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미감을 끌어올리는 공간을 찾아갑니다. 트렌드는 물론 고유성과 정체성을 갖춘 디자인부터 음식, 공간 속 숨은 이야기까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보고, 듣고, 먹는 특별함을 선사합니다.
젊음과 활기가 번지는 서울 한남동 지하에 자리 잡은 서점 ‘블루도어북스’는 적막을 넘어 고요함이 흐른다. 책장과 바닥에 켜켜이 쌓인 책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독서를 하고, 누군가는 사색을 즐기거나 휴식을 취한다. 조용한 침묵 속에서 자유롭게 각자의 행위를 할 수 있는 이곳은 머무는 이의 의식을 고양하는 힘이 있다.
블루도어북스의 시작은 서울역 근처 4층 건물의 꼭대기 층에 위치한 도하서림이다. 책, 그림, 음악까지 온전히 김진우 대표의 취향으로 채워졌던 이곳은 감도 높은 공간으로 입소문을 타며 마니아층을 구축했다. 좀 더 많은 이의 취향을 반영하고 공간을 공유하고 싶었던 그는 수많은 고민 끝에 한남동에 도하서림 확장판인 블루도어북스의 문을 열었다.
블루도어북스는 사전 예약으로 입장권을 구매한 뒤 2시간 동안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 소설, 예술, 철학, 그림책 등 다양한 장르의 도서와 그림, 음악 감상은 물론 편지를 쓰거나 피곤하면 잠시 잠을 청해도 좋다. 공간을 은은하게 비추는 조명과 인센스, 조용한 음악 소리가 각자의 세계로 몰입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블루도어북스의 김진우 대표는 책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가구도 만들고, 옷도 예쁘게 입는 다재다능한 청년이다. 책을 통해 진정한 ‘나’를 찾고 ‘나’다운 삶을 살게 됐다는 그는 “책을 매개로 한 공간을 통해 많은 사람이 숨어 있던 동심을 발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진우 대표는 손님들의 작은 불평불만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찾아온 손님들의 눈빛, 표정, 손짓 등을 주시하며 불편한 점이 보이면 조용히 다가가 해결해준다. 소중한 시간과 돈을 들여 찾아온 공간에서 최대한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 김진우 대표에게 지난 수년간의 발자취와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물었다.
블루도어북스를 오픈하기 전 다양한 일을 했다고요.
다니던 대학의 패션학과를 자퇴하고 우산을 만들어 판매했어요. 그 후 편찮으신 부모님을 대신해 경기도 안성에서 조그마한 식당을 운영했죠.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거의 책 속에 파묻혀 살았어요. 그러다 그간 읽었던 수많은 책을 어딘가에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에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 블로그에 읽은 책을 기록하는 것은 꽤 즐거웠어요. 빈 박스 안에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느낌이었거든요. 2년간 꾸준히 콘텐츠를 업로드하니 블로그를 찾는 사람도 점점 늘었어요. 특히 책 관련 콘텐츠를 좋아해주는 분들이 많았는데, 일부는 제가 소개한 책을 구매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온라인 서점을 열어 책을 판매하고 포장, 발송까지 했죠. 제가 쓴 것은 아니지만 책이 팔릴 때마다 너무 기쁘고 보람 있더라고요. 식당을 하면서 지쳐 있던 몸과 마음에 엔도르핀이 솟구쳤죠. 또 책을 통해 누군가와 소통한다는 그 자체가 행복하게 느껴졌어요.
블로그에서 시작한 온라인 서점이 도하서림으로 이어진 거네요.
