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 대기업에 25년째 근무 중인 김 부장. 서울에서 자가로 살며 연봉은 1억원, 월 실수령액은 6백50만~7백만원이며 주식도 1천만원가량 투자 중이다. 입사 초부터 ‘보고서의 장인’으로 불리며 진급 누락 없이 부장 자리에 올랐고, 주말마다 전무와 상무를 모시고 필드에 나가 골프를 치며 임원 승진을 노린다. 과장이었을 때 해외 출장 갔다가 면세점에서 산 몽블랑 가방과 태그호이어 시계, 명품 넥타이는 김 부장의 목을 빳빳하게 세워주는 자존심이다.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대기업 부장이라면 스타벅스 정도는 가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설탕이 가득 들어간 믹스커피를 시도 때도 없이 마신다. 상사의 차보다는 눈치껏 낮은 사양의 신형 그랜저를 뽑아 출퇴근하는 것에 만족하고, 외제차로 출퇴근하는 후배들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생활력 강한 아내와 취업 대신 사업을 꿈꾸는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가부장적 가장이었으나 난데없는 지방 발령에 희망퇴직까지 권유받자 충격에 휩싸인다. 인생 2막을 준비 없이 맞자 조급함에 신도시 상가를 덜컥 계약하고, 결국 노후를 발목 잡힌다.
# 김 부장 팀의 에이스, 입사 11년 차 송 과장. 일도 잘하고 선후배들의 신뢰를 받는 타입. 아침 일찍 출근해 꾸준히 책을 읽으며 자기 계발을 하는 것 같더니, 상무부터 최 부장까지 송 과장에게 부동산 조언을 구한다. 최 부장의 재개발 아파트부터 상무의 재건축 아파트까지 모두 송 과장의 조언이 한몫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말단인 권 사원까지 부동산 투자에 가세한다. 평소 신뢰를 쌓은 덕에 부동산 계약을 이유로 연차 휴가를 내도 김 부장조차 눈치 주지 않는, 직장인들의 롤 모델이다.
# 강남 8학군 출신으로 맡은 일을 잘하고 공사 구분이 철저한 정 대리. ‘한 번 사는 인생 후회 없이 살자’는 모토에 충실한 진정한 욜로족이다. 중고로 뽑은 BMW를 타고 출근하며, 여자 친구와 명품과 와인 등을 SNS에 자랑하는 데 여념이 없는 MZ세대다.
# 팀의 막내, 입사 3년 차 권 사원.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근무하지만 맡은 일을 성실히 할수록 누군가 공을 가로채가고, 불합리한 평가를 받자 회사 생활에 회의감을 느낀다. 결혼을 앞두고 부동산 하락론자인 남자 친구와 신혼집을 구하는 문제를 놓고 갈등한다.
2021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캐릭터들, 부동산 문제부터 삶을 대하는 태도까지 각양각색의 면면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소설 한 편이 온라인상에서 주목을 받았다. 소설 제목도 세태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이하 ‘김 부장 이야기’)다. 지극히 이기적이며 자아도취에 빠진 김 부장부터 일뿐 아니라 재테크도 잘하는 송 과장, 한 번 사는 인생에 충실한 욜로족 정 대리, 정글 같은 조직 사회에 지쳐가는 권 사원까지…. 독자들은 나였고, 나일 것 같은 소설 속 캐릭터들에 깊이 빠져들었다.
