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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름다운 그녀

‘시인의 아내’ 아나운서 고민정

물질적으로 부족해도 행복한 이유

글·이혜민 기자 사진·조영철 기자

2011. 03. 16

시인의 아내로 더 유명한 KBS 아나운서 고민정. 아나운서 생활을 잠시 접고 일년간 중국 유학을 다녀와 방송에 복귀한 그를 만나 전보다 더 행복해진 비결을 들어봤다.

‘시인의 아내’ 아나운서 고민정


찻집에 긴 생머리 여대생이 들어와 두리번거린다. 누군가 싶었는데 목소리를 듣고 보니 시인의 아내라 불리는 고민정 아나운서(32)다. TV에서 볼 때는 귀여운 인상이었는데 실제로는 청초한 이미지다. 중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지난해 방송에 복귀한 그에게 귀국 소감과 함께 당시 떠나게 된 이유를 물었다. 빙긋이 웃는 고 아나운서가 차분하면서도 다부진 말투로 그간의 여정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20대에는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이든 부딪치면서 열정적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서른을 목전에 두고 보니까 ‘내가 이루어놓은 20대의 삶은 무엇인가, 그 기반 위에서 나는 어떤 집을 지어야 하나’ 싶어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 문제를 풀어보려고 떠났죠. 힘든 여정일 수도 있지만 그럴수록 얻는 게 훨씬 더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시 그는 직장생활 6년 차. “방송은 빠져나올 수 없는 매력을 지닌 그 무엇이긴 했지만 새로운 일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휴직계를 내고 남편 조기영 시인과 함께 2009년 여름, 자비로 중국 유학을 갔다. “대학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했고 중국의 발전 가능성을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칭다오대학에서 (한국어의 위치와 위상을) 공부한다는 것이 삶의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뜨거운 고민정에서 묵직한 여인으로
노는 게 남는다고 했던가. 그 역시 “공부할 때보다 방학 중 여행하면서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한다. 대학 때는 돈이 없어서, 회사 다닐 때는 시간이 없어서 배낭여행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여행이 더욱 각별한지도 모른다.
“방학 때만 되면 배낭을 메고 베트남,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 지역을 한 달씩 다녔어요. 뜨거운 태양을 온몸으로 받아내느라 피부가 새까맣게 탔지만 색다른 체험을 했죠. 아기가 생기면 여행을 못 다닌다기에 이참에 열심히 다녔어요. 대중교통이나 숙박 시설이 발달하지 않아서 모든 게 불편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덕에 얻은 게 더 많아요.”
이후, 마음의 여유를 찾게 된 그는 그의 말마따나 “뜨거운 고민정이 묵직한 여인이 됐다”고 한다. 과거에는 다음 날 계획을 시간순으로 정리해두지 않고서는 잠들지 못했지만 여행을 하면서부터 달라졌다. 실로 그곳에서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무의미할 때가 많았다. “사람도 약속 시간을 잘 안 지키지, 교통 편도 제대로 안 돼 있지, 숙소도 알려졌던 것과 다르지…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다”는 것. 그래서 계획을 세우지 않았는데 그 덕에 깜짝 선물을 받기도 했다. 중국으로 유학 떠나면서부터 그토록 가고 싶었던 샹그릴라(중국 윈난성 디칭티베트족 자치주에 있는 지역)에서 멋진 풍광을 본 것도 그런 선물 중 하나다.
“제임스 힐턴의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천국처럼 묘사된 그곳을 가면 제가 만든 감옥 안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죠.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제가 그리던 모습이 아니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위펑 마을을 가게 됐는데 그곳에서 제가 꿈꾸던 모습을 보게 됐어요. 통나무로 된 여인숙에 짐을 풀고 남편과 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상념에 빠졌는데…, 꿈꾸던 샹그릴라보다 더 멋진 곳이었죠.”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물 흐르듯이 가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진리가 가슴에 와 닿았다. “계획하지 않아도 살 수 있고, 그 안에서 행운까지 찾을 수 있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는 “특정 시기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자신이 만든 감옥’이 부질없음”을 실감했다.

