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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꼭 한번 가봐야할 곳

안동 하회마을·경주 양동마을 여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글 한은희 사진 동아일보 사진DB파트, 한은희 제공

2010. 09. 03

지난 8월1일, 유네스코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양반마을인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경북 안동시와 경주시에 자리한 두 마을은 오랜 시간 씨족사회를 유지하며 고유의 주거양식과 문화를 보존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찰스 황태자를 비롯해 우리의 전통문화를 만나기 위해 이 마을들을 찾은 외국인도 많았다. 두 마을을 찾아 새로운 눈으로 우리의 문화유산을 만나보자.

안동 하회마을·경주 양동마을 여행

부용대 정상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전경.



#풍산 류씨 집성촌 안/동/하/회/마/을/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자리한 하회마을 (054-854-3669 www.hahoe.or.kr)은 낙동강이 버선목처럼 감싸고 돌아가는 물돌이동이다. 풍산 류씨 집성촌으로 약 1백30채의 고택이 있다. 기와집은 물론 초가집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마을로 손꼽힌다. 그런데 이 마을 집들은 옛 선조들이 으뜸이라 하던 정남향으로 지어지지 않았다. 대문의 방향도 집마다 제각각이다. 이는 하회마을 전망대라 불리는 부용대에 올라 보면 더욱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예부터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조건이 ‘배산임수’다. 집 뒤로 산을 두고 집 앞쪽으로 강을 두어 시야를 확보하고 생활용수를 얻기 쉽게 한 것. 그렇다면 하회마을의 집들은 왜 제각각의 방향으로 지어졌을까? 대답은 저마다 집을 짓는 위치에서 배산임수의 명당조건을 갖춘 방향으로 대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을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신당을 중심으로 마을을 감싸고 빙 돌아가는 낙동강을 바라보도록 집을 지은 것. 지금의 독특한 마을 구조가 생겨나게 된 이유이다. 마을에서 찾을 수 없는 것도 있다. 바로 우물이다. 물 한가운데 떠 있는 연꽃 같다 하여 연화부수형이라고 불리는 마을지형의 또 다른 모습이 앞으로 나아가는 배의 모습이라고. 마을에 우물을 파는 것은 배 밑바닥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다 하여 어느 집도 우물을 팔 수 없었다 한다. 집집마다 필요한 물은 강에서 직접 길어다 먹었다.

너른 길로 나뉘는 북촌과 남촌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마을에 도착하면 관광안내소와 영국여왕방문기념관이 있다. 그곳에서부터는 마을 안쪽 길이 이어진다. 승용차 한 대가 넉넉히 지나갈 만큼 폭넓은 마을길은 현대에 들어 넓힌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마을이 만들어질 당시부터 이미 지금처럼 폭넓은 길이 만들어졌다고. 이는 양반들의 사인교가 서로 엇갈려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넓이를 확보한 것이라고 한다. 사인교를 탈 만큼 출세한 양반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흔적이다.
길을 기준으로 북촌과 남촌이 나뉜다. 들어가면서 오른쪽이 북촌, 왼쪽이 남촌이다. 북촌과 남촌은 각각 그 마을이 배출한 대표 인물들의 공간으로도 상징된다. 형제간인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이다. 하회마을에는 ‘겸암이 없으면 서애도 없다’는 말이 전해진다. 겸암이 출사를 마다하고 집안을 지키며 후학을 길러냈기 때문에 서애가 정사에 매진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들의 우애는 마을에 자리한 각자의 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길 하나를 중심으로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기는 하지만 형제의 집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 풍산 류씨의 대종가이자 류운룡의 공간인 양진당(보물 제306호),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류성룡의 공간인 충효당(보물 제414호)이 그것이다. 하지만 정작 북촌과 남촌의 이름을 가진 집들은 따로 있다. 북촌댁이라 불리는 화경당(중요민속자료 제84호)과 남촌댁이라 불리는 염행당(중요민속자료 제90호)이다. 이 중 현존하는 하회마을의 가장 큰 집인 북촌댁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나눔과 배려를 실천한 집, 북촌댁
북촌댁(www.bukchondaek.com)의 역사는 서애의 후손으로 정조를 가까이에서 보필한 학서 류이좌의 아버지 류사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정조 21년(1797)에 작은사랑 건물과 건물 양옆에서 꺾여 이어지는 날개건물을 지은 것. 학서의 증손자인 류도성이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을 지어 지금의 모습을 완성한 것은 철종 13년(1862)이다.
이 집에는 남자들이 거주하는 세 개의 사랑이 있다. 첫 번째는 하회마을의 풍경을 가장 잘 누릴 수 있는 큰 사랑채 ‘북촌유거’이다. 별채로 만들어진 큰사랑은 할아버지의 공간이자 찾아오는 손님의 공간이다. 너른 마루와 밭전(田)자 형으로 이루어진 방의 모습이 이색적이다. 두 번째 사랑인 중사랑 ‘화경당’과 세 번째 사랑인 작은사랑 ‘수신와’는 안채와 이어진 ㅁ자 건물 앞쪽에 자리하고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 바깥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안채로 드나들 수 있는 문을 낸 것이 두 곳의 특징이다. 아버지의 공간인 화경당에서 안채로 이어지는 문을 열면 어머니 방으로 갈 수 있는 마루가 이어진다. 손자의 공간도 재미있다. 6세까지 어머니와 함께 안채에서 생활하다 7세가 되면서 사랑채로 나와 생활하게 된 손자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안채로 드나들 수 있도록 아이 몸집에 맞는 작은 문을 만들어두었다. 두 문은 모두 각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안동 하회마을·경주 양동마을 여행

