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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obituary

하늘로 돌아간 별 강수연

강유정 영화평론가

입력 2022.05.19 11:08:22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난 배우 강수연. 불꽃같은 생애를 영화와 함께 살다 간 그는 한국 문화사에 길이 기억될 자산을 남겼다. 그의 새로운 작품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스타, 셀러브리티, 연예인, 배우.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인기인으로 산다는 것은 삶의 족적을 공공의 영역에 남긴다는 걸 의미한다. 스타에게 전성기란 곧 존재감이 가장 돋보이는 시기다. 1980년대 스타의 인생에는 1980년대가 남고, 1990년대 인기인의 필모그래피에는 1990년대가 거울처럼 담긴다. 4세 때 대중 앞에 처음 나서 죽기 직전까지, 전 생애에 걸쳐 대중문화에 발자취를 남긴 강수연의 삶은 연예인, 스타, 배우를 넘어 한국영화사의 한 대목이다.
강수연의 부고를 듣고 ‘그가 이렇게 젊었던가’ 하며 새삼스레 놀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생물학적 나이로 따지자면 1966년생, 그는 아직 60세도 되지 않은 한창의 현역이자 배우였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연기를 시작해 영화사적 기록까지 남겼으니, 그 활동 기간과 경력을 따져보면 그가 원로급 배우로 느껴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4세의 나이로 데뷔, 1980~90년대 아이콘으로

강수연은 1969년, 한국 나이로 4세 때부터 TBC 전속 아역 배우로 활동했다. 소년, 소녀들의 필독서이기도 했던 잡지 ‘어깨동무’의 표지모델로도 얼굴을 알렸다. 당시 잡지 표지모델의 위상은 대단했다. 요즘으로 치면 최고 인기 프로그램 단독 출연 이상의 영향력을 가졌다.

강수연의 어린이 시절은 곧 대한민국 어린이 드라마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는 1976년 TBC ‘똘똘이의 모험’에 출연했고, 당시 불모지에 가까웠던 어린이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이기도 했다. 고교생 시절엔 드라마 ‘고교생 일기’로 인기를 끌었다. 강수연은 자신의 성장 속도에 맞춰 출연한 작품에 본인의 생애를 기록했다. 전 생애가 전성기라는 말은 그런 의미이다. 아동일 땐 어린이극, 청소년일 땐 청소년극의 주인공으로서 한국의 드라마, 영화계에 흔적을 꼬박꼬박 남겼다.

더욱 인상 깊은 대목은 성인이 된 이후 그의 성공적인 연기 변신이다. 당시 ‘고교 얄개’ 시리즈 등을 통해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청소년 배우들은 성년기에 이르러 영화계에서 도태되거나 사라지기 일쑤였다. 대중은 그들의 아동기, 청소년기 때의 연기에 익숙해져 있어 성인 연기를 낯설어할 뿐만 아니라 거부감을 표하기도 했다. 귀여운 모습으로 알려졌던 여러 어린이 슈퍼스타들은 성인이 되면서 영화계의 기록에서 사라져갔다.

그런 맥락에서 배창호 감독의 ‘고래 사냥 2’는 강수연의 성인 연기자 전환에 발판이 된 작품이다. 1편의 인기에 힘입은 ‘고래 사냥 2’는 방황하는 청춘의 대표적 감성 영화로 자리매김했다. 배창호 감독의 낭만적 감수성과 안성기의 괴짜 연기, 손창민의 순진한 20대 연기는 강수연과 함께 청년, 대학생, 방황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식 이미지를 마련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흐름을 잇는 작품 중 하나가 1987년 이규형 감독의 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다. 20대 배우로 갑작스럽게 등장해 잘생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남성적 마초성을 뽐내지도 않던 평범한 캐릭터의 박중훈. 강수연은 이와 상반되는 세련되고, 발랄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현대 여성을 표현한다. 1980년대 말, 점차 변해가는 문화적 지형 안에서 강수연은 마치 동시대적 맥락에서 돌출된 20대의 환상적 이미지 자체로 여겨졌다.

세계에 한국영화 알린 ‘씨받이’, 월드 스타 강수연

배우 강수연의 대표작 영화 ‘씨받이(1986)’ ‘그대안의 블루(1992)’ 드라마 ‘여인천하(2001)’(시계방향으로).

배우 강수연의 대표작 영화 ‘씨받이(1986)’ ‘그대안의 블루(1992)’ 드라마 ‘여인천하(2001)’(시계방향으로).