남편을 이해하는 마음도 넓어졌다. 11년 나이 차를 극복하고 7년 열애 끝에 2007년 결혼한 그는 그 무렵 알게 모르게 남편과 갈등의 골이 있었다. 시인이라는 남편의 직업 특성상 집에서 작업하는 날이 많은데, 행여 남편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면 화가 났다. 그러나 유학을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란 책을 내면서 그런 그를 이해하게 됐다. “글을 쓸 때는 마음에 돌덩이가 있는 것처럼 불편해서 쉬어도 쉬는 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나 유학생활을 하면서 그는 남편의 의미를 되새겼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해외여행조차 꺼리는 남편이 아내의 유학에 동참하기 위해 묵묵히 짐을 싸는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나를 생각하는지 알았다”고 한다. 아내를 따라 중국에 건너와 시 작업을 지속하는 남편을 보면서 ‘이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자문하며 함께한 지난날을 감사했다.
그에게 남편은 여전히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대상”이다. 평소 싫증을 잘 내는 고민정이 이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할 때마다 남편은 장난 삼아 “난 정말 치명적인 매력이 있나봐~”라고 말하는데 그는 웃으며 동의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사귄 지 1백 일째를 기다려 성년의 날, ‘이 숲에 오신 당신을 환영합니다’ ‘저를 한번 꼬옥 안아주세요’ ‘그리고 당신 곁에 있는 그 사람을 꼬옥 안아주세요’라는 말을 나무에 붙여 놓고 커다란 초를 안기며 촛불을 밝혀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명품 가방 하나 없는 아나운서
조기영 시인은 애처가를 넘어 공처가처럼 아내를 아낀다. 그렇지만 늘 아내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불같은 면이 있다. 특히 아내가 ‘사치’를 할라치면 냉정하게 “안 된다”고 잘라 말한다. 그래서 그는 해외여행을 가도 흔한 명품 백 하나 사지 못했다. 심지어 후배 결혼식 사회를 봐주고 선물로 받은 가방 역시 명품이라는 이유로 들고 다니지 못한다.
“남편이 명품 백 자체를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는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그 가방을 들고 나서 물질에 현혹될까봐 두려운 거죠. 항상 남편은 저 고민정이 평범한 여자로 살길 바라지 않고, 많은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여성으로 성장하길 바라거든요. 쇼핑을 좋아하던 저도 오랜 시간 남편과 함께 지내서 동화됐는지 요즘에는 보석으로 치장하는 것보다 내면을 아름답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봐요. 실제로 보석보다 제가 더 빛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요(웃음).”
그러고 보니 그가 입고 있는 옷이나 가방, 심지어 콤팩트까지 명품인 것이 없다. 늘 화려하게 보이는 아나운서와는 차원이 다르다. 고민정·조기영 부부는 수중에 1만원이 있으면 그 안에서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 게다가 시인인 남편은 1만~2만원짜리 뷔페에 가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아내를 즐겁게 해준다. 하지만 그가 늘 ‘절제’하는 것만은 아니다.
“밥도 잘 사는 편이에요. 많은 돈을 버는 건 아니지만 명품을 사지 않으니까 그만큼 여유가 있죠.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많은 걸 또 받게 된다는 거예요. 실제로 주변에는 저와 비슷한 친구들이 많은데, 이 친구들이 경제적으로 부족할지는 몰라도 다복하거든요.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이 결핍돼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이죠.”
이런 그를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물질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나 홀로 너무 다른 삶을 살아가면 자칫 소외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의외로, 그런 그의 모습 때문에 주변에 사람이 많다고 한다.
“상대의 고민을 쓰다듬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되는 거지, 반드시 상대와 같은 잣대로 세상을 바라봐야 소통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얘기하다 보면 그분들이 저의 이런 생활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살아갈 용기를 얻기도 해요.”