1 북촌댁으로 올라가는 길목은 정감이 넘친다. 2 서애 류성룡의 생가인 충효당. 3 북촌댁에서 바라본 사랑채와 대문채. 4 하회마을 입구의 장승.





안동 하회마을·경주 양동마을 여행

1 소나무가 울창한 만송정. 2 존덕사 입구에서 본 병산서원 풍경. 3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인 병산서원.



사랑채에 담긴 배려는 북촌댁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중 으뜸은 큰사랑 북촌유거를 짓기 위해 준비해두었던 목재를 홍수 때 강물에 밀어넣어 사람들을 구하고 남아 있는 목재에는 불을 붙여 주위를 밝히는 데 사용한 일이다. 지금의 북촌유거는 이후 새로 마련한 목재로 지어졌다고.
담장과 붙어 있는 화장실에도 배려가 담겨 있다. 화장실을 두 칸으로 나누어 하나는 담장 안쪽으로, 다른 하나는 담장 바깥으로 냈는데 바깥쪽으로 낸 화장실은 길을 가는 사람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다.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화장실을 관리해야 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다.
대문채에서도 배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양반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행랑채가 없는 것이다. 이 집의 대문채에는 행랑채 대신 곳간과 가마보관소가 있다. 이는 노비들도 밤 시간만큼은 가족과 지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인근에 초가 10여 채를 지어 그날의 당직노비 이외에는 모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쉬게 했다고. 한집에서 같이 살지 않고도 도망 가는 노비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북촌댁 사람들의 후한 인심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집에 담긴 마지막 배려는 소작인들과의 관계다. 북촌댁은 소작인들과의 수확배분법이 남달랐다. 주인과 소작인이 수확을 반반씩을 나누는 기본적인 수확배분도 획기적이었지만 소작인들의 집에 돈 쓸 일이 있을 때는 거꾸로 그들에게 더 많은 수확을 나누어 주었다고. 이런 이유로 동학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이 집만은 무사했다고 한다.
북촌댁에는 살펴봐야 할 보호수 2그루가 있다. 북촌유거 뒤쪽에 자라고 있는 하회소나무와 안채 뒤뜰로 이어지는 곳에 자라는 탱자나무다. 하회소나무는 줄기가 S자로 휘어진 수령 3백여 년의 소나무. 나무의 휘어진 모습이 하회마을의 지형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하다 하여 하회소나무란 이름을 얻었다고. 또 하나의 보호수인 수령 4백50여 년의 탱자나무를 보려면 북촌댁에서 숙박을 해야 한다. 아침식사 후 종손과 함께 집안 곳곳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것. 그때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안채 뒷마당에 들어갈 수 있다. 탱자나무 뒤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면 너른 텃밭이 있다. 그곳은 딸들의 공간이었다고. 뾰족한 가시를 가진 탱자나무가 딸들의 공간으로 삿된 기운이 넘어가지 않도록 지키고 선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하회마을 풍류 즐기기
하회마을에는 고택 이외에도 즐길 것이 많다. 마을 가운데 자리한 삼신당에 원하는 것을 써 넣은 소지를 달고 소원 빌기, 마을사람들의 놀이 즐기기 등이다.
마을사람들의 놀이는 선비들이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풍류를 즐기던 ‘선유줄불놀이’와 상민들의 놀이인 ‘하회별신굿탈놀이(www.hahoemask. co.kr)’로 나뉜다. 선유줄불놀이는 매년 가을 열리는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054-840-6398 www.maskdance.com) 기간에만 볼 수 있는 특별한 놀이다. 9월24일부터 10월3일까지 축제기간 중 토요일 저녁 하회마을을 찾으면 우리 음악과 함께 풍산 류씨 후손들이 만송정 강가에서 재현하는 선유줄불놀이에 참가할 수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하회마을입구 왼쪽에 자리한 전수관에서 매주 수·토·일요일 오후 2시부터 3시까지 공연된다.
하회마을 입장료는 어른 2천원, 청소년 1천원, 어린이 7백원이며 주차비는 승용차 기준 2천원이다. 주차장에서 마을입구까지 운행하는 버스요금은 어른 5백원, 청소년 4백원, 어린이 2백50원이다.

