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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과수의 실제 모습, 지금도 잊지 못하는 사건은…”

드라마 ‘싸인’으로 관심 집중! 정희선 원장이 들려주는

글·김민지 기자 사진·지호영 기자 동아일보 사진 DB파트

입력 2011.03.16 14:22:00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을 줄 몰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법의학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싸인’이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전문직 드라마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드라마를 위해 처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문을 열기로 결심한 이는 정희선 원장.
그는 “음지에서 열정적으로 일하는 국과수 직원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돼 기쁘다”고 했다.
“국과수의 실제 모습, 지금도 잊지 못하는 사건은…”


더 이상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이란 단어가 생소하지 않다. 하루에 수백 건도 넘게 일어나는 사건들이 국과수를 그냥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발생한 ‘쥐식빵’ 자작극, 삼호주얼리호 석해균 선장 총알 사건 등 크고 작은 사건의 단초들이 국과수를 통해 알려졌고, 사건의 진위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가장 먼저 마주하는 만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진실 규명이 가능한 희망찬 곳.’ 정희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55)이 말하는 국과수의 정의다. “3년만 버텨보자며 근무한 국과수에서 어느덧 33년째를 보내고 있다”는 그는 국과수 최초 여성 원장이다. 2008년 이 자리에 앉은 뒤 올해 마지막 임기를 보내고 있다.
“사건·사고와 관련된 증거물을 가지고 과학적인 관찰과 실험을 통해 진실을 밝혀내는 게 국과수의 임무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국과수’란 단어에서 차가운 부검실을 먼저 떠올리지만 사건 해결에 도움 되는 실마리를 찾는 모든 일에 관여하고 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합니다.”
정 원장은 최근 SBS 수목드라마 ‘싸인’ 덕분에 “많은 분들이 국과수에 관심 가져줘 고맙고 놀랍다”는 말부터 꺼냈다. 지난해 처음 국과수와 관련된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는 제의를 받았을 때 그는 많은 고민을 했다. 이제껏 한 번도 국과수를 공개한 적이 없는 데다 드라마에서 국과수란 특수한 조직이 어떻게 비춰질까 내심 걱정됐기 때문.
정 원장은 이런 부담 때문에 처음엔 “안 하겠다”고 고사했다. 그러자 드라마 제작진이 “도와주지 않아도 어떻게든 해볼 것”이라며 오기를 부렸다. 그는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며 드라마 촬영과 자문 협조를 수락했다.
‘한국판 CSI(범죄과학수사대)’로 불리는 드라마 ‘싸인’은 국과수 소속 법의학자들이 사건을 해결하려고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기 아이돌 가수의 의문사, 뺑소니를 위장한 연쇄살인 사건 등 실제 일어났을 법한 일들을 에피소드로 구성해 시청자들로부터 극적 긴장감과 몰입도를 높였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러나 정 원장은 극중 감정 결과가 왜곡되거나 뒤바뀌는 부분, 국과수 원장이 지나치게 권력욕을 추구하는 설정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드라마의 극적 요소를 위해 국과수의 실제 모습과 다른 점을 그려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혹시나 사람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진 않을까 우려해서다.
“국과수는 ‘권력’의 요구나 기관의 이익을 위해 감정 결과를 왜곡하거나 조작하지 않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생기지 않도록 꼭 얘기하고 싶었어요. 국과수 직원들 모두 한번 맡은 사건에 대해서는 자신의 양심을 걸고 일합니다. 사건의 본질을 좌지우지하는 감정 결과는 다양한 과학적 분석과 실험 과정에 따라 이뤄지기 때문에 절대 변할 수 없습니다. 죄 있는 사람과 죄 없는 사람을 가를 수 있는 게 오로지 감정 결과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건 담당자가 감정서를 쓸 때 ‘정성을 넘어 혼이 들어간다’고 말할 정도예요. 또 원장 자리를 놓고 암투를 벌이는 일 역시 상상하기 힘들죠. 아시다시피 공무원 사회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래서 ‘드라마는 드라마’인 것 같아요. 국과수 직원들은 국민의 안전과 치안을 책임진다는 데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 원장은 “국과수 직원들의 사건에 대한 ‘집념과 ‘열정’만큼은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며 “국과수가 드라마 소재로 차용되면서 얻게 된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고 했다.
“사건은 음지에서 일어나고, 저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다 보니 그 과정이 알려지긴 힘들죠. 그래도 사건 하나를 맡으면 며칠씩 밤새워가며 일을 합니다. 깜빡 잠들었다가 꿈속에 사건이 나타나는 경험을 누구나 한 번씩 할 만큼 사건 해결에 대한 열의와 애착은 대단하죠.”