‘시인의 아내’ 아나운서 고민정


그가 욕심 없이 살 수 있는 건 부모 덕분이기도 하다. 밀가루 도·소매업을 하는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하지만 부모는 늘 “사람들과 많이 나누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 안에서 풍족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어머니께서 교육을 많이 받지는 못하셨어요. 책을 좋아하시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문화생활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어느 날 ‘인생이란 운명을 깨나가는 과정 같다’는 명언을 해주시더라고요. 덕분에 힘든 시절을 용기 있게 헤쳐나갈 수 있었는데, 가난한 시인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도 비슷한 말씀을 해주셨어요.”

“인생이란 운명을 깨나가는 과정”
하지만 그도 인간인 이상 욕망을 잠재우지는 못한다. 그래서 그는 남편 다음으로 책에 의지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한다. 그를 단련시켜준 책은 신영복 선생의 ‘강의’다.
“이 책은 제게 바이블과 같아요. 한 장 한 장 버릴 것이 없죠. 그분이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고전을 재해석하셨는데요. 예전에는 주역, 논어, 맹자 이런 것들을 딱딱하게 여겼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구절구절이 지금 시점에도 절실하게 와 닿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한꺼번에 읽지 마시고, 한 장 한 장 곱씹어보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실 거예요.”
특히 1월 KBS ‘책 읽는 밤’의 진행자가 되면서부터 책에 기대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는 “꿈에 그리던 프로그램을 맡아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한다. 책에서 얻은 지혜를 공유하는 장에 서는 덕분이다.
“그간 소개된 책 중에서 ‘레논평전’이 기억나요. 오노 요코와의 정신적인 교감을 그린 내용이 좋았거든요. 그리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란 고전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어요. ‘세상의 물질과 욕망에 얽매이지 말고 주관을 가지고 나만의 인생을 살라’는 메시지가 울림이 있었죠. 법정 스님이 좋아하신 책이라고 해서 더 마음이 간 것 같아요.”
그는 이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책을 가능한 한 다 읽어보려고 한다. 책을 읽지 않은 채 대본만으로 진행할 수도 있지만 진정으로 책 내용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 느낌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자신이 책을 만든 경험이 있기에 책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그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방에 가면 제게 책을 많이 안겨주세요. 사실 제가 안 읽어도 상관없죠. 작가들이 중요한 내용은 다 뽑아주시니까요. 하지만 아나운서가 책을 읽고 방송할 때랑 그렇지 않을 때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이 프로그램을 해치워버리는 게 아니라 제작진과 함께 만들고 싶어서 이번 주는 ‘전을 범하다’란 책을 읽고 있어요. ‘심청전’ 같은 고전을 오늘의 시각으로 재해석해서 그런지 재미있네요(웃음).”
고민정 아나운서. 늘 밝아 보이는 그에게도 삶이 지난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재충전’이란 카드를 꺼내들고 새로운 일을 추진한다. 휴직해 1년간 유학을 다녀온 것도, 책을 쓴 것도, 그리고 올해부터 성공회대대학원 미디어문화연구과정에서 공부하기로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는 “한 해 한 해 중요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고 다부지게 말하며 삶의 의미를 되새겼다.
“힘들게 사시는 분들께 제 삶을 통해서 희망을 드리고 싶어요. 그것이 제가 아나운서가 된 이유이기도 하고, 앞으로 살아갈 이유이기도 하죠. 그동안 제 삶이나 스펙이 A+는 아니지만 열정적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드렸잖아요. 가난한 작가와 살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렸고요. 이제는 열심히 살 날들만 남은 거죠 뭐(웃음).”
이전에는 그저 평범한 아나운서였지만 이제는 자신의 색깔을 내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고민정. 앞으로 그에게 어떤 형용사가 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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