작가는 실제 서울 용산에 위치한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과장 송희구(38) 씨다. 그는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지하철로 출근, 업무 시작 전에 쓴 소설을 지난해부터 자신의 블로그와 부동산 카페에 올렸다. 기대감 없이 올린 소설은 비슷한 위치에서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직장인들의 진한 공감을 샀고, 30일 만에 개인 블로그 조회수 2백만, 부동산 카페 조회수 1천만을 기록한 데 이어 일간지 1면 톱을 장식하기에 이르렀다. 누리꾼들은 2014년 드라마화로 대박이 난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을 떠올리며 김 부장의 스토리를 ‘제2의 미생’으로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이런 반응 덕에 스무 곳이 넘는 출판사에서 출간 제의가 이어졌고, 웹툰 및 드라마 제작사로부터 제작 의뢰도 쏟아졌다. 8월 말 2권의 책으로 출간된 ‘김 부장 이야기’는 각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오르며 순항 중이다. 현재 송 작가는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송 과장 이야기를 담은 3번째 시리즈 출간 계획과 함께 드라마 대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를 만나 궁금한 소설 뒷이야기와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 세상에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를 들었다.
평범한 직장인에서 하루아침에 작가가 됐어요. 소감이 남다를 것 같아요.
책이 나오기 전까지 이런 상황이 믿기지 않았어요. 출간과 동시에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는데 약간 얼떨떨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요. 사실 전 스스로를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소설을 봤다면 아시겠지만 문학적으로 의미가 있거나 아름다운 미사여구가 담긴 그런 작품은 아니에요. 기름기 쫙 뺀 무미건조한 말투의 현실적인 이야기로 가득해요. 그래서 작가라고 불리기엔 미흡하고, 아직도 그냥 직장인이라고 생각해요.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출근해서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을 듯한데, 원래 아침형 인간인가요.
전혀 아니에요. 입사하고 나서 어쩔 수 없이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어요. 오전 6시 30분 이전에 지하철을 타면 몇백원 할인받을 수 있는데 그게 쌓이면 크겠더라고요. 할인받으려고 일찍 다니던 게 습관이 돼서 지금까지 그렇게 출근하고 있어요. 첫차를 타고 회사에 도착하면 6시 10분 정도 돼요. 커피를 마시고 노트북을 켜면 딱 6시 30분이죠. 처음에는 책을 읽었고, 일기를 쓰거나 하루 일정을 미리 준비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김 부장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한번 써보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하게 됐죠.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주변 부장님들 대부분이 은퇴 이후의 생활을 걱정하면서도 대비는 거의 안 하시는 것 같았어요. 퇴직을 코앞에 두고 “뭐 한번 다른 데 취직해볼까?” “무슨 사업을 한번 해볼까?”라며 막연하게 구상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시작하면 대체로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그게 안타까워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요.
김 부장 같은 캐릭터는 주변에서도 쉽게 목격되는데, 실존 인물 3명을 모델로 하셨다고요. 어떤 분들인지, 출간 이후 그분들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한 분은 진짜 자신의 의견이 전부인 줄 알고 사셨어요. 부하 직원들에게 “너희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과장들이 막혀 있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편이었죠. 소설 속에서 상무가 김 부장에게 “회사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공감과 협업”이라고 말하는데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그런 김 부장의 면모는 그 부장님의 모습에서 비롯됐죠. 또 다른 분은 김 부장처럼 퇴직을 앞두고 신도시 상가를 분양받았다가 안타깝게 되셨어요. 그때 제게 전망이 어떻겠냐고 물어보시기에 극구 말렸는데 기어코 계약을 하시더라고요. 마지막 한 분은 정말 믹스커피를 좋아해서 엄청 많이 드시던 분이었어요. 그런데 다들 본인의 이야기인 줄 모르세요. 회사 내부적으로 “이게 나야?”라고 물어보신 분은 아직 없어요(웃음). 온라인에 소설을 올릴 때는 가명을 썼고, 소설로 나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아 그런 듯해요. 아마 다들 곧 알게 되겠죠.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건 아무래도 ‘부동산 이슈’ 때문일 듯해요. 신축 아파트 소유주인 최 부장, 재건축 조합원인 상무, 건물주 놈팡이 앞에서 구축 아파트 소유주인 김 부장은 주눅 들고 말죠. 부동산으로 계급화된 세태를 비판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그런 의도는 없었어요. 그저 주변의 누군가가 나보다 좋은 데 살면 질투가 나잖아요. 또 친구들 중에 누가 강남으로 이사 간다고 하면 ‘전세일까? 자가일까?’ 하며 물어보고 싶어지잖아요. 직접 묻지는 못하고 다른 경로로 알아보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 소소한 일화를 담고 싶었어요. 또 건물주 캐릭터를 넣은 이유는, 원래는 사는 게 나와 비슷했던 사람들이라도 나보다 더 잘살게 되면 위화감을 느끼게 마련인데 아예 ‘건물주’처럼 격차가 나면 질투하지 않잖아요. 그런 사람들의 묘한 심리를 다루고 싶었어요. 사실 건물주인 놈팡이는 오히려 김 부장을 생각해주는 ‘진짜 친구’에 가까워요. 김 부장에게도 힘들 때 위로가 되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설정한 인물이에요.