닫힌 듯 열린 공간, 열린 듯 닫힌 공간, 병산서원
병산서원(www.byeongsan.net)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교건축물로 풍산 류씨의 교육기관이자 사당이다. 하회마을을 감싸고 있는 화산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서원 입구에 서면 서원 안쪽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저 복례문과 그 뒤쪽의 만대루 지붕만 보이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안쪽을 볼 수 없는 설계인 것. 하지만 안쪽에서 바깥을 보는 풍경은 막힘이 없다. 만대루를 지나 학당 건물인 입교당 앞에 서면 사각형의 하늘 너머로 자연풍광이 활짝 펼쳐지는 것. 입교당 뒤편 배롱나무가 활짝 꽃을 피운 8월이면 그 화려함은 극치를 이룬다. 만대루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고 앉았자면 옛날 이곳에서 자연과 함께 공부했을 유생들의 모습도 그려진다.
병산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는 존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존덕사는 류성룡과 그 아들인 류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곳에서 매년 음력 3월 초정일과 음력 9월 초정일에 춘추향사가 올려진다. 안동포를 차려입은 유림들의 제향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이다. 평상시에는 존덕사 계단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곳에 서서 바라보는 병산서원의 풍경도 아름답다.

여/ 행/ 정/ 보/
[ 찾아가는 길 ]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를 나와 34번 국도 예천 방향으로 좌회전. 하회마을 이정표 따라 내려와 916번지방도로 진입. 하회삼거리에서 좌회전해 하회마을 방향으로 가다 마을 입구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병산서원 방향, 우회전하면 하회마을로 길이 이어진다.

안동 하회마을·경주 양동마을 여행


[ 맛집 ] 하회마을 입구에 장터가 있다. 그중 비빔밥·잔치국수 등 간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하회길목식당(054-843-5514)과 안동간고등어정식·헛제삿밥 등을 먹을 수 있는 옥류정(054-854-8844)이 괜찮다. 안동역 인근의 문화갈비(054-857-6565)는 전통간장으로 살짝 양념해 내는 깔끔한 소갈비로 이름난 곳이다.
[ 숙박 ] 하회마을 내 북촌댁(019-228-1786 www.bukchondaek.com), 후소당(054-842-6500 http://cafe.naver.com/hahoewhosodang.cafe), 작천고택(054-853-2574) 등에서 민박할 수 있다. 숙박료는 객실의 수준에 따라 다양하다. 3만~20만원 선. 안동시내에 자리한 임청각(054-853-3455, www.imcheonggak.com)과 안동역 앞에 자리한 안동파크호텔(054-853-1500~1 www.parkhotel.or.kr)도 깔끔하다.