식당과 온라인 서점을 함께 운영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어요. 또 당시 집은 책방이나 다름없었어요. 구입하고, 판매해야 할 책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거든요. 집을 더 이상 이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재고 창고 겸 작업실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알아봤습니다. 그러다 서울역 근처에 괜찮은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둘러보며 여기서는 무조건 서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벽 한쪽으로 크게 난 창문과 아치형 천장, 오래된 공간 특유의 아늑함과 고요함이 제가 꿈꿔왔던 서점의 이미지와 비슷했거든요. 사실 그동안 ‘언젠가 서점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공간을 둘러보면서 ‘언젠가’가 ‘지금’이라는 확신을 가졌죠. 그렇게 첫 번째 서점인 도하서림이 탄생했습니다.
오픈하고 약 2년 후 도하서림은 ‘블루도어북스’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했어요.
도하서림은 온전히 제 삶을 이루고 있는 책과 음악, 그림을 연결한 공간이에요. ‘해리 포터’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등 실제 읽어본 책과 직접 그린 그림 등을 비치해놓았죠. 도하서림은 혼자 운영했었어요. 그러다 보니 공간 자체가 저라는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다는 느낌이 들었죠. 이대로 방치하면 저와 도하서림 모두 하나의 틀에 갇혀 도태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기더라고요. 저는 장사하는 사람이잖아요. 가장 중요한 건 고객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거고요. 고객의 다양함을 품고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정말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그러기 위해선 장소와 명칭 등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한남동에 ‘블루도어북스’를 열게 됐죠.
책은 언제부터 좋아했나요.
수능을 마친 후부터요. 수능을 마치고 친구들이랑 교실 뒤쪽에서 시끄럽게 말뚝박기 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저희 반 1등은 교실 앞쪽에 앉아 ‘위대한 패배자’라는 책을 읽고 있는 거예요. 혼자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모습이 충격적이기도 하면서 부러웠죠. 순간 ‘나도 누군가에게 저런 모습으로 비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수많은 책을 읽고 여러 감정을 접하면서 저는 생각보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진짜 제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거죠. 책을 통해 진정한 저 자신을 찾았고, 정신적으로 많이 성장했어요. 책에서 받은 은혜가 정말 커요.
독서량이 얼마 정도 되나요.
저는 책을 천천히 읽는 편이에요. 많이, 빨리 읽는 것에 집착하지 않죠. 딱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처음에는 뭘 읽어야 할지 몰라서 베스트셀러를 선택했어요. 그 후로는 시기마다 필요한 책들을 찾아 읽습니다. 사업에 대한 조언이 필요하면 경영 관련 책을, 몽글몽글한 감정을 느끼고 싶은 날엔 시집이나 소설책을 읽어요. 독서량보다는 지식과 마음을 충전할 수 있는 책을 깊이 있게 읽는 것에 집중하고 있어요.
블루도어북스에는 어떤 책들이 진열돼 있나요.
블루도어북스 멤버들이 직접 읽고 감동받은 도서부터 작가들이 직접 큐레이팅한 책 그리고 우주, 미술, 소설, 에세이, 그림책 등 다양한 도서들로 채워져 있어요. ‘해리 포터’ 팝업 북과 스튜디오 지브리의 절판 도서 등 구매하기 부담스러운 책들도 구비돼 있고요. 어린아이부터 중장년층까지 모든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도서가 큐레이팅돼 있습니다.
이곳만의 오리지널 콘텐츠가 있다면요.
블루도어북스 멤버들이 직접 제작한 그림책과 잡문집들이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글’이라는 콘텐츠로 서점 구석구석에 숨겨놓았어요. 손님들이 보물찾기하듯 노트를 발견하는 재미를 느껴보길 바라거든요. 또 공간 한편에는 오일 파스텔과 스탬프, 엽서 등을 비치해두었어요. 당시의 생각과 감정들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즐거움을 만끽했으면 하는 마음으로요.
제각각인 책장과 테이블, 의자 등을 공간 곳곳에 자유롭게 배치해놓았어요.
각각의 아이템은 제 취향에 따라 선별했지만, 배치는 정말 신중하게 했어요. 책을 볼 때 다른 손님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을 위치와 높이를 찾기 위해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했거든요. 그러기 위해선 의자와 테이블 등을 엇갈려 배치할 수밖에 없었죠. 덕분에 공간 자체가 자유로운 느낌을 풍기는 것 같아요.