국내 최고의 약물·독물 전문가
현재 국과수 직원은 2백99명. 그중 여성 직원은 20% 정도다. 하지만 정 원장이 1978년 처음 입사했을 때 여성은 그를 포함해 3명에 불과했다. 여성 불모지인 국과수에 입사하겠다고 마음먹은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숙명여대 약학과 3학년 시절, 당시 국과수 소장이 강연을 오셨어요. 강연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국과수라는 곳이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느껴졌어요. 최근 대학 친구들을 만나 그때가 기억나느냐고 물으니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제가 정말 국과수와 인연이 있었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죠(웃음).”

“국과수의 실제 모습, 지금도 잊지 못하는 사건은…”


하지만 입사 초기 적응은 쉽지 않았다. 약사 출신인 그는 직접 시신을 부검하지는 않았지만 사인 분석을 위해 위 속 내용물 검사를 도맡아야만 했다. 고약한 냄새뿐 아니라 생긴 것 자체만으로도 혐오감을 주다 보니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을 법했다.
“쉽지 않았죠. 같이 일하던 여성 직원 두 분마저 그만두는 걸 지켜봤어요. 그래도 주변에서 ‘3년만 참고 일해보라’며 격려를 많이 해주셨죠.”
그가 국과수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맹활약할 수 있도록 도운 이들은 정 원장이 ‘평생 멘토’로 꼽는 두 사람, 그의 남편이자 8대 소장을 지낸 유영찬씨(68)와 고(故) 우상덕 박사다. 정 원장과 남편은 ‘국과수 최초 부부 소장’으로도 유명하다. 정 원장은 “남편은 입사 초기부터 오랫동안 함께해온 상사이자 동반자”라며 “지금은 국과수를 퇴임했지만 늘 힘이 돼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2대 소장을 지낸 우상덕 박사는 법의학자 출신이었지만 늘 그에게 조언하며 국과수 업무의 재미를 일깨워줬다.
“80년대, 당시 여자 혼자 미국으로 연수를 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우 박사님 덕분에 공부하러 떠날 수 있었어요. 또 자신의 법의학 책을 개정할 때마다 제게 법화학 부분의 정리를 맡겨주셨어요. 의대 교과서로 쓰이는 저서에 제가 실험한 내용이 들어간다는 건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었죠. 박사님은 그런 저를 칭찬해주면서 국과수 일에 재미를 붙일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어요.”
그는 전문 분야로 약물·독물과 마약을 택했다. 이후 2002년 여성 최초 법과학부장을 맡을 정도로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관련 특허를 4개나 보유했고, 최근 5년간 국내외 학술지에 마약 등과 관련된 연구논문 40편을 게재했다.
그동안 수많은 사건을 처리하며 종지부를 찍었건만 아직까지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힘든 경험은 1995년 듀스 김성재 사망 사건이다. 드라마 ‘싸인’의 첫 에피소드인 아이돌 가수 의문사 살인 사건이 김성재 사건과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전하자 그는 이내 말을 아꼈다.
“전 이 사건을 늘 기억에 남는 부분이라 꼽으며 얘기해왔는데 고인의 가족 분들에게 누가 되는 것 같아 더 이상 말씀드리기가 죄송스럽네요.”
당대 최고 인기 가수의 죽음만으로 엄청난 주목을 받았던 이 사건의 사망 원인을 찾기 위해 그는 일주일 이상 꼬박 밤샘을 했다. 보통 약물 관련 사망 사건이 발생할 경우 통상 3만 종 이상의 약물을 조사하면 결과가 나오는데 이 사건의 경우 13만 종을 조사한 뒤에야 간신히 비슷한 화합물을 찾았다고 한다. 그는 “팀원 전체가 사건에 관한 꿈을 한 번 이상 꿨을 만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회상하면서 “이렇게 힘든 경우도 있었지만 일하면 일할수록 과학수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정 원장은 드라마를 계기로 많은 홍보가 된 법의학부 이외에 국과수의 다른 부서들이 해온 일들에 대해 알리고 싶어 했다. 부검을 비롯해 심리조사, 문서나 영상을 판독하는 일을 담당하는 법의학부 외에 약·독물, 마약, 화학·물리 분석, 교통공학과를 포함하는 법과학부와 세계적으로도 뛰어난 DNA 분석 기술을 갖고 있는 유전자감식센터가 있다. 부서에 따라 일의 차이는 있지만 사건 해결을 돕는 결정적 증거를 찾기 위해 각 과는 전문성을 살려 유기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2008년 일어난 경기도 이천 냉동물류창고 화재 사건을 기억하실 거예요. 사고 4일째 되던 날 현장을 방문했는데 그곳에 가자마자 말문이 막혀버렸죠. 전기가 나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국과수 화재 감식반 직원들이 화재 원인을 찾겠다고 며칠 밤을 새우며 일하는 거예요. 솔직히 전 그곳에서 한 시간 버티기도 힘들었어요. 너무 깜깜한 데다 다 타버린 현장이다 보니 공기도 좋지 않아 어지럽더라고요. 그러나 직원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일했습니다. 오히려 죄 없이 죽어간 피해자들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죠.”
정 원장은 연쇄살인의 결정판이라 불리는 2003년 유영철 사건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영상분석실의 활약도 소개했다. 당시 유영철이 범인이라는 증거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서울 혜화동 근처 CCTV에 유영철과 비슷한 남자가 찍힌 것을 발견했다. 국과수 영상분석실은 CCTV 사진만으로도 실제 키를 계산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개발했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 “유영철이 진범이라는 결정적 단서를 찾아냈다”고 말했다.