안동 하회마을·경주 양동마을 여행

양동마을 손씨 집성촌의 아름다운 전경.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집성촌 양/동/마/을/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자리한 양동마을은 설창산 문장봉에서 뻗어내린 물(勿)자 지형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형산강 지류인 기계천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풍년을 기약할 수 있는 안강 들녘이 있어 천혜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마을사람들은 물(勿)자 지형이 바뀌는 것은 어떤 일이든 극구 마다한다고. 양동마을 인근으로 지나는 기차가 마을로 지나지 못하고 조금 떨어져 지나가는 이유다.
마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성주산 위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석곽묘들로 미루어 강과 들, 산이 있는 이곳이 살기 좋은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처럼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모여 마을을 이루게 된 것은 약 5백50년 전부터. 원래 이곳에 살던 풍덕 류씨인 류복하의 무남독녀에게 손소가 장가들어 이주해오면서부터라고. 그후 손소의 딸에게 여강 이씨인 이번이 장가를 들어 옮아오면서 양동마을은 두 성씨가 나란히 살아가는 마을이 됐다. 양 가문에서는 고루 이름난 인물들을 배출했다. 손소의 아들인 우재 손중돈, 이번과 손중돈의 여동생 사이에서 난 회재 이언적이 그들이다. 조선의 청백리로 손꼽히는 손중돈은 일찍 아비를 잃은 외조카를 귀히 여겨 가르침을 주었고, 이언적은 그런 손중돈을 따라다니며 충실히 배움을 넓혀간 것. 마치 그들의 학문적 교류를 풀어내듯 마을의 집들도 손씨와 이씨의 집들이 어깨를 마주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언덕 위에는 양반 집, 평지에는 노비 집
양동마을(054-7779-6105 yangdong.invil.org)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언덕 위의 집들이다. 멀리서도 눈에 들어올 만큼 크고 웅장한 기와집들이다. 왜 평지를 두고 너른 집을 짓기 어려운 언덕 위로 기와집들이 올라갔을까? 그 이유는 형산강과 안강 들녘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을 지나는 형산강의 물길이 좁아 많은 비가 내리면 강물이 넘쳐 안강들 가득 물이 차올랐다. 들녘을 채우고도 비가 계속 내리면 물은 골짜기 안쪽으로 밀려들어 아래쪽 집들을 침수시켰다. 상습 침수 지역이었던 셈이다. 불과 40~50년 전까지도 큰 비가 내리면 어김없이 들녘 가득 물이 들어찼다하니 그 옛날엔 더욱 심했을 터다. 지체 높은 양반들의 집이 언덕 위에 불편하게 앉아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꼭대기의 기와집을 중심으로 그 집에서 일하는 노비들과 소작농들의 집이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잦은 침수에도 불구하고 안강 들녘은 양동마을이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수입원이었다. 마을에 안강 들녘이 한눈에 보이는 장소들이 있다. 관가정과 물봉고개다. 지금도 두 곳에 서면 옥산서원까지 이어지는 너른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서 양동마을을 바라보면 초가집보다 기와집이 더 많아 보인다. 6·25전쟁 당시 이곳에서 안강전투가 벌어지면서 집들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기와집들은 전쟁 이후 돈을 들여 복원했지만 돈이 없는 초가의 주인들은 그대로 방치해둘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전에 지은 오래된 양반집을 만나다
하회마을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양반가옥 2채가 남아 있다. 류운룡의 종택인 양진당과 류성룡의 집인 충효당이다. 그런데 양동마을에는 4채나 남아 있다. 손씨들의 공간인 관가정(보물 제442호)과 서백당(중요민속자료 제23호), 이씨들의 공간인 향단(보물 제412호)과 무첨당(보물 제411호)이다.
양동마을의 물(勿)자 줄기를 따라 가장 앞쪽과 가장 깊숙한 곳에 관가정과 서백당이, 그 사이에 향단과 무첨당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 사람이 살지 않아 구석구석 살펴보기 좋은 곳은 관가정이다. 관가정은 손소의 둘째 아들인 손중돈이 분가해 살던 집으로 그의 형이 대를 잇지 못해 둘째인 손중돈이 실제적인 종손 노릇을 하며 살아온 공간이다. 둘째의 집이면서도 사당이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관가정은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져 있는 ㅁ자 집으로 누마루가 사랑채와 연결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좁은 마당을 지나 안채로 들어서면 양반가 여인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마루 끝에 난 작은 구멍이다. 빗자루로 마루의 티끌을 쓸어 마당으로 휙휙 버리지 않고 이 구멍으로 쓸어 모아두면 하인들이 마루 아래를 치우도록 한 것. 지금은 손씨 대종가인 서백당에서 종가의 모든 일을 돌보고 있다. 서백당은 손중돈과 이언적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마당의 향나무는 이 집의 역사와 함께한 나무다.