재즈, 발라드, J-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흘러나와요. 플레이리스트는 직접 짜나요.
음악 선정은 거의 직접 하고 있어요. 저는 라디오를 정말 많이 들어요. ‘배철수의 음악캠프’ ‘푸른밤, 옥상달빛입니다’ ‘김현철의 골든디스크’ 등의 애청자죠. 라디오마다 추구하는 음악의 장르가 다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많은 음악을 접하게 되는 것 같아요. 라디오를 듣다가 좋은 노래가 흘러나오면 메모해둬요. 그리고 블루도어북스에 어울리는 음악인지 판단합니다. 적합하다고 생각하면 플레이리스트에 올리고요. 음악은 제가 정말 신중하게 고민하는 부분이에요. 계절이나 분위기에 어울리는 곡을 매일 다르게 선정해야 하니까요.
입장, 퇴장할 때의 곡을 따로 지정해둔다고요.
음악은 블루도어북스의 정체성을 알려주기 위한 도구입니다. 음악의 흐름이 그 공간만의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믿거든요. 때문에 입장곡, 본곡, 퇴장곡을 따로 리스트업해두죠. 입장할 때는 조금 리듬감이 있는 음악을 틀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노랫소리를 줄여요. 그리고 본곡 첫 번째 플레이리스트가 흐를 때 인센스를 켭니다. 퇴장할 때는 여운이 남길 바라는 마음에 보통 부드럽고 따뜻한 음악을 틀어요. 음악의 흐름을 통해 ‘블루도어북스는 이런 곳’이라는 걸 이야기해주는 거죠.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은 직접 그리신 거라고요. 그림 앞에는 헤드폰과 메모장이 놓여 있네요.
취미 삼아 그린 그림을 전시해두었어요. 헤드폰에서는 그림을 그릴 때 들었던 음악이 흘러나와요. 메모장에는 그림을 그리며 떠오른 생각들이 적혀 있고요. 손님들이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텍스트를 읽은 뒤 그림 감상을 했으면 하거든요. 그러면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제 감성과 맞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림은 만져봐도 됩니다. 그림보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더 존중받아야 하니까요. 대신 손톱으로 긁지는 말아주세요(웃음).
책장 한편에는 제목이 안 보이게 책을 뒤로 꽂아놓았어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고본들이에요. 워낙 유명한 도서라 제목이 보이면 손님들이 관성적으로 익숙한 작품만 꺼내 볼 것 같아 일부러 책을 뒤로 꽂아놓았어요. 무작위로 짚은 책은 어쩌면 자신과 만나야 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김규림 작가가 큐레이팅한 책을 잠깐 읽어봤는데, 밑줄과 귀 접힘 흔적이 남아 있네요.
김규림 작가가 실제 읽은 책을 그대로 가져다 놓았거든요. 저는 밑줄, 귀 접힘, 얼룩 등의 흔적이 그 도서를 유일하게 만들어주는 수단이라고 여겨요. 흔적들을 보며 ‘이 사람은 이런 부분에서 감명을 받았구나’ 생각해볼 수도 있고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손때 묻히며 읽은 책을 본다는 것은 행운이나 다름없잖아요.
새 책만 있는 건 아니군요.
새 책은 물론 중고 도서도 진열돼 있어요.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은 블루도어북스 멤버들이 읽고 추천하는 책들이에요. 저는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해당 페이지에 적어놓거나 좋은 문장에는 밑줄을 그어요. 아무리 유명한 책이라도 저를 끌어당기는 문장이나 문구를 발견하지 못하면 결국 중간에 덮어버리게 되는 것 같아요. 손님들이 책 속 밑줄이나 글귀를 길라잡이 삼아 가슴을 뛰게 하는 문장들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주로 밀도가 높고 어려운 책들이 큐레이팅된 것 같아요.
