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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column

[다시 만난 그녀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테레자’

글 성지연 에세이스트, 국문학 박사

2022. 05. 12

소설의 어떤 장면들은 이제 불편해서 읽기가 어렵다. 세상과 내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끼고 익숙했던 소설의 여성 주인공을 다시 돌아본다.
첫 캐릭터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테레자다.

밀란 쿤데라의 1984년 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소설을 읽으면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한다. 함께 울고 웃는다. 그러다 그 감정 이입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주인공이 펼쳐 보이는 삶의 방식에 몰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형편없는 여성관을 가진 마초인 게 드러난다거나, 남성 작가의 시선이 여성을 철저히 대상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소설의 어떤 장면들은 이제 불편해서 읽기가 어렵다. 독자인 내가 책을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반세기 이 땅에서 살아오는 동안 남녀평등의 진전을 지켜봤다. 최근에는 변화의 물결이 거세졌다. 강남역 사건, 혜화역 시위, 미투 운동에 많은 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3월 치러진 20대 대선에서는 젠더 갈등이 투표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간 모르고 지나쳤던 것, 알고도 참았던 것, 눈에 띄지 않게 숨겨놓았던 것들이 보이는 곳으로 나왔다.

오랫동안 아꼈던, 또 익숙하게 여겼던 소설의 여성 주인공을 다시 돌아본다.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 소설 속 주인공을 포함한 여성 캐릭터를 보며 여성의 삶을, 여성이란 누구인가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가장 먼저 만나려고 하는 이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인공 테레자다. 그는 어떤 여성일까.

우연을 헤쳐 운명을 발견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가 1984년 내놓은 소설이다. 영화 ‘프라하의 봄’의 원작 소설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소설 문법에서 다소 벗어난 이 작품은 포스트모더니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제목만으로 수많은 패러디를 낳은 이 소설에서 쿤데라는 이야기가 현실과 닮아 있다는 걸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대신 소설 안에 불쑥불쑥 개입한다. 이 작품은 자신이 쓰는 소설이고, 등장인물들은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밝힌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도 모호하다. 실재와 꿈 가운데 무엇이 중요한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우선 줄거리를 살펴보자.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인 테레자는 보헤미아의 작은 마을에 있는 술집 종업원이다. 프라하에 사는 외과의사 토마시가 업무 관계로 보헤미아를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시간을 기다리는 사이 테레자가 일하는 술집에 들어가 두 사람은 첫 만남을 갖는다.

열흘 후 테레자는 프라하에 있는 토마시의 집으로 찾아간다. 둘이 잠자리를 가진 그날 밤, 테레자가 독감으로 열이 펄펄 끓게 되면서 만남이 이어진다. 테레자가 일주일 동안 토마시의 집에 머무는 동안, 토마시는 잠든 테레자를 보며 그녀 곁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단, 그게 사랑인지 확신하지는 못한다. “Einmal ist keinmal(한 번은 없는 것과 같다).” 그 순간 토마시가 되뇐 독일 속담이다.

두 사람 관계에 변화를 만들어낸 것은 테레자다. 테레자는 회복 후 보헤미아에 돌아갔다가 또 다시 프라하를 찾는다. 토마시는 테레자의 트렁크를 갖고 집으로 오며, 테레자가 그녀의 삶을 트렁크에 넣어 역에 잠깐 맡겨뒀다가 자기한테 주려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게 테레자와 토마시가 결혼을 하게 된 스토리다. 여성 편력이 있는 토마시가 일회성의 ‘가벼움’을 추구한다면, 테레자는 우연 사이를 헤쳐 나가며 ‘무거운 운명’을 만들어낸다.

테레자가 토마시를 운명으로 여긴 이유는 그의 성장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테레자의 어머니는 자신에게 구혼했던 남자 중 아홉 번째 남자와 결혼했다. 낙태해줄 의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테레자의 어머니는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을 딸에게 돌렸다. 테레자는 속죄를 위해 열심히 일해야 했다. 어머니는 알몸으로 집을 돌아다녔다. 계부는 성적으로 지분거리며 테레자를 괴롭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자가 주인공인 2부와 4부의 제목은 둘 다 ‘영혼과 육체’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은 지속적으로 테레자를 괴롭힌 문제다. 그녀는 육체에 천착했던 어머니에게서 벗어난 또 다른 세계를 원했다.

첫 만남에서 토마시는 술주정뱅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책은 테레자가 저속한 세계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테레자는 그 순간 자신의 영혼이 그 남자에게 보이기 위해 튀어 오르는 걸 느꼈다. 테레자가 집을 뛰쳐나올 용기를 얻은 것은 토마시가 펼쳐놓은 책, 그에게 코냑을 가져갈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베토벤 음악 같은 거듭된 우연에서였다. 독점권을 내세우지 않는 관계가 두 사람 모두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던 토마시는 이 원칙을 깨고 테레자와의 재혼을 선택한다.

“이제부터는 그녀가 그를 책임져야 한다”

그들의 결혼 이후 역사적 소용돌이가 들이닥친다.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진 1968년 체코 민주화운동이다. 이를 막고자 소련군이 체코를 침공했다. 당시 테레자는 토마시의 친구 사비나 소개로 한 주간지 사진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테레자는 소련군과 이에 저항하는 체코 시민들을 찍다가 체포되기도 한다.