안동 하회마을·경주 양동마을 여행

1 세심마을 독락당의 아름다운 별당 계정. 2 조선시대 선비 이언적을 모신 옥산서원.



관가 건너편에 우뚝 솟은 건물은 양동마을 어디에서든 보이는 향단이다. 이처럼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건물을 짓게 된 까닭은 이 공간이 개인의 거주공간으로만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이언적이 경상도관찰사시절 업무를 보는 동시에 편찮으신 어머니를 모시는 공간이었다. 사방에서 쉽게 이곳을 찾을 수 있도록 화려하게 지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향단의 공간 구성은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로 나뉜다. 경사면 때문인지 행랑채와 본채의 높이가 사람 키만큼이나 벌어져 있다. 계단을 오르면 회재의 공간이었을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에서는 뒷문을 열면 안채의 어머니 방이 바로 보인다. 나랏일을 하면서도 어머니의 건강을 살필 수 있도록 배치된 것. 안채는 우물마당을 지나 안쪽으로 길게 길이 이어진다. 골목처럼 이어지는 길 끝에 2층으로 만들어진 부엌이 있다. 이처럼 큰 규모의 부엌에서도 이곳이 단순한 살림집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큰 부엌을 사용해야 할 만큼 매일매일 만들어내야 하는 음식의 양도 상당했던 것.
무첨당은 여강 이씨 종가의 별채를 말한다. 이언적의 아버지인 이번이 살던 종가 한쪽에 지어진 이 건물은 종가를 찾아오는 많은 손님을 맞이하던 공간이다. 이곳에 죽필로 ‘좌해금서(左海琴書·영남의 풍류와 학문이라는 뜻)’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고종이 등극하기 전 이곳을 찾아온 흥선대원군이 남긴 글씨다.