난도 높은 책들의 임팩트가 세서 그런 것 같아요. 자세히 보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림책도 정말 많습니다. 블루도어북스에는 아이 손님도 많이 와요. 그림책을 바닥에 잔뜩 쌓아놓고 보죠. “아이들이 시끄럽진 않냐”고 물어보시는 분들도 있는데, 대부분 생각보다 조용하고 차분합니다. 블루도어북스는 오로지 독서를 위한 공간이 아니에요. 그림을 그리거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음악과 그림 감상을 위해 이곳을 찾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독서 외에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보고 즐길 수 있는 놀이공원인 거죠.
모두의 놀이공간인 블루도어북스에서는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서점이라는 정체성은 유지하되 요가 수업, 유화 클래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채워질 거예요. 블루도어북스는 길 가다가 힘들 때 물 한잔 얻어 마실 수 있는 편하고 따뜻한 공간이 됐으면 해요. 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다시 오고, 부모가 됐을 때는 아이와 함께 올 수 있는 ‘집’과 같은 장소로 다가갔으면 합니다.
‘여성동아’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과 음악이 있다면요.
음악은 케이트 블룸의 ‘come here’, 책은 조르주 바타유가 쓴 ‘에드와르다 부인, 죽은 자, 눈 이야기’와 킨스키의 ‘내게 필요한 건 사랑뿐’이요. 음악과 책 모두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 나왔던 콘텐츠예요. 며칠 전 ‘비포 선라이즈’를 정말 감명 깊게 봤어요.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청춘과 그들의 발길을 따라 펼쳐지는 풍경에 깊은 감동을 받았거든요. 아직까지도 그 여운이 남아 있어요. 영화 속 장면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가슴이 몽글몽글해지거든요. 샤워 후 케이트 블룸의 ‘come here’를 들으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기차 안에서 읽었던 책을 읽으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맥주까지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겠죠!
#블루도어북스 #서점 #북카페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젊음과 활기가 번지는 서울 한남동 지하에 자리 잡은 서점 ‘블루도어북스’는 적막을 넘어 고요함이 흐른다. 책장과 바닥에 켜켜이 쌓인 책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독서를 하고, 누군가는 사색을 즐기거나 휴식을 취한다. 조용한 침묵 속에서 자유롭게 각자의 행위를 할 수 있는 이곳은 머무는 이의 의식을 고양하는 힘이 있다.
블루도어북스의 시작은 서울역 근처 4층 건물의 꼭대기 층에 위치한 도하서림이다. 책, 그림, 음악까지 온전히 김진우 대표의 취향으로 채워졌던 이곳은 감도 높은 공간으로 입소문을 타며 마니아층을 구축했다. 좀 더 많은 이의 취향을 반영하고 공간을 공유하고 싶었던 그는 수많은 고민 끝에 한남동에 도하서림 확장판인 블루도어북스의 문을 열었다.
블루도어북스는 사전 예약으로 입장권을 구매한 뒤 2시간 동안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 소설, 예술, 철학, 그림책 등 다양한 장르의 도서와 그림, 음악 감상은 물론 편지를 쓰거나 피곤하면 잠시 잠을 청해도 좋다. 공간을 은은하게 비추는 조명과 인센스, 조용한 음악 소리가 각자의 세계로 몰입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블루도어북스의 김진우 대표는 책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가구도 만들고, 옷도 예쁘게 입는 다재다능한 청년이다. 책을 통해 진정한 ‘나’를 찾고 ‘나’다운 삶을 살게 됐다는 그는 “책을 매개로 한 공간을 통해 많은 사람이 숨어 있던 동심을 발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진우 대표는 손님들의 작은 불평불만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찾아온 손님들의 눈빛, 표정, 손짓 등을 주시하며 불편한 점이 보이면 조용히 다가가 해결해준다. 소중한 시간과 돈을 들여 찾아온 공간에서 최대한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 김진우 대표에게 지난 수년간의 발자취와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물었다.