또 다른 쟁점인 ‘세대 갈등’ 일화도 흥미로웠는데요. 눈치 보는 김 부장과 눈치 안 보는 정 대리의 대립 구도, 직원 실적을 뺏는 김 부장과 당하는 권 사원의 불합리한 관계 등도 실제 직장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어요.
우리나라가 그동안 너무 보수적이었던 것 같아요. 요즘은 어디든 도로에서 외제차를 쉽게 볼 수 있어요. 누가 어떤 차를 타든 개인의 일인데, 그걸 가지고 예의범절 운운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봐요. 저는 아직도 낡은 차를 타지만, 김 부장과 같은 생각을 가진 분이 있다면 후배가 좋은 차를 타더라도 이해해줬으면 해요. 저 같은 낀 세대뿐 아니라 요즘 젊은 세대는 특히 합리적인 걸 원해요. 일을 못해서 낮은 평가를 받는다면 충분히 납득하지만, 노력했고 잘했는데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면 상실감을 느끼기 마련이죠. 실제로 ‘내가 왜 이 직장에 다니나’ 고민하는 후배들이 적지 않아요. 그 친구들은 상사나 회사에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그냥 합리적이기만 하면 되거든요. 소설 속 최 부장처럼 그걸 포용해주는 상사가 있으면 회사 생활에 훨씬 도움이 되겠죠.
권 사원은 하나부터 열까지 맞지 않은 남자 친구와 결혼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회의감을 느껴요. 젊은 세대들에게 ‘결혼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끔 의도하신 것 같았어요.
저는 물론 결혼을 후회하지 않지만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을 많이 하죠. 결혼을 앞둔 사람이라면 본인이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으면 해요. 예를 들어 퇴근 후 홀로 TV나 휴대폰을 보다가 잠이 들며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배우자를 찾을 수 있겠죠. 그런데 퇴근 후 게임에 빠져 산다든지, 즐길 거리가 많아서 내 영역에 누가 침범하는 게 싫은 사람이라면 떠밀리듯 결혼하진 말아야겠죠.
70세가 되도록 밤늦게까지 일하시는 아버지를 보고 45세 이전에 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10년 전부터 독서와 투자를 시작했다고 작가 소개를 통해 밝히셨어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45세 즈음에 자유로워지자는 것은 직장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경제적 여유에서 비롯된 마음의 자유를 의미해요. 10년간의 공부와 투자기는 앞으로 나올 3권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웃음). 저희 아버지는 작은 제조 공장을 운영하시는데, 말이 사장이지 노동자와 다름없으세요. 사장임에도 불구하고 한여름에 외국인 노동자와 고압을 쏘고, 프레스를 찍는 등의 일을 30년 넘게 해오셨어요. 곁에서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는 동안 아버지는 한 번도 불평불만을 하지 않으셨어요. 나라 탓, 경제 탓, 부모 탓 등을 하지 않으셨고 저도 자라면서 그런 부분을 배우려고 했어요. 제 아이에게 많은 부와 물질을 물려주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삶의 자세나 태도, 가치관은 물려주고 싶어요.