스스로 즐거움을 찾는 공간, 옥산서원과 독락당
경주시 안강읍 옥산1리 세심마을(http://sesim.go2vil.org)은 회재 이언적을 모신 옥산서원과 그가 머물던 공간인 독락당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회재의 마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그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는 것도 특징이다. 그 첫 번째 장소가 1백여 칸이 넘는 건물인 옥산서원(사적 제154호)이다. 특이하게도 옥산서원의 강학당인 구인당은 두 개의 현판을 달고 있다. 이산해의 옥산서원 편액이 걸렸던 건물이 불타 새로 지으면서 추사의 편액을 달게 된 것이라고.
옥산서원에 앉아 보는 풍경도 아름답다. 회재는 이곳에 머무는 몇 년 동안 느낀 마을의 아름다움을 사산오대라 불렀다. 사산이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산을 말한다. 동쪽에 자리한 화개산, 서쪽에 자리한 자옥산, 남쪽에 자리한 무학산, 북쪽에 자리한 도덕산이 그것. 오대는 마을 한쪽으로 흘러가는 계곡의 아름다움을 잘 볼 수 있는 다섯 개의 반석과 기암을 말한다. 세심대·관어대·탁영대·징심대·영귀대가 그것이다.
옥산서원을 나와 길을 따라 걸어가면 독락당으로 이어진다. 보물 제413호인 독락당은 세상과 발길을 끊고 책을 벗 삼아 홀로 즐기겠다는 뜻을 가진 건물이다. 독락당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별당인 계정이다. 독락당 입구로 들어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따라가면 길이 계곡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역사마을을 돌아볼 때 주의할 점
양동마을과 세심마을은 마을을 돌아보는 데 별도의 입장료가 부과되지 않는다. 하회마을처럼 집 안을 돌아볼 수 있는 정해진 시간도 없다. 하지만 찾아가는 사람으로서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을 돌아보는 예의는 지켜야 한다.
우선 모든 가옥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민속촌처럼 관광을 위해 인공적으로 지어진 건물도 아니다. 그러니 집 안을 돌아볼 때는 주인의 허락을 받아 돌아보자. 주인이 개방하는 공간까지만 관람하는 것도 잊지 말 것.
또 한옥은 신발을 신은 채 올라가면 쉽게 망가지는 건물이다. 그러므로 올라가지 말 것을 권하는 공간은 올라가지 말고, 올라갈 수 있는 공간은 반드시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한다. 먼지가 좀 있더라도 발은 씻거나 양말은 빨면 되지만 집이 손상되는 것은 되돌릴 수가 없다.
해가 늦게 지더라도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시간을 존중해야 한다. 오전 10시 이전과 저녁 6시 이후에는 불쑥 집 안으로 들어가지 말 것. 천천히 마을을 산책하며 저녁시간을 누려보는 것도 여행자에겐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여/ 행/ 정/ 보/

[ 찾아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로 영천IC로 나와 직진. 1.75㎞ 지점에서 4번 국도를 따라 좌회전하여 영천시내로 진입. 28번 국도 안강방면으로 가면 옥산서원 표지판이 보인다. 옥산서원 이정표를 지나 안강 방향으로 계속 직진하면 양동마을 입구가 보인다.
[ 맛집 ] 양동마을 안에 토종닭백숙을 하는 초원식당(054-762-4436), 구수한 된장찌개를 내는 거림골식당(054-762-4201) 등이 있다. 옥산서원이 있는 옥산1리에 식당 이름처럼 깔끔한 밥상을 차려내는 청정(054-762-6151)이 있다. 예약 후 찾아가야 하며 2인 이상만 주문받는다.

안동 하회마을·경주 양동마을 여행


[ 숙박 ] 양동마을과 세심마을에서 민박할 수 있다. 옥산서원으로 가는 길목인 안강읍 옥산2리에 한국관광공사가 지정한 굿스테이인 옥산모텔(054-762-9500 www.oksanmotel.com)이 있다.

★ 플러스 정보
그밖에 유네스코 지정 한국의 세계유산은…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세계유산에 대해 “선조로부터 물려받아 오늘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산”이라고 정의한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은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으로 나뉜다. 우리나라가 가진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은 모두 10개. 지난 8월 새롭게 지정된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 이외의 9가지 세계유산에 대해 알아본다.