블루도어북스 김진우 대표.
다니던 대학의 패션학과를 자퇴하고 우산을 만들어 판매했어요. 그 후 편찮으신 부모님을 대신해 경기도 안성에서 조그마한 식당을 운영했죠.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거의 책 속에 파묻혀 살았어요. 그러다 그간 읽었던 수많은 책을 어딘가에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에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 블로그에 읽은 책을 기록하는 것은 꽤 즐거웠어요. 빈 박스 안에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느낌이었거든요. 2년간 꾸준히 콘텐츠를 업로드하니 블로그를 찾는 사람도 점점 늘었어요. 특히 책 관련 콘텐츠를 좋아해주는 분들이 많았는데, 일부는 제가 소개한 책을 구매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온라인 서점을 열어 책을 판매하고 포장, 발송까지 했죠. 제가 쓴 것은 아니지만 책이 팔릴 때마다 너무 기쁘고 보람 있더라고요. 식당을 하면서 지쳐 있던 몸과 마음에 엔도르핀이 솟구쳤죠. 또 책을 통해 누군가와 소통한다는 그 자체가 행복하게 느껴졌어요.
블로그에서 시작한 온라인 서점이 도하서림으로 이어진 거네요.
식당과 온라인 서점을 함께 운영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어요. 또 당시 집은 책방이나 다름없었어요. 구입하고, 판매해야 할 책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거든요. 집을 더 이상 이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재고 창고 겸 작업실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알아봤습니다. 그러다 서울역 근처에 괜찮은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둘러보며 여기서는 무조건 서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벽 한쪽으로 크게 난 창문과 아치형 천장, 오래된 공간 특유의 아늑함과 고요함이 제가 꿈꿔왔던 서점의 이미지와 비슷했거든요. 사실 그동안 ‘언젠가 서점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공간을 둘러보면서 ‘언젠가’가 ‘지금’이라는 확신을 가졌죠. 그렇게 첫 번째 서점인 도하서림이 탄생했습니다.
오픈하고 약 2년 후 도하서림은 ‘블루도어북스’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했어요.
도하서림은 온전히 제 삶을 이루고 있는 책과 음악, 그림을 연결한 공간이에요. ‘해리 포터’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등 실제 읽어본 책과 직접 그린 그림 등을 비치해놓았죠. 도하서림은 혼자 운영했었어요. 그러다 보니 공간 자체가 저라는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다는 느낌이 들었죠. 이대로 방치하면 저와 도하서림 모두 하나의 틀에 갇혀 도태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기더라고요. 저는 장사하는 사람이잖아요. 가장 중요한 건 고객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거고요. 고객의 다양함을 품고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정말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그러기 위해선 장소와 명칭 등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한남동에 ‘블루도어북스’를 열게 됐죠.
책은 언제부터 좋아했나요.
수능을 마친 후부터요. 수능을 마치고 친구들이랑 교실 뒤쪽에서 시끄럽게 말뚝박기 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저희 반 1등은 교실 앞쪽에 앉아 ‘위대한 패배자’라는 책을 읽고 있는 거예요. 혼자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모습이 충격적이기도 하면서 부러웠죠. 순간 ‘나도 누군가에게 저런 모습으로 비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수많은 책을 읽고 여러 감정을 접하면서 저는 생각보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진짜 제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거죠. 책을 통해 진정한 저 자신을 찾았고, 정신적으로 많이 성장했어요. 책에서 받은 은혜가 정말 커요.
독서량이 얼마 정도 되나요.
