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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도전과 성공을 맞바꾼 사람들

‘10년 후 미래를 디자인하는 노하우’

박지영 김현기 유봉재 이연승… 자신의 분야에서 실력 인정받은 4인이 들려준

정리·김민지‘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 ■ 자료&사진제공·동아사이언스

2008. 04. 09

“내 인생은 성공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뭘까. 바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끊임없이 도전한다는 점이다. 최근 각광받는 분야에서 꿈을 펼치는 이공계 출신 파워 엘리트 50인의 이야기를 다뤄 화제가 된 ‘10년 후, 나를 디자인한다’(동아사이언스)에 실린 네 명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SK커뮤니케이션즈 박지영

‘일 만들던 ‘이벤트 걸’에서 싸이 신화의 주인공 되기까지’
‘10년 후 미래를 디자인하는 노하우’

SK커뮤니케이션즈 서비스혁신그룹장 박지영씨(33)는 전 국민을 ‘싸이질’에 빠지게 만든 주인공이다.
“어릴 때부터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했어요.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었죠. 학창시절 친구들과 연극반을 만들고, 손으로 직접 쓰고 그린 학급 문집을 펴내고, 캠코더로 같은 반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아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등 많은 일을 벌이면서 보냈어요.”
박씨는 학창시절부터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던 중 덕성여대 아마추어무선(HAM)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엔 인터넷에 빠져 독학으로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이것이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99년 초 여행과 사진, 일기를 주제로 ‘마음으로 하는 여행’이라는 개인 홈페이지를 열었는데 하루 방문자 수가 1천 명을 넘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홈페이지를 관리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인터넷 관련 지식을 쌓았다.
그해 여름 싸이월드가 채용공고를 냈다. 당시 싸이월드는 카이스트(KAIST) 출신 대학원생들이 만든 신생 벤처기업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기업에 입사할까도 생각했지만 싸이월드의 비전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이력서에는 자신의 홈페이지 주소를 적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싸이월드는 인터넷에 ‘미친’ 그를 단박에 알아봤다. 면접 당일 그는 합격 통보를 받고 싸이월드의 웹디자이너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싸이월드가 기획한 선물가게를 시각적으로 어떻게 꾸밀지, 이용자들이 선물가게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느끼게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당시 웹디자인에서는 점 하나하나를 찍어서 그리는 도트 디자인이 유행이었다. 그는 선물가게의 아이템이나 캐릭터에 도트 디자인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싸이월드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도트 디자인은 그렇게 시작됐다.
2002년에는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얼굴 페이지를 꾸밀 수 있는 ‘미니룸’을 기획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미니룸이 성공하면서 사이버공간에서 디지털 아이템을 기획하는 ‘상품기획’ 직군도 생겨났다. 시장을 읽어내는 예리한 통찰력과 남다른 감성으로 ‘싸이 신화’를 일군 그는 2007년 또 한 번 일을 냈다. 1년 정도 개발 끝에 기존 미니홈피를 발전시킨 ‘싸이월드2’ 서비스를 출시한 것이다. 인터넷 시장이 포화상태라는 일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터넷 시장의 가치는 무한하다”며 “아직도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은 수많은 나라가 새로운 무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인터넷 세상에서 자신 있게 ‘일’을 벌여 성공한 박지영씨. 그가 자신의 성공 비결을 밝혔다.
“성공의 제1조건은 열정과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요.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스스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을 통한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해요. 무슨 일이든 일단 자신 있게 일을 벌이세요!”

KBS 김현기

“벽에 부딪힐 때마다 새로운 전환의 계기로 삼았어요”
‘10년 후 미래를 디자인하는 노하우’