파이어족을 꿈꾸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김 부장 이야기’ 3권 집필에 드라마 대본 작업까지 병행하며 회사를 다니는 게 가능한가요.
남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면 회사 다니면서도 집필할 수 있어요. 전 머리가 특별히 좋지 않고 딱히 잘난 게 없어서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남들보다 배로 했어요. 공부도 친구들이 1시간이면 할 걸 저는 2시간씩 해야 했고요. ‘머리가 나쁘면 몸이라도 고생하자’는 게 몸에 배서 지금도 그렇게 살아요. 은퇴에 대해서는,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회사 월급 이외에 소득이 생기면 그만둘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만두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더라고요. 회사에서 배우는 게 많고, 늦게나마 노동의 가치도 알게 됐거든요. 이제는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기 전까지는 다니려고요. 은퇴 후에는 소설 속 ‘건물주 놈팡이’처럼 되는 게 꿈이에요.
극 중 송 과장이 부동산 고수로 등장해요. 작가님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어느 정도 수익을 내셨는지 궁금해요.
고수는 아니고 조금 공부한 정도예요. 제가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시간을 투자해서 같이 고민하고 선택에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죠. 극 중 송 과장은 제 롤 모델일 뿐 현실에서의 제 모습은 아싸에 가까워요(웃음). 부동산으로 어느 정도 자산을 쌓은 건 맞지만 구체적으로 계산해보지 않았을뿐더러 그게 알려지면 제가 그동안 했던 노력과 고생, 버텼던 자존감과 자존심이 숫자에 파묻힐 것 같아서 공개하고 싶지 않아요.
겸손하게 말씀하시지만 내공이 느껴지는데, 그러면 앞으로의 부동산 시장은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으로 말씀드리자면 부동산 가격은 계속 오를 거라고 봐요. 상식적으로 현금 흐름의 끝이 어디인가를 봐야 해요. 예를 들어 나라에서 보상금을 푼다고 하면, 그 돈의 끝은 결국 부동산으로 가기 마련이에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만 봐도 돈을 많이 벌면 고가 아파트나 건물을 사고, 주식으로 돈 좀 벌었다는 사람들도 건물을 사죠. 또 지난해 초 코로나19가 확산되고 주식 시장이 직격타를 맞았을 때 부동산은 꿈쩍하지 않았어요. 부동산은 거래 비용이 많이 들고 세금 문제도 있기 때문에 매매하기 까다로운 데다, 누군가 살고 있거나 장사를 하고 있어 쉽게 사고팔기 어려워요. 금리가 인상된다고 해도 한 달에 내는 이자가 몇십만원에서 몇백만원으로 오르는 게 아니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곧바로 하락하기는 쉽지 않죠. 이런 여러 요소를 종합해봤을 때 부동산 가격의 폭락은 오기 어렵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이 땅의 모든 김 부장과 직장인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어쩔 수 없이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죠. 돈을 벌어야 하고, 쉬고 싶어도 그 공백을 견디기 어려우니 쉽게 그만두지도 못해요. 어차피 다녀야 할 직장이라면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직장은 소중한 곳이며 자신 역시 소중한 존재라고요. 또 스스로를 좀 더 사랑하셨으면 해요. 개인적으로는 출근길과 아침 시간에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처음에는 경제, 경영, 재테크 책만 파고들었는데 몇 달 읽다 보니 결국 다 비슷한 내용이더라고요. 그래서 고전문학이라든지 자서전 등을 비슷한 비율로 읽기 시작했어요. 현인들의 인생을 간접 체험하면서 나 자신은 누구인가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됐어요. 그렇다고 뭔가 뾰족한 답이 생기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것들이 쌓이면 나를 더 알게 되고,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되고, 나중에 무엇을 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찾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최근에 인상적으로 읽은 책 한 권 추천 부탁드려도 될까요.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여류 작가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소설집 ‘삼십세’를 추천해요. 단편 7선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정말 세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 정도로 잘 읽히지 않더라고요. 계속 읽다 보니 조금씩 이해가 됐는데 결국은 사람의 본성에 관한 이야기더라고요. 생각할 거리가 많이 들어 있으니 시간이 나신다면 한번 읽어보길 권해요.