저는 책을 천천히 읽는 편이에요. 많이, 빨리 읽는 것에 집착하지 않죠. 딱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처음에는 뭘 읽어야 할지 몰라서 베스트셀러를 선택했어요. 그 후로는 시기마다 필요한 책들을 찾아 읽습니다. 사업에 대한 조언이 필요하면 경영 관련 책을, 몽글몽글한 감정을 느끼고 싶은 날엔 시집이나 소설책을 읽어요. 독서량보다는 지식과 마음을 충전할 수 있는 책을 깊이 있게 읽는 것에 집중하고 있어요.
잊고 지낸 ‘동심’을 만날 수 있는 놀이공원
방명록 작성, 오일 파스텔로 그림 그리기 등 독서 외에 즐길거리가 풍성한 블루도어북스.
블루도어북스 멤버들이 직접 읽고 감동받은 도서부터 작가들이 직접 큐레이팅한 책 그리고 우주, 미술, 소설, 에세이, 그림책 등 다양한 도서들로 채워져 있어요. ‘해리 포터’ 팝업 북과 스튜디오 지브리의 절판 도서 등 구매하기 부담스러운 책들도 구비돼 있고요. 어린아이부터 중장년층까지 모든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도서가 큐레이팅돼 있습니다.
이곳만의 오리지널 콘텐츠가 있다면요.
블루도어북스 멤버들이 직접 제작한 그림책과 잡문집들이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글’이라는 콘텐츠로 서점 구석구석에 숨겨놓았어요. 손님들이 보물찾기하듯 노트를 발견하는 재미를 느껴보길 바라거든요. 또 공간 한편에는 오일 파스텔과 스탬프, 엽서 등을 비치해두었어요. 당시의 생각과 감정들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즐거움을 만끽했으면 하는 마음으로요.
책 옆에 비치된 큐알코드를 통해 책 관련 설명이나 음악 감상, 다른 손님이 남긴 감상평도 확인할 수 있다.
각각의 아이템은 제 취향에 따라 선별했지만, 배치는 정말 신중하게 했어요. 책을 볼 때 다른 손님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을 위치와 높이를 찾기 위해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했거든요. 그러기 위해선 의자와 테이블 등을 엇갈려 배치할 수밖에 없었죠. 덕분에 공간 자체가 자유로운 느낌을 풍기는 것 같아요.
재즈, 발라드, J-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흘러나와요. 플레이리스트는 직접 짜나요.
음악 선정은 거의 직접 하고 있어요. 저는 라디오를 정말 많이 들어요. ‘배철수의 음악캠프’ ‘푸른밤, 옥상달빛입니다’ ‘김현철의 골든디스크’ 등의 애청자죠. 라디오마다 추구하는 음악의 장르가 다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많은 음악을 접하게 되는 것 같아요. 라디오를 듣다가 좋은 노래가 흘러나오면 메모해둬요. 그리고 블루도어북스에 어울리는 음악인지 판단합니다. 적합하다고 생각하면 플레이리스트에 올리고요. 음악은 제가 정말 신중하게 고민하는 부분이에요. 계절이나 분위기에 어울리는 곡을 매일 다르게 선정해야 하니까요.
입장, 퇴장할 때의 곡을 따로 지정해둔다고요.
음악은 블루도어북스의 정체성을 알려주기 위한 도구입니다. 음악의 흐름이 그 공간만의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믿거든요. 때문에 입장곡, 본곡, 퇴장곡을 따로 리스트업해두죠. 입장할 때는 조금 리듬감이 있는 음악을 틀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노랫소리를 줄여요. 그리고 본곡 첫 번째 플레이리스트가 흐를 때 인센스를 켭니다. 퇴장할 때는 여운이 남길 바라는 마음에 보통 부드럽고 따뜻한 음악을 틀어요. 음악의 흐름을 통해 ‘블루도어북스는 이런 곳’이라는 걸 이야기해주는 거죠.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은 직접 그리신 거라고요. 그림 앞에는 헤드폰과 메모장이 놓여 있네요.