KBS 김현기 PD(40)는 최근 브라운관에 과학 다큐멘터리 붐을 몰고 온 주역이다. 그는 2002년 ‘생로병사의 비밀’을 시작으로 ‘사이언스21’ ‘지구 대멸종’ ‘과학의 향기’ 등을 제작하며 과학 다큐멘터리 PD로서의 경력을 다졌다. 김PD는 자신이 이공계(연세대 화학공학과) 출신이라 과학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데 있어 다른 PD들보다 유리한 점이 많았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섬유회사 공장장이셨는데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파란 잉크가 마르지 않은 설계도를 보는 모습이 멋있었어요. 그때의 인상이 줄곧 과학에 흥미를 갖게 한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그는 여러 차례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고 한다. 세계적 명문대인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환학생 시절, 그의 첫 학기 성적은 평균 이하였다. 주입식 교육을 받은 그로서는 어려서부터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길러온 미국 학생들과 경쟁하는 게 힘에 겨웠다. 두 번째 학기에는 거의 매일 밤을 새우며 공부했다. 부족한 실력을 보충하려면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학기는 다행히 성적이 평균 이상이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공부가 더 하고 싶어 포항공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러나 석사장교 제도가 폐지되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군에 입대해야 했다. 사회제도의 모순을 경험한 그는 제도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으로 사법시험, 행정고시, 언론고시를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KBS에 합격해 PD로 첫발을 내딛게 됐다.
하지만 힘들게 들어간 KBS 신입사원 시절, 그는 또다시 벽을 느꼈다. 방송국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에 양복을 갖춰 입고 출근했지만 선배 PD는 중계차가 어떻게 가동되는지 알아보라며 그를 잠실 종합 운동장에 보냈던 것. 그는 양복을 입은 채로 바닥에 놓여 있는 지저분한 케이블을 옮기고 정리했다. 방송국 안 스튜디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대를 닦고 세트를 옮겼다. 방송계의 밑바닥부터 경험하며 조연출 생활을 5년 지속했다. 서러움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며 한강변을 서성인 적도 서너 번쯤 되는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인내의 시간을 참아낸 뒤 그는 ‘한반도 탄생 30억년의 비밀’을 제작하는 데 참여했고 ‘생로병사의 비밀’ 같은 대형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기회도 얻었다. 그리고 2005년 영국 BBC에 3개월 동안 프로그램 공동제작 연수를 다녀와 BBC가 자연 다큐멘터리로 성공한 이유를 깨달았다.
“BBC는 인재가 많고 제작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요.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부장급 프로듀서 아래 대여섯 명의 프로듀서가 함께 일했죠. 그들은 뛰어난 제작능력을 갖고 있을뿐 아니라 과학 등 전문분야의 학위도 갖고 있는 인재들이었어요.”
영국에서 벽을 느끼고 돌아온 그는 부족함을 깨닫고 이공계 출신으로서 인문계 출신 상사를 설득하기 위해 서강대 대학원 과학커뮤니케이션 석사과정에 등록했다. 그는 ‘생로병사의 비밀’이 유명한 프로그램이 됐지만 세계적 수준에 비하면 아직 보강해야 할 점이 많다고 말했다.
“세계에는 다큐멘터리를 사고파는 거대한 시장이 있어요. 저는 이런 시장에서 잘 팔리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 비로소 성공한 과학PD가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PD의 꿈은 중학생 수준의 시청자를 이해시킬 만큼 쉽고 재미있는 과학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이다.

로레알코리아 유봉재



“우유 배달·군고구마 장사 … 다양한 경험이 도전정신의 바탕 됐어요”
‘10년 후 미래를 디자인하는 노하우’

인턴 시절 업무성취도를 인정받아 로레알코리아에 정식 사원으로 입사한 유봉재씨(32)는 신규사업부와 영업관리부를 거쳐 현재 제도관리부에서 일하고 있다. 고려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그는 “화장품도 과학”이라는 문구에 자극받아 화장품 업계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일을 하는 데 정작 도움이 된 것은 전공보다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통해 터득한 자신감이었다. 어린 시절 영국서 살았던 그는 독립심을 중시하는 부모의 교육방식 덕분에 용돈을 벌기 위해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세상과 부딪히며 인생이 무엇인지, 도전정신이 얼마나 값진지 온몸으로 경험했어요. 우유배달부터 구두닦이, 중국집 아르바이트까지 기회가 닿는 대로 다 해봤거든요. 이 과정에서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어요.”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아르바이트로 군고구마 장사를 꼽았다. 고등학생시절, 추운 겨울에 군고구마를 팔기 위해 한참을 서있었지만 손님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장사를 포기하려는 순간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아파트로 들어가는 아주머니들을 발견했다. 그때 그는 ‘군고구마를 사면 장바구니를 집까지 배달해드립니다’라는 피켓을 써붙여 대박을 터뜨렸다고 한다. 유씨는 대학에 입학해서는 서울 용산전자상가에 컴퓨터가게를 차렸다. 대학 동기 90명을 대상으로 영업해 48대를 팔았다고 한다. 동대문에서 옷가게도 해봤고 스노보드숍도 운영했다. 지금의 와인 열풍이 일기 전인 2003년에는 서울 압구정동에서 와인과 치즈를 파는 사업을 했다. 비록 와인사업이 망해 아직까지 재고품이 집에 쌓여 있지만 그는 뭐든 궁금하면 못 참고, 하고 싶은 일은 다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고 한다.
그는 대학 진학 당시 학교와 전공을 선택할 때도 적극적이었다. 진학하고자 하는 대학이 어떤 곳인지 알기 위해 지나가는 대학생 형, 누나를 붙잡고 무작정 학교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던 것. 철저하게 ‘자기주도형’으로 대학을 선택한 그는 학과를 정할 때도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순수과학과 공학 사이에서 갈등도 했지만 실용적인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공대에 가기로 결심했다. 공학도로서 시장과 경제의 흐름을 읽기 위해 경제학·경영학 수업도 빼놓지 않고 들었다. 이런 다양한 경험과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성격 덕분에 그는 2003년 로레알코리아에 입사했다. 유씨는 우리나라 고객들이 화장품을 꼼꼼하게 고르기로 유명하다며 “화장품의 유행을 미리 예측했을 때 가장 보람이 크다”고 말했다. 번지지 않는 마스카라나 보디슬림젤 등은 고객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그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상품들이라고 한다.
“흔히 화장품 업계를 ‘여성만의 리그’라고 생각하지만 로레알코리아는 남자의 비율이 40%나 됩니다. 오히려 여자와 다른 남자만의 섬세한 시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쏟아낼 수 있기 때문이죠. 패션 트렌드나 화장품 업계 동향을 예민하게 읽을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남자도 ‘트렌드메이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우조선해양 이연승