사진 조영철 기자
# 김 부장 팀의 에이스, 입사 11년 차 송 과장. 일도 잘하고 선후배들의 신뢰를 받는 타입. 아침 일찍 출근해 꾸준히 책을 읽으며 자기 계발을 하는 것 같더니, 상무부터 최 부장까지 송 과장에게 부동산 조언을 구한다. 최 부장의 재개발 아파트부터 상무의 재건축 아파트까지 모두 송 과장의 조언이 한몫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말단인 권 사원까지 부동산 투자에 가세한다. 평소 신뢰를 쌓은 덕에 부동산 계약을 이유로 연차 휴가를 내도 김 부장조차 눈치 주지 않는, 직장인들의 롤 모델이다.
# 강남 8학군 출신으로 맡은 일을 잘하고 공사 구분이 철저한 정 대리. ‘한 번 사는 인생 후회 없이 살자’는 모토에 충실한 진정한 욜로족이다. 중고로 뽑은 BMW를 타고 출근하며, 여자 친구와 명품과 와인 등을 SNS에 자랑하는 데 여념이 없는 MZ세대다.
# 팀의 막내, 입사 3년 차 권 사원.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근무하지만 맡은 일을 성실히 할수록 누군가 공을 가로채가고, 불합리한 평가를 받자 회사 생활에 회의감을 느낀다. 결혼을 앞두고 부동산 하락론자인 남자 친구와 신혼집을 구하는 문제를 놓고 갈등한다.
2021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캐릭터들, 부동산 문제부터 삶을 대하는 태도까지 각양각색의 면면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소설 한 편이 온라인상에서 주목을 받았다. 소설 제목도 세태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이하 ‘김 부장 이야기’)다. 지극히 이기적이며 자아도취에 빠진 김 부장부터 일뿐 아니라 재테크도 잘하는 송 과장, 한 번 사는 인생에 충실한 욜로족 정 대리, 정글 같은 조직 사회에 지쳐가는 권 사원까지…. 독자들은 나였고, 나일 것 같은 소설 속 캐릭터들에 깊이 빠져들었다.
작가는 실제 서울 용산에 위치한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과장 송희구(38) 씨다. 그는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지하철로 출근, 업무 시작 전에 쓴 소설을 지난해부터 자신의 블로그와 부동산 카페에 올렸다. 기대감 없이 올린 소설은 비슷한 위치에서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직장인들의 진한 공감을 샀고, 30일 만에 개인 블로그 조회수 2백만, 부동산 카페 조회수 1천만을 기록한 데 이어 일간지 1면 톱을 장식하기에 이르렀다. 누리꾼들은 2014년 드라마화로 대박이 난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을 떠올리며 김 부장의 스토리를 ‘제2의 미생’으로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이런 반응 덕에 스무 곳이 넘는 출판사에서 출간 제의가 이어졌고, 웹툰 및 드라마 제작사로부터 제작 의뢰도 쏟아졌다. 8월 말 2권의 책으로 출간된 ‘김 부장 이야기’는 각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오르며 순항 중이다. 현재 송 작가는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송 과장 이야기를 담은 3번째 시리즈 출간 계획과 함께 드라마 대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를 만나 궁금한 소설 뒷이야기와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 세상에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를 들었다.
한순간 작가가 된 11년차 대기업 과장 송희구 씨.
책이 나오기 전까지 이런 상황이 믿기지 않았어요. 출간과 동시에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는데 약간 얼떨떨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요. 사실 전 스스로를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소설을 봤다면 아시겠지만 문학적으로 의미가 있거나 아름다운 미사여구가 담긴 그런 작품은 아니에요. 기름기 쫙 뺀 무미건조한 말투의 현실적인 이야기로 가득해요. 그래서 작가라고 불리기엔 미흡하고, 아직도 그냥 직장인이라고 생각해요.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출근해서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을 듯한데, 원래 아침형 인간인가요.
