의 시간을 보낸다. 왕궁으로 돌아온 왕은 소베이다의 행실에 크게 분노하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노예를 죽여버린다.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노예들이 죽임을 당하자 괴로워하던 소베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세라자데 2019’ 와인(왼쪽). 조르주 바비에가 1912년 발레리노 니진스키를 모델로 그린 ‘셰에라자드’.

‘세라자데 2019’ 와인(왼쪽). 조르주 바비에가 1912년 발레리노 니진스키를 모델로 그린 ‘셰에라자드’.

미하일 포킨의 발레, 김연아의 피겨로 부활한
‘셰에라자드’ 

안무가 미하일 포킨(1880~1942)은 러시아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의 곡을 바탕으로 ‘셰에라자드’를 제작했다. 특히 단순하지만 호소력 짙은 선율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3악장은 무용음악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선율은 2008년 김연아 선수가 선보인 피겨 프로그램 ‘셰에라자드’를 통해 우리에게 더욱 친숙해졌다.   

발레뤼스의 ‘셰에라자드’는 1910년 파리 그랜드오페라 양식으로 초연할 때부터 혁신적인 무대장치와 의상으로 화제를 모았다. 20세기 초 유럽 무대예술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고 평가받는 레온 박스트(1866~1924)는 진주와 술로 장식한 아라비아풍 의상과 스카프를 터번처럼 둘러 묶고 스프링같이 튀어 오르는 줄에 진주를 다는 등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의상과 장신구 디자인은 까르띠에 장신구 제작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뿐만 아니라 패션 디자이너 폴 푸아레(1879~1944)는 아예 자신의 브랜드 테마를 오리엔탈리즘으로 바꿀 정도였다.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던 셰에라자드 이야기는 이제 돈나푸가타의 와인에 녹아들어 있다. 블랙체리, 블랙베리, 말린 자두에 바닐라와 헤이즐넛 오크, 삼나무, 허브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독특한 풍미. 마치 ‘천일 야화’의 1001가지 이야기만큼이나 다채롭고 매혹적이다. 세라자데를 한 모금 머금은 순간, 시칠리아의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마리아 카롤리나의 실루엣이, 황금빛 물결을 일으키며 무대를 수놓는 무용수들의 찬란한 몸짓이 눈앞에 펼쳐질지도 모른다. 지중해의 향을 담은 이 와인은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고, 꿈결처럼 선명한 예술의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세라자데2019 #와인

사진제공 이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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