안동 하회마을·경주 양동마을 여행


해인사장경판전 국보 제52호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건물은 앞쪽의 수다라장과 뒤쪽의 법보전이 같은 모양으로 나란히 지어졌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창문의 크기나 위치가 조금씩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충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여름에는 습한 바람을,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을 덜 맞게 하면서 충분히 환기가 되도록 설계된 것. 때문에 경판들은 곰팡이가 슬지 않아 지금껏 보존될 수 있었다. 대장경판 8만1천2백58판(국보 제32호), 고려각판 2천7백25판(국보 제206호), 고려각판 1백10판(보물 제734호)이 보관돼 있다.
종묘 사적 제125호인 종묘는 조선시대의 전통 건축물이다.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해에 만들기 시작했다. 종묘가 완성된 후 첫 번째로 모셔진 신주의 주인공은 개성에서 옮겨온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이다. 이곳에 기반해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제 제56호) 등 무형의 문화유산이 전해지고 있다.
석굴암과 불국사 경주 토함산에 자리한 석굴암과 불국사는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불교 건축물이다. 산 중턱에 만들어진 인공 굴, 석굴암은 아름다운 조각이 가득 새겨진 신라 전성기 최고의 예술품으로 손꼽힌다. 석굴암의 축조는 신라 경덕왕 때인 751년, 당시 재상이던 김대성이 시작해 774년에 완성했다 전해진다. 석굴암 아래 자리한 불국사는 사적명승 제1호로 지정돼 있다. 불교 교리가 사찰 건축물을 통해 잘 형상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시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건축미를 지녔다는 평을 받는다.
창덕궁 창덕궁(사적 제122호)은 조선 태종이 즉위 5년(1405)에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40년(1607)에 다시 지어 광해군 5년(1613)에 완공한 후, 고종이 경복궁을 다시 짓기 전까지 2백58년간 조선의 정궁으로 사용됐다. 창덕궁은 경복궁 등 다른 궁궐들처럼 궁궐의 정문과 정전, 편전 등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 않다. 지형과 지세에 따라 방향을 달리해 자리한 것이 특징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첫 번째 정궁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후원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화성 화성(사적 제3호)은 정조의 효심과 꿈이 담긴 공간이다.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의 능원을 화성으로 옮기면서 정조의 정치적 기반이 될 계획도시 화성을 만든 것. 화성은 18세기 동양의 성곽을 대표하는 한국 전통 건축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수원 팔달산의 지형지세를 그대로 이용한 총길이 5.7km의 성곽을 짓는 데 걸린 시간도 불과 2년 6개월에 불과하다. 실학자 정약용이 개발한 기중기 등 신기술이 사용되었기 때문. 성벽 안 4개의 성문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을 가진 것도 특징이다.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 선사시대 돌무덤인 고인돌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견된다. 그 가운데 밀집지인 인천 강화도와 전북 고창, 전남 화순의 고인돌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고창 고인돌 유적(사적 제391호)은 고창읍 죽림리·도산리·아산면 상갑리 일대에 4백47기가 분포한다. 탁자식·바둑판식·지상석곽형 등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고인돌을 발견할 수 있다. 화순 고인돌 유적(사적 제410호)은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 계곡을 따라 약 10km에 걸쳐 5백여 기가 밀집되어 있다. 상석으로 사용할 바위를 떼어내기 위해 벽에 쐐기를 박아두었던 흔적이 뚜렷이 남은 채석장도 있어 고인돌 축조과정을 알 수 있다. 강화 고인돌 유적은 강화군 부근리·삼거리·오상리 등 고려산 기슭을 따라 1백5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는 길이 6.4m, 높이 2.5m의 우리나라 최대의 탁자식 고인돌인 강화지석묘(사적 제137호)가 있다.
경주역사지구 신라 천년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경주로 가야 한다. 지금도 경주의 역사유적을 돌아보다 보면 당시 사람들의 삶이 연상될 만큼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남산은 야외박물관이라 불리는 문화유산의 보고. 신라 건국설화에 등장하는 나정(蘿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 했던 포석정,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등 수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다. 이 밖에도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 등에서 다양한 역사유적을 만날 수 있다. 경주역사지구는 유물의 다양성이나 밀집도 등에서 일본의 교토나 나라보다 뛰어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제주도는 약 1백80만 년 전의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섬이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는 지난 2007년 제주도의 아름다움과 지질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해 세계자연유산에 등재했다. 유산으로 지정된 곳은 제주순상화산으로 이루어진 한라산의 생태보전지역, 바다 위에 왕관처럼 내려앉은 성산일출봉, 화산활동으로 여러 개의 동굴을 갖게 된 거문오름용암동굴계 등이다. 그 안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희귀생물 및 멸종위기종들의 서식지가 자연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조선왕릉 조선왕조는 왕과 왕비의 무덤도 풍수지리사상을 바탕으로 까다롭게 정하고 주위 자연과의 조화를 계산한 뒤 만들었다. 오래도록 이어온 왕가의 규칙이 현대에 와서 빛을 발했다. 북한에 있는 2기의 왕릉,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을 제외한 40기의 왕릉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봉분, 봉분에 맞는 다양한 석조물, 지금껏 이어지는 제례의식 등이 조선의 왕릉을 살아 있는 문화유산공간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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