전혀 아니에요. 입사하고 나서 어쩔 수 없이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어요. 오전 6시 30분 이전에 지하철을 타면 몇백원 할인받을 수 있는데 그게 쌓이면 크겠더라고요. 할인받으려고 일찍 다니던 게 습관이 돼서 지금까지 그렇게 출근하고 있어요. 첫차를 타고 회사에 도착하면 6시 10분 정도 돼요. 커피를 마시고 노트북을 켜면 딱 6시 30분이죠. 처음에는 책을 읽었고, 일기를 쓰거나 하루 일정을 미리 준비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김 부장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한번 써보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하게 됐죠.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주변 부장님들 대부분이 은퇴 이후의 생활을 걱정하면서도 대비는 거의 안 하시는 것 같았어요. 퇴직을 코앞에 두고 “뭐 한번 다른 데 취직해볼까?” “무슨 사업을 한번 해볼까?”라며 막연하게 구상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시작하면 대체로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그게 안타까워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요.
김 부장 같은 캐릭터는 주변에서도 쉽게 목격되는데, 실존 인물 3명을 모델로 하셨다고요. 어떤 분들인지, 출간 이후 그분들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한 분은 진짜 자신의 의견이 전부인 줄 알고 사셨어요. 부하 직원들에게 “너희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과장들이 막혀 있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편이었죠. 소설 속에서 상무가 김 부장에게 “회사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공감과 협업”이라고 말하는데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그런 김 부장의 면모는 그 부장님의 모습에서 비롯됐죠. 또 다른 분은 김 부장처럼 퇴직을 앞두고 신도시 상가를 분양받았다가 안타깝게 되셨어요. 그때 제게 전망이 어떻겠냐고 물어보시기에 극구 말렸는데 기어코 계약을 하시더라고요. 마지막 한 분은 정말 믹스커피를 좋아해서 엄청 많이 드시던 분이었어요. 그런데 다들 본인의 이야기인 줄 모르세요. 회사 내부적으로 “이게 나야?”라고 물어보신 분은 아직 없어요(웃음). 온라인에 소설을 올릴 때는 가명을 썼고, 소설로 나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아 그런 듯해요. 아마 다들 곧 알게 되겠죠.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건 아무래도 ‘부동산 이슈’ 때문일 듯해요. 신축 아파트 소유주인 최 부장, 재건축 조합원인 상무, 건물주 놈팡이 앞에서 구축 아파트 소유주인 김 부장은 주눅 들고 말죠. 부동산으로 계급화된 세태를 비판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그런 의도는 없었어요. 그저 주변의 누군가가 나보다 좋은 데 살면 질투가 나잖아요. 또 친구들 중에 누가 강남으로 이사 간다고 하면 ‘전세일까? 자가일까?’ 하며 물어보고 싶어지잖아요. 직접 묻지는 못하고 다른 경로로 알아보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 소소한 일화를 담고 싶었어요. 또 건물주 캐릭터를 넣은 이유는, 원래는 사는 게 나와 비슷했던 사람들이라도 나보다 더 잘살게 되면 위화감을 느끼게 마련인데 아예 ‘건물주’처럼 격차가 나면 질투하지 않잖아요. 그런 사람들의 묘한 심리를 다루고 싶었어요. 사실 건물주인 놈팡이는 오히려 김 부장을 생각해주는 ‘진짜 친구’에 가까워요. 김 부장에게도 힘들 때 위로가 되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설정한 인물이에요.
또 다른 쟁점인 ‘세대 갈등’ 일화도 흥미로웠는데요. 눈치 보는 김 부장과 눈치 안 보는 정 대리의 대립 구도, 직원 실적을 뺏는 김 부장과 당하는 권 사원의 불합리한 관계 등도 실제 직장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어요.
