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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walking

유희열이 추천하는 서울의 밤 산책길

글 정혜연 기자

입력 2021.06.07 10:30:02

해가 떨어진 후, 달빛이 차분히 내려앉은 어둑한 거리를 걸어본 적 있는지. 작곡가 유희열은 그때가 비로소 “내가 좀 더 나다워지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감각적인 뮤지션들이 포진해 있는 엔터테인먼트 회사 ‘안테나’의 수장이자 프로젝트 그룹 ‘Toy’의 프로듀서인 유희열. 13년째 KBS 뮤직 토크쇼 ‘유희열의 스케치북(유스케)’을 진행하고 있지만 그의 음악과 선곡을 사랑했던 이들은 2000년대 초반 MBC 라디오 ‘유희열의 FM 음악도시’ DJ를 맡았던 그를 더 친숙하게 여긴다. 그는 매일 오후 10시부터 2시간 동안 나지막한 목소리로 음악과 세상에 관한 따뜻하고도 위트 있는 시선을 청취자와 공유했다. 그 시절 그는 20~30대들에게 ‘밤의 도시를 관리하는 시장’(당시 별명)이나 다름없었다.

20여 년 동안 자정 무렵 그를 듣고 봐왔던 청취자와 시청자들에게 밤과 유희열은 떼놓을 수 없는 연관 검색어처럼 돼버렸다. 이런 이유로 지난해 가을, 카카오TV 제작진이 그에게 서울의 밤 산책길을 걷고 소개하는 방송을 제안했다. 유희열은 “그냥 밤에 산책하면 된다”는 제작진들의 설득에 넘어가 대본도, 조명도 없이 도심 속 산책길을 걸으며 그만의 감성으로 야경을 카메라에 담아 카카오TV 오리지널 ‘밤을 걷는 밤’을 만들었다. 촬영 종료 후 유희열은 “평소에도 밤에 걷는 걸 좋아했는데 제작진이 물색해준 다양한 코스를 걸으며 예전엔 미처 몰랐던 서울의 아름다움을 많이 알게 됐다”는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이후 유희열은 밤 산책길 코스와 야경 사진들을 정리하고 생각을 덧붙여 4월 초, 에세이 ‘밤을 걷는 밤(위즈덤하우스)’을 출간했다. 하루하루 바삐 사느라 눈에 담지 못했던 서울의 곳곳에 숨겨진 보석 같은 산책길이 이렇게 많았나 싶어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유희열은 책에서 밤을 “내가 좀 더 나다워질 수 있고 때로는 어둠 속에 숨을 수도 있는, 비밀스럽고도 반짝반짝한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밤 산책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시야는 흐릿한데 감각은 한층 예민하게 깨어난다. 바람이, 나무와 꽃이, 공기의 질감이 거리마다 새롭게 말을 걸어온다”고 소개했다. 그가 추천한 산책길 16곳 가운데 3군데를 발췌해 소개한다.

#1 
나와 우리의, 옛 도시의 기억을 간직한
종로구 청운효자동 산책길

변하지 않아 참 고마운 동네에서 천천히, 마음과 기억의 시차가 좁혀져간다. 잠옷 차림 그대로 산책 나온 모녀의 뒷모습 위로 퇴근하고 돌아오는 어머니의 얼굴이 오버랩되어 떠올랐다. 밤이 되면 나는 저 팻말 주위를 한참 서성이며 어머니를 기다리곤 했다. 버스가 멈춰 설 때마다 목을 길게 빼고 내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찾았다. 마중 나온 나를 발견하면 어머니는 나보다 더 환히 웃으셨고, 그 웃음이 온 우주를 밝혔다.

최규식 경무관 동상 인근 청운효자동 골목길.

최규식 경무관 동상 인근 청운효자동 골목길.

인왕산 산책로 끝자락 ‘무무대’에 올라 내려다본 서울의 야경.

인왕산 산책로 끝자락 ‘무무대’에 올라 내려다본 서울의 야경.