이때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한 병원 원장이 토마시를 염려해 의사 자리를 제안한다. 토마시는 테레자가 프라하를 떠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제안을 거절한다. 그런데 테레자는 떠나기를 원했다. 불행했기 때문이었다. 테레자에게 결혼의 대가는 지독했다. 토마시는 결혼 후에도 다른 여자들과 에로틱한 우정 관계를 이어갔다. 테레자는 토마시의 불륜을 상징하는 꿈을 반복해 꿨다.

두 사람이 정착한 취리히에서도 토마시의 자유분방한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테레자는 몇 달 후 편지를 써놓고 다시 프라하로 떠난다. 토마시는 자유의 향기를 들이마시며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만끽한다. 그런데 이틀 후 토마시는 테레자가 편지를 쓰면서 가졌던 감정을 느꼈다. 동정심이 엄청난 무게로 토마시를 짓눌렀다.

결국 토마시는 테레자를 찾아 프라하로 돌아온다. 화를 내는 병원장에게는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라고, 베토벤 4중주의 마지막 악장 모티프로 대꾸한다. 토마시에게 프라하로 돌아온다는 건 이제 더는 안전한 외국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걸 뜻한다. 우연한 만남은 무게를 점점 더했고, 이 결정은 이후 토마시의 삶을 흔들어놓는다.

테레자는 프라하로 돌아온 토마시의 잠자는 숨소리를 들으며 무한한 행복감을 느낀다. 테레자와 토마시의 관계는 이제 역전됐다.

“토마시는 그녀 때문에 돌아왔다. 그녀 때문에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이제 그녀를 책임질 사람은 그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그녀가 그를 책임져야 한다.”

테레자와 토마시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는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육체와 영혼, 다시 말해 섹스와 사랑은 별개라는 게 토마시의 생각이었다. 테레자의 견해는 달랐다. 육체가 관계를 갖는 동안 육체의 심연에 유폐된 영혼이 누군가 불러주길 절망적으로 기다린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테레자에게 육체와 영혼, 섹스와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토마시는 프라하에 돌아와서도 다른 여자의 냄새를 풍기며 퇴근한다. 프라하의 비밀경찰은 도청과 감시를 일삼는다. 테레자는 어머니와 함께 산 유년 시절을 집단수용소로 표현했다. 자신의 사생활이 박탈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세상이 집단수용소였다.

남편의 바람기에 시달리면서도 그 남편을 떠나지 못하는 여자 이야기는 통속극의 단골 소재다. 그 따위 남자는 버리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테레자의 선택은 달랐다. 테레자는 우연한 한 번의 선택에 담긴 운명적 의미를 받아들였다.

토마시를 운명으로 선택한 테레자는 행복했을까. 소설의 마지막에서 테레자는 토마시에게 시골에 갈 것을 제안한다. 뜻밖에도 이에 응한 토마시는 이제 영원한 휴가를 얻겠다고 결심한다. 테레자의 낙원은 거기에 있었다. 토마시가 만날 여자도, 경찰의 감시도 없었다. 소설은 테레자와 토마시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고 난 뒤 호텔에 묵으면서 끝이 난다.

여성의 삶에 정답은 없다

영화 ‘프라하의 봄’. 쥘리에트 비노슈가 테레자를 연기했다.

영화 ‘프라하의 봄’. 쥘리에트 비노슈가 테레자를 연기했다.

그런데 시간순으로 보면 이게 끝이 아니다. 우리는 사비나의 서술을 통해 테레자와 토마시가 어느 날 트럭 사고로 죽은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마침내 낙원과 같은 곳에서 행복해 보이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테레자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읽는 독자의 마음은 애틋해진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회귀를 소개하며 시작한다. 영원회귀란 삶이 원의 모습을 띠며 같은 것들이 계속 반복된다는 사상이다. 한 번의 선택은 영원으로 못 박힌다. 그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영원의 책임을 진다. 그래서 니체는 영원회귀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삶이 영원회귀와 달리 한 번뿐인 선택의 연속이라면 정답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기에, 과연 어떤 게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게 나쁜 결정인지 확인할 수 없다. 이런 시각에서는 옳고 그름의 경계가 흐려질 수밖에 없다.

쿤데라가 책을 통해 전하려는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삶에서 무엇이 무거운 것이고, 무엇이 가벼운 것일까. 가벼움과 무거움, 우연과 운명, 육체와 영혼, 섹스와 사랑, 일회성과 영원회귀의 대립은 처음부터 고정된 걸까. 우연에 불과한 사건은 내가 받아들이면 필연의 의미를 가진다.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 평생을 같이하기로 한 약속은 운명의 사랑으로 무게를 가진다.

테레자는 영원한 사랑을 얻고자 고통을 감내했다. 이런 테레자의 희생을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쿤데라도 말하듯 이 세상의 일에 언제나 옳은 정답은 없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랑을 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삶의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기쁨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사랑은 가장 아프고 고통스러운 슬픔을 안겨준다. 기쁨과 슬픔을 모두 품어 안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연재는 앞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려고 한다.

#테레자 #참을수없는존재의가벼움 #성지연 #여성동아

사진출처 민음사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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