우리나라가 그동안 너무 보수적이었던 것 같아요. 요즘은 어디든 도로에서 외제차를 쉽게 볼 수 있어요. 누가 어떤 차를 타든 개인의 일인데, 그걸 가지고 예의범절 운운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봐요. 저는 아직도 낡은 차를 타지만, 김 부장과 같은 생각을 가진 분이 있다면 후배가 좋은 차를 타더라도 이해해줬으면 해요. 저 같은 낀 세대뿐 아니라 요즘 젊은 세대는 특히 합리적인 걸 원해요. 일을 못해서 낮은 평가를 받는다면 충분히 납득하지만, 노력했고 잘했는데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면 상실감을 느끼기 마련이죠. 실제로 ‘내가 왜 이 직장에 다니나’ 고민하는 후배들이 적지 않아요. 그 친구들은 상사나 회사에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그냥 합리적이기만 하면 되거든요. 소설 속 최 부장처럼 그걸 포용해주는 상사가 있으면 회사 생활에 훨씬 도움이 되겠죠.
권 사원은 하나부터 열까지 맞지 않은 남자 친구와 결혼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회의감을 느껴요. 젊은 세대들에게 ‘결혼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끔 의도하신 것 같았어요.
저는 물론 결혼을 후회하지 않지만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을 많이 하죠. 결혼을 앞둔 사람이라면 본인이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으면 해요. 예를 들어 퇴근 후 홀로 TV나 휴대폰을 보다가 잠이 들며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배우자를 찾을 수 있겠죠. 그런데 퇴근 후 게임에 빠져 산다든지, 즐길 거리가 많아서 내 영역에 누가 침범하는 게 싫은 사람이라면 떠밀리듯 결혼하진 말아야겠죠.
11년 차 꼰대? 소설 속 송 과장이 롤 모델인 아싸
직장인의 시간은 빨리 흐른다. 송 작가도 입사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1년 차 과장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대학에서 응용수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전공과 전혀 관계없는 회사에 오랜 기간 몸담으며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월급 외 수입이 생기면 조기 은퇴할 생각도 있었으나 아직까지 회사에서 배우는 것이 많고, 나이 들수록 노동의 가치를 느끼기에 성실히 근무하고 있다고. 묵묵히 자기 삶을 사는 아버지로부터 배운, 삶을 대하는 태도를 그대로 물려받은 송 작가는 자식에게도 이를 물려주는 것이 유일한 꿈이라고 했다.70세가 되도록 밤늦게까지 일하시는 아버지를 보고 45세 이전에 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10년 전부터 독서와 투자를 시작했다고 작가 소개를 통해 밝히셨어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45세 즈음에 자유로워지자는 것은 직장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경제적 여유에서 비롯된 마음의 자유를 의미해요. 10년간의 공부와 투자기는 앞으로 나올 3권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웃음). 저희 아버지는 작은 제조 공장을 운영하시는데, 말이 사장이지 노동자와 다름없으세요. 사장임에도 불구하고 한여름에 외국인 노동자와 고압을 쏘고, 프레스를 찍는 등의 일을 30년 넘게 해오셨어요. 곁에서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는 동안 아버지는 한 번도 불평불만을 하지 않으셨어요. 나라 탓, 경제 탓, 부모 탓 등을 하지 않으셨고 저도 자라면서 그런 부분을 배우려고 했어요. 제 아이에게 많은 부와 물질을 물려주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삶의 자세나 태도, 가치관은 물려주고 싶어요.
파이어족을 꿈꾸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김 부장 이야기’ 3권 집필에 드라마 대본 작업까지 병행하며 회사를 다니는 게 가능한가요.