‘여성 최초라는 두려움과 책임감이 성공의 비결’
‘10년 후 미래를 디자인하는 노하우’

“야, 저기 조선공학 지나간다. 조선공학!”
한국 조선공학계 최초의 여성 박사인 이연승 대우조선해양 연구원(40). 부산대 대학원 시절 그의 별명은 ‘조선공학’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할 때 조선공학 분야에서 최초의 여자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중공업에 입사할 때도 선박해양연구소 최초의 여성 연구원이었다. 조선공학 분야에서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그는 억센 남성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배 모양을 그리는 ‘선형 설계’로 이 분야를 호령하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바다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아는 사람과 요트를 타본 뒤 막연히 배를 만들어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부산대 조선공학과에 지원했다. 이후 그의 바다사랑은 점점 커져갔다. 대학 내 요트서클, 88 서울올림픽 요트경기 자원봉사자로도 활동했다.
대학 때 조선공학을 공부하는 재미에 빠진 그는 더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갔다. 그러나 자신이 조선공학 여자 대학원생 1호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두려움과 책임감을 느꼈다.
“바다는 남성의 전유물이란 인식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여성이 배를 만들겠다고 나서자 무모한 도전으로 치부하는 분들이 많았죠. 하지만 바다를 바라보면서 용기를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기회가 올 거라고 다짐했어요.”
그는 석사 논문을 마칠 무렵 대학원 세미나에서 독일 베를린공대 호르스트 노바키 교수를 만났고 이후 독일로 건너가 노바키 교수 밑에서 컴퓨터를 이용한 선형 설계를 공부했다. 선형 설계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선박의 속도와 연료 효율성을 최대한 높일 수 있어 선박 설계의 핵심으로 꼽힌다. 그는 유학시절 독일·스웨덴·이탈리아 등이 주도한 유럽 최대 규모의 조선 공동 프로젝트인 ‘칼립소’에 참여했다. 독일 대학원생 신분으로 항공분야에 적용되던 전산유체역학(CFD)을 이용해 선형을 최적화하는 기법을 검증하는 연구를 맡았다. 이때 유럽 조선업계에서 활동하는 실력파 여성 과학자를 여럿 만나면서 여성 과학자라는 데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2000년 베를린공대에서 선형 설계로 박사학위를 따자 현대중공업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선박해양연구소 사상 최초의 여성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그는 남성 위주 사회에서 여성이 인정받으려면 결국 실력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2002년 그가 이끄는 연구팀은 연료를 경제적으로 사용하는 컨테이너 선형 설계 연구로 사내 ‘기술 최우수상’을 받았다. 2005년엔 연구개발뿐 아니라 현장업무를 좀 더 경험하고 싶어 대우조선해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속한 팀은 요즘 스위스 선사(MSC)에서 의뢰한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개발하고 있는데 선형 설계를 바탕으로한 선박 모형 실험 결과, 연료를 18%나 절감했다고 한다. 선박 설계에서 여성의 예리한 손끝 감각이 배의 성능을 높일 수 있다는 이연승씨. 앞으로 그는 “선형 설계 분야에서 세계 선두주자가 돼 후배 여성들의 진출을 돕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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