그러고 보니 이 밤길, 막 시작한 연인이 걷기에 너무 좋은 산책길이다. 청운효자동에서 같은 보폭으로 걸으며 마음의 거리를 좁히고, 길가 어느 맥줏집에서 맥주를 한 잔 마신 뒤에 이곳, 인왕산 산책로로 넘어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는 거다. 나무가 우거져 제법 어둑한 길을 지날 때는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서로의 손을 찾게 될지 모른다. 저 화려한 도시의 야경은 덤이고.



누군가 나를 위해 준비해둔 보물 지도 위를 한바탕 돌고 나온 것만 같다. 멈춰진 시간 속에서 잊고 있던 추억의 조각들을 그러모으며…. 참 좋은 거구나, 밤에 걷는다는 거.

#2
오르다 보면 인생의 순리를 깨닫는
동대문구 천장산 하늘길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꽉 들어찰 듯한 나무 데크가 숲을 해치지 않고 나무를 건너뛰면서 오르락내리락, 굽이굽이 이어진다.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불규칙적으로 굽이치는 나무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숨이 금세 헉헉 차올랐다. 어둠 속에 넌지시 자리한 대숲 사이를 걸으면서도 그저 거친 호흡을 몰아쉬기 바빴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들고, 헛웃음이 나온다. 결국 벤치에 주저앉고 말았다.

천장산 숲길 입구.

천장산 숲길 입구.

살다 보면 때때로 돌이킬 수 없는 순간과 맞닥뜨린다. 그럴 때는 힘들어도 잠깐 쉬었다가 다시 앞으로 나아갈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냥 그렇게, 순리대로 이리저리 떠밀리다 보면 어딘가에는 도착하게 된다. 내 인생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대학교 1학년에 어느 녹음실에 막내로 들어갔을 때였다. 녹음실에서 같이 먹고 자던 엔지니어 (윤)정오 형이 어느 날 갑자기 말했다. “우리도 음악 한번 해볼래?” 이 말을 들은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는’ 삶이 시작됐다. 내가 지금 막 걸어온 길처럼, 인생에도 샛길은 별로 없다.

천장산을 내려가는 계단을 하나씩 밟으면서 멀리 바라보자 어두운 숲 너머로 불빛마다 물감으로 빛점을 찍어놓은 듯한 서울의 야경이 점점 넓게 들어왔다. 산길을 올라올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풍경이 내려가는 길에야 눈에 들어온다. 인생도 그렇다. 위만 보며 아등바등 오를 때에는 주변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3
서울에서, 아니 세계에서 1등인 야경 명소
성동구 응봉산 산책로

응봉산이 예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한 번쯤 와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한데…. 길가 입구에서 올려다만 봐도 계단이 가파르더라니 금세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천장산을 걷는 느낌과는 완전히 다르다. 응봉산 산책로는 주로 나무 계단으로 이어지지만 수풀이 계단을 넘나들고 그 끝에 흙길이 나타나기도 하는 등 밤중에도 한결 아기자기하게 느껴지는 길이다. 어느 길섶에서는 하얀 불로화도 송이송이 반겨준다.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런 아름다운 전망은 처음이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교각들의 휘황한 불빛, 강변도로들을 밝히는 무수한 가로등 불빛, 꼬리에 꼬리를 물며 달리는 자동차 불빛, 그리고 한강 너머로 반짝이는 아파트와 빌딩 숲이 아름다운 빛의 궤적으로 어우러진 풍경. 한강은 그 색색의 빛을 전부 끌어안고서 서울의 밤을 노래하고 있었다. 서울의 야경 명소를 제법 가봤다고 생각했는데 응봉산은 정말이지 야경 1등, 전망 1등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이런 야경은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응봉산 산책길.

응봉산 산책길.

왜 한 번도 여기를 걸어볼 생각을 못 했을까. 이제는 안 하던 짓을 좀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직접 걸어봐야 마주칠 수 있는 뜻밖의 풍경을 좀 더 많이 보며 살고 싶어졌다. 그러면 낯설고 새로운 풍경들 속에서 또 다른 내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 길에서든, 인생에서든 그 풍경이 부디 다정한 선물 같기를.

사진 동아DB 
사진제공&자료제공 위즈덤하우스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여성동아 2021년 6월 6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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