취미 삼아 그린 그림을 전시해두었어요. 헤드폰에서는 그림을 그릴 때 들었던 음악이 흘러나와요. 메모장에는 그림을 그리며 떠오른 생각들이 적혀 있고요. 손님들이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텍스트를 읽은 뒤 그림 감상을 했으면 하거든요. 그러면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제 감성과 맞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림은 만져봐도 됩니다. 그림보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더 존중받아야 하니까요. 대신 손톱으로 긁지는 말아주세요(웃음).
책장 한편에는 제목이 안 보이게 책을 뒤로 꽂아놓았어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고본들이에요. 워낙 유명한 도서라 제목이 보이면 손님들이 관성적으로 익숙한 작품만 꺼내 볼 것 같아 일부러 책을 뒤로 꽂아놓았어요. 무작위로 짚은 책은 어쩌면 자신과 만나야 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김규림 작가가 큐레이팅한 책을 잠깐 읽어봤는데, 밑줄과 귀 접힘 흔적이 남아 있네요.
김규림 작가가 실제 읽은 책을 그대로 가져다 놓았거든요. 저는 밑줄, 귀 접힘, 얼룩 등의 흔적이 그 도서를 유일하게 만들어주는 수단이라고 여겨요. 흔적들을 보며 ‘이 사람은 이런 부분에서 감명을 받았구나’ 생각해볼 수도 있고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손때 묻히며 읽은 책을 본다는 것은 행운이나 다름없잖아요.
새 책만 있는 건 아니군요.
새 책은 물론 중고 도서도 진열돼 있어요.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은 블루도어북스 멤버들이 읽고 추천하는 책들이에요. 저는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해당 페이지에 적어놓거나 좋은 문장에는 밑줄을 그어요. 아무리 유명한 책이라도 저를 끌어당기는 문장이나 문구를 발견하지 못하면 결국 중간에 덮어버리게 되는 것 같아요. 손님들이 책 속 밑줄이나 글귀를 길라잡이 삼아 가슴을 뛰게 하는 문장들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주로 밀도가 높고 어려운 책들이 큐레이팅된 것 같아요.
난도 높은 책들의 임팩트가 세서 그런 것 같아요. 자세히 보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림책도 정말 많습니다. 블루도어북스에는 아이 손님도 많이 와요. 그림책을 바닥에 잔뜩 쌓아놓고 보죠. “아이들이 시끄럽진 않냐”고 물어보시는 분들도 있는데, 대부분 생각보다 조용하고 차분합니다. 블루도어북스는 오로지 독서를 위한 공간이 아니에요. 그림을 그리거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음악과 그림 감상을 위해 이곳을 찾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독서 외에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보고 즐길 수 있는 놀이공원인 거죠.
모두의 놀이공간인 블루도어북스에서는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서점이라는 정체성은 유지하되 요가 수업, 유화 클래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채워질 거예요. 블루도어북스는 길 가다가 힘들 때 물 한잔 얻어 마실 수 있는 편하고 따뜻한 공간이 됐으면 해요. 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다시 오고, 부모가 됐을 때는 아이와 함께 올 수 있는 ‘집’과 같은 장소로 다가갔으면 합니다.
‘여성동아’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과 음악이 있다면요.
음악은 케이트 블룸의 ‘come here’, 책은 조르주 바타유가 쓴 ‘에드와르다 부인, 죽은 자, 눈 이야기’와 킨스키의 ‘내게 필요한 건 사랑뿐’이요. 음악과 책 모두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 나왔던 콘텐츠예요. 며칠 전 ‘비포 선라이즈’를 정말 감명 깊게 봤어요.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청춘과 그들의 발길을 따라 펼쳐지는 풍경에 깊은 감동을 받았거든요. 아직까지도 그 여운이 남아 있어요. 영화 속 장면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가슴이 몽글몽글해지거든요. 샤워 후 케이트 블룸의 ‘come here’를 들으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기차 안에서 읽었던 책을 읽으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맥주까지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겠죠!
#블루도어북스 #서점 #북카페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