“국과수의 실제 모습, 지금도 잊지 못하는 사건은…”


이후 정 원장은 몇 년 전 신문과 방송 헤드라인을 줄줄이 쏟아냈다. 국과수의 그간 업적들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였다. 2008년 숭례문 방화 살인 사건 피의자 채모씨의 신발에 묻은 극소량의 염료를 결정적인 증거로 잡아냈던 일, 2009년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 때 강호순의 옷에서 10억 분의 1g에 불과한 혈흔을 찾아냈던 일 등 마치 그때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듯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말하던 그는 “그중 2006년 서래마을 영아 유기 사건은 우리나라 국과수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높일 수 있었던 소중한 사례”라고 강조했다.
“서래마을 영아 유기 사건이 큰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감정 결과가 옳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였기 때문이죠. DNA 분석을 통해 프랑스인 아내 베로니크 쿠르조가 범인이라는 증거를 찾았어요. 이 시료를 프랑스에 줬는데 나중에 들리는 이야기로 프랑스가 자국 내 세 군데 연구기관에서 실험해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이 사건으로 국민에겐 국과수의 감정 결과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줬고, 국과수 직원들에겐 세계 내로라하는 선진국의 과학수사와 우리가 큰 차가 없다는 자긍심을 품어줬습니다.”

국민 1백60만 명당 국과수 직원 1명
하지만 정 원장은 이런 가시적인 성과만으론 만족하지 않는다. 아직도 국과수에는 많은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국민 1백60만 명당 국과수 직원이 1명이다. 즉 1백60만 명의 사건을 1명의 국과수 직원이 맡고 있는 셈. 국민 50만 명당 1명인 일본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처럼 열악한 근무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다. 법의관 수도 턱없이 부족하다. 현재 국과수 법의관은 모두 19명. 1명당 연간 2백50건의 사건을 맡고 있다. 원래 정원은 23명이나 네 자리가 공석이다.
“부족한 인력의 문제가 크다 보니 법의관들이 수사권을 가지고 현장에 나가 시신을 직접 보고 분석한다는 게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는 수사기관이 현장에 나가 판단한 다음 부검하는 시스템이기도 하고요.”
정 원장은 이런 문제들이 “단시간에 해결되진 않겠지만 남은 임기 1년간 짊어져야 할 숙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조금 희망이 보인다”며 말을 이어갔다.
“지난해 국과수가 ‘소’에서 ‘원’으로 승격되면서 ‘NFS(National Forensic Service)’로 엠블럼을 바꿨어요. 국과수 로비에서 종종 드라마 촬영을 하는데 덕분에 이 엠블럼이 메인 화면에 잡힐 때가 많죠. 그 때문인지 최근 국과수 직원이 놀랄 만한 일이 있다며 제게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지인의 아이가 자신의 표찰을 보고 ‘아! 드라마에 나오는 NFS다’라고 소리치면서 ‘정말 여기 다니는 게 맞냐. 국과수에 관심이 많다’며 호감을 표했다는군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 ‘드라마 홍보 효과란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알려진 만큼 젊은 사람들이 관심 갖고 꿈꿀 수 있는 곳이 되면 좋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했죠(웃음).”
정 원장의 책상 뒤로 ‘진실을 밝히는 과학의 힘’이란 글귀가 보였다. 그는 글귀를 또박또박 읽어가면서 “이 문장만큼 국과수를 잘 표현하는 말도 없다”며 환히 웃었다.
“저는 누구보다 이 일을 즐기면서 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남은 임기 1년간 국과수 일에만 전념할 거예요. 우리나라 법과학 기술을 세계에서 인정받기 위해 먼저 아시아를 선도하고 대표하는 국과수로 키우겠습니다.”

“국과수의 실제 모습, 지금도 잊지 못하는 사건은…”

1 시신의 부검이 이뤄지는 법의학과 부검실. 19명의 법의관들은 이곳에서 1년에 3천~4천 건의 사건을 처리한다. 2 국과수 직원들은 화재나 교통사고 등 사건 현장을 직접 찾아가 사고 원인을 찾기 위한 작업을 벌인다. 지난 2003년 일어난 대구지하철방화참사 당시 국과수 직원들이 실종자 유류품을 모아둔 대구 동구 안심차량기지에서 재조사를 벌이는 모습.



여성동아 2011년 3월 5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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