강수연의 생애에 있어 1987년은 꼭 기억되어야 할 해이자 한국영화사에 길이 새겨질 기념비적 해이다. 바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씨받이’가 1987년 9월 9일 제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작품으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해외 영화제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생소하던, 한국이라는 나라 이름도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먼 곳에서 날아온 소식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와 같은 작품에서 세련되고 차가운 도시 여성으로 등장했던 강수연의 씨받이 소녀 역할은 매우 이채롭고 독특했다.

돌이켜보면, 만 나이로 21세에 불과했던 강수연에게 씨받이는 매우 도전적인 역할이었음이 분명하다. 극 중에서 쇠꼴을 베러 다니던 천방지축 소녀 주인공은 양반 댁 모서릿방에 숨겨져 대를 잇는 일을 수행한다. 아들을 낳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수련은 거의 고문에 가까울 정도이며 기행에 가깝다. 대를 이어주기 위해 만난 남자는 소녀에게 첫 남자이자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완전한 타인이기도 했다.

순박한 소녀에서 점차 사랑을 아는 여자로, 마침내 혈육을 끊으며 오장육부를 도려내는 듯한 상실감까지…. 강수연이 연기해야 할 폭이 그렇게 깊고 넓었다. 출산 장면 정도는 스펙터클에 가깝고, 오히려 모든 것에 무지한 상태에서 그것들을 깨쳐나가고 끝내 생애와 작별하는 장면까지 표현해내는 대목이 더 관건이었다.

이후 강수연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월드 스타’라는 칭호와 함께 1990년대 이후 급격하게 성장한 한국영화계의 주요한 여배우로서 왕성한 활동을 한다. 그는 임권택 감독과 다시 함께한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또 한 번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강수연은 이 영화를 통해 로컬 무비로서 동양의 숨겨진 감성과 정서를 전달하는 매개가 되었다.

동시에 강수연은 국내 관객들에게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의 대도시풍 고독과 감성, 차갑고 세련된 도시적 오라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당시 포스트모던 문학 열풍의 핵심이었던 하일지의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을 영화화한 동명의 작품에서 새침한 칼 단발을 한 강수연은 ‘J’ 그 자체였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 ‘지독한 사랑’에서는 불륜과 사랑 사이를 가볍게 경유하는 주체적이고 새로운 여성성을 보여주었으며, 영화 ‘그대 안의 블루’ 속 유림은 소위 성공한 워킹 우먼의 이미지를 몸소 재현했다. 그는 포스트모던의 대도시 속 세련된 무관심, 고층 빌딩 속 저무는 노을과 잘 어울리는 1990년대 현대 여성상 그 자체였던 셈이다.

2000년대 이후 가장 잘 알려진 강수연의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드라마 ‘여인천하’다. 천하를 쥐고 흔들던 권력 뒤 비선 실세로 활약했던 ‘정난정’의 면모는 강수연의 단정한 외모, 똑 부러진 발음과 함께 사극이란 장르에 입체적 여성형 하나를 남겼다. 이후 ‘부산국제영화제’ 공동 집행위원장으로 영화계의 힘들고 고단한 시기에 봉사했고, 2022년에는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과 함께한 작품 ‘정이’의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

사유하는 배우 강수연, 영원히 간직될 것

화인들은 강수연을 떠올리는 자리에서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영화 ‘베테랑’의 대사를 종종 이야기하곤 한다. 류승완 감독은 강수연이 술자리에서 했던 말이 너무 인상 깊어 꼭 영화에 쓰고 싶었다고 한다. 이 대사야말로 배우 강수연의 색깔을 잘 드러내는 단어가 아닌가 싶다.

활동이 뜸했던 시절에도 강수연은 흔한 연예인, 스타, 셀러브리티처럼 대중에게 소모적으로 활용되지 않았다. 배우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늘 배우로 움직이고, 사유하고, 사고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강수연이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 세상 사람을 반하게 만드는 외모로 등장한 그는 자신의 가장 아름답고 귀한 시절을 모두 영화계에 쏟아붓고 추억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영화적 기록 속에서 강수연은 영원히 ‘씨받이’의 소녀, ‘그대 안의 블루’ 워킹 우먼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칼 단발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던, 큰 눈망울에 조용히 눈물을 떨구며 기도를 올리던 여자. 배우라는 단어 외에는 그 어떤 말로도 그를 다 설명할 수 없을 강수연. 함께 늙어가는, 또 다른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깝고 그 페이지를 다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이미 그녀의 불꽃같은 생애 덕분에 많은 자산을 얻었고, 또 그 자산은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강수연 #씨받이 #그대안의블루 #여성동아

사진 뉴시스
사진제공 SBS 세경영화주식회사 신한영화



여성동아 2022년 6월 7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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