남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면 회사 다니면서도 집필할 수 있어요. 전 머리가 특별히 좋지 않고 딱히 잘난 게 없어서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남들보다 배로 했어요. 공부도 친구들이 1시간이면 할 걸 저는 2시간씩 해야 했고요. ‘머리가 나쁘면 몸이라도 고생하자’는 게 몸에 배서 지금도 그렇게 살아요. 은퇴에 대해서는,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회사 월급 이외에 소득이 생기면 그만둘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만두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더라고요. 회사에서 배우는 게 많고, 늦게나마 노동의 가치도 알게 됐거든요. 이제는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기 전까지는 다니려고요. 은퇴 후에는 소설 속 ‘건물주 놈팡이’처럼 되는 게 꿈이에요.
극 중 송 과장이 부동산 고수로 등장해요. 작가님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어느 정도 수익을 내셨는지 궁금해요.
고수는 아니고 조금 공부한 정도예요. 제가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시간을 투자해서 같이 고민하고 선택에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죠. 극 중 송 과장은 제 롤 모델일 뿐 현실에서의 제 모습은 아싸에 가까워요(웃음). 부동산으로 어느 정도 자산을 쌓은 건 맞지만 구체적으로 계산해보지 않았을뿐더러 그게 알려지면 제가 그동안 했던 노력과 고생, 버텼던 자존감과 자존심이 숫자에 파묻힐 것 같아서 공개하고 싶지 않아요.
겸손하게 말씀하시지만 내공이 느껴지는데, 그러면 앞으로의 부동산 시장은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으로 말씀드리자면 부동산 가격은 계속 오를 거라고 봐요. 상식적으로 현금 흐름의 끝이 어디인가를 봐야 해요. 예를 들어 나라에서 보상금을 푼다고 하면, 그 돈의 끝은 결국 부동산으로 가기 마련이에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만 봐도 돈을 많이 벌면 고가 아파트나 건물을 사고, 주식으로 돈 좀 벌었다는 사람들도 건물을 사죠. 또 지난해 초 코로나19가 확산되고 주식 시장이 직격타를 맞았을 때 부동산은 꿈쩍하지 않았어요. 부동산은 거래 비용이 많이 들고 세금 문제도 있기 때문에 매매하기 까다로운 데다, 누군가 살고 있거나 장사를 하고 있어 쉽게 사고팔기 어려워요. 금리가 인상된다고 해도 한 달에 내는 이자가 몇십만원에서 몇백만원으로 오르는 게 아니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곧바로 하락하기는 쉽지 않죠. 이런 여러 요소를 종합해봤을 때 부동산 가격의 폭락은 오기 어렵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이 땅의 모든 김 부장과 직장인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어쩔 수 없이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죠. 돈을 벌어야 하고, 쉬고 싶어도 그 공백을 견디기 어려우니 쉽게 그만두지도 못해요. 어차피 다녀야 할 직장이라면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직장은 소중한 곳이며 자신 역시 소중한 존재라고요. 또 스스로를 좀 더 사랑하셨으면 해요. 개인적으로는 출근길과 아침 시간에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처음에는 경제, 경영, 재테크 책만 파고들었는데 몇 달 읽다 보니 결국 다 비슷한 내용이더라고요. 그래서 고전문학이라든지 자서전 등을 비슷한 비율로 읽기 시작했어요. 현인들의 인생을 간접 체험하면서 나 자신은 누구인가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됐어요. 그렇다고 뭔가 뾰족한 답이 생기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것들이 쌓이면 나를 더 알게 되고,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되고, 나중에 무엇을 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찾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최근에 인상적으로 읽은 책 한 권 추천 부탁드려도 될까요.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여류 작가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소설집 ‘삼십세’를 추천해요. 단편 7선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정말 세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 정도로 잘 읽히지 않더라고요. 계속 읽다 보니 조금씩 이해가 됐는데 결국은 사람의 본성에 관한 이야기더라고요. 생각할 거리가 많이 들어 있으니 시간이 나신다면 한번 읽어보길 권해요.
사진 조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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