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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름다운 고백

황혼의 들녘에서 회고록 펴낸 김수환 추기경

“사제가 된 후에도 늘 십자가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었어요”

■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평화신문 제공

2005. 01. 10

53년째 성직자의 길을 오롯이 걸어오면서 종교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 존경받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이 최근 회고록을 펴냈다. 그가 솔직하게 털어놓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 신학교 시절의 방황, 그리고 성직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겪은 갈등과 고뇌를 담았다.

황혼의 들녘에서 회고록 펴낸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추기경(84)이 최근 자신의 삶을 담은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평화신문)를 펴냈다. 이 책에는 가난한 옹기장수의 막내아들로 자란 유년 시절부터 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나 혜화동 주교관에 머물고 있는 최근의 삶까지 전 생애가 담겨 있다. 그의 인간적 나약함과 보일 듯 말 듯한 외로운 눈물까지도….
그는 돌이켜 보건대, 어머니와 세 살 터울의 형 김동한 신부가 자신의 유년 시절의 전부나 다름없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있어 어머니의 기도는 늘 인생의 채찍이었고, 형님의 두터운 정은 마음의 큰 가르침이었다고.
“모든 사람에게 자기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제게도 어머니는 가장 크고 특별한 존재”라며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을 나타낸 그는 하지만 자신은 스스로를 “효도라고 해봐야 어머니 뜻대로 신부가 되고, 삼을 한 번 사드린 게 고작”인 무뚝뚝한 아들이었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다리에서 바람이 난다’는 말씀을 이따금씩 하셨어요. 그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다가 내 몸에서 그런 증세를 느끼고서야 알게 됐죠.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단 5분만이라도 저를 찾아와 주신다면 무릎을 꿇고 어머니의 야윈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싶어요.”
자신의 이름 석 자와 하늘 천(天) 땅 지(地) 정도의 글자 밖에 아는 것이 없던 그의 어머니는 가난 때문에 평생 옹기와 포목을 머리에 이고 팔러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곧은 신앙심과 여장부 같은 기질만은 대단하셨다며 “그런 어머니 무릎에서 신앙심을 키우고 인간으로서 기본 교육을 배운 것을 감사한다”고 회상했다. 특히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밖에 나가 ‘아비 없는 자식’이란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며 더욱 엄격하게 자식들을 키우셨다고.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말이 ‘사랑’이지만, 어머니가 보여준 사랑처럼 ‘모든 것을 덮어주고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내는’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지는 못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의 어릴 적 꿈은 성직자가 아닌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 상점에 취직해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25세가 되면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는 것. 그래서였을까, 순교자 집안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형 동한을 따라 대구 성유스티노예비신학교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는 신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머릿속엔 ‘무슨 꾀를 내어서 신학교를 떠날까’ 하는 생각만 간절했다고.
“예비신학교 시절, 학교에서 쫓겨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1전짜리 동전을 가지고 꾀를 낸 적이 있어요. 당시 학교 규칙상 돈을 갖고 있다 들키면 집으로 쫓겨간다는 말을 듣고 우연히 발견한 1전짜리 동전을 일부러 책상 서랍 눈에 잘 띄는 자리에 놓아뒀죠.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신부님이 부르지 않았더라고요. 결국 그 동전을 학교 담장 밖으로 던져 버렸죠.”
사제의 길 주저하다 청혼 받은 후 고민 끝에 신부 되기로 결심
일본 상지대 유학 시절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 이후 구사일생으로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가톨릭대신학부에 복학하기 전까지 어머니가 계신 대구에서 9개월쯤 머물렀다. 그 기간에 그는 한 여인의 청혼을 받고 무척 갈등을 했다고 한다.
“형인 김동한 신부를 만나기 위해 부산의 범일성당에 드나들면서 알게 된 여인으로부터 ‘나를 받아줄 수 있겠어요?’ 하는 청혼을 받았어요. 정말 깜짝 놀랐고,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죠. 잘은 몰라도 그때 그녀는 심적 고통이 큰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관심을 갖고 배려를 해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마음이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자신에게 잘해 주는 누군가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거 같아요.”

황혼의 들녘에서 회고록 펴낸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의 동성상업학교 재학시절 모습(왼쪽 사진 왼쪽)과 사제 서품은 받은 뒤 어머니 서중하씨와 함께한 모습(오른쪽 사진).


그는 예비신학교 시절에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갈 때면 교장 신부님이 “여자는 아예 쳐다보지도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안면이 있는 여자를 만나도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그런 그였기에 청혼까지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사실, 어릴 때부터 ‘나만을 사랑해 주는 여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품고 있기도 했어요. 그런데 막상 그런 여인이 나타나자, 나에게 모든 걸 거는 한 사람을 평생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었어요.”
그는 그녀의 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한 사람을 평생 행복하게 해주는 대신, 신부가 되어 사랑의 봉사를 하면 부족하나마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는 어쩌면 이 해프닝이 그 스스로 자신이 사제의 길을 가야 할 사람이라는 확신을 더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13세 나이에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예비신학교에 들어간 이후 18년 동안 성직자의 길에 회의를 느끼던 그는 결국 51년 30세에 사제가 되었다.
하지만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 모든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의 갈등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늘 도망가고 싶었고,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는 것. 특히 서울대교구장 시절엔 압박감과 고독감 때문에 불면증이 생겼고, 그때 이후 지금까지도 의사가 처방해준 약에 의지해 잠들 때가 많다고 한다.
그는 성직 생활 53년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사제 서품을 받은 직후 가난한 신자들과 웃고 울던 2년 반 동안의 본당신부 시절”이라고 한다. 일선 본당신부 생활이라고 해봐야 안동본당과 김천본당을 합해 2년 반밖에 안 되지만, 그는 주교로 살면서도 본당신부 생활을 무척 그리워했다.
“높은 자리라는 게 간혹 창살 없는 감옥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던 본당신부 시절을 떠올리면서 답답한 마음을 달랬죠.”
그는 주교 직무를 그만두고 시골 성당으로 가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한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귀족 생활이 몸에 밴 스스로를 깨닫고 놀라곤 했다고.
70년대 중반쯤 정일우 신부와 고(姑) 제정구 의원이 경기도 시흥에 철거민 이주촌을 건설하고 그의 방을 마련해 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 여러 번 가보기는 했지만 자고 온 적은 한 번도 없다고 고백했다. 공동화장실 사용 등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자고 가라고 할 때마다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는 것.
“내 신분, 환경, 받는 대접이 무의식중에 저를 ‘귀하신 몸’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일종의 귀족의식이 저도 모르게 몸에 밴 거지요. ‘그리스도 당신처럼 모든 사람의 종이 될 만큼 가난한 자 되고 싶다’고 기도하면서도 몸은 그렇지 않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모순인가요?”
그는 사제 서품을 받은 뒤 2년 반의 본당신부 시절을 거쳐 마산교구 초대교구장 주교가 되고, 다시 2년 만에 대주교로 승품돼 서울대교구장을 맡았다.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추기경으로 임명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귀족이 돼버렸다는 그는 “좀더 몸을 낮추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 점이 후회스럽다”고 말한다.
“좀더 몸을 낮추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해 후회스럽다”
김 추기경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과 늘 함께 했다. 특히 70~80년대 명당성당을 중심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한 가운데 있었다. 그러면서 정부 압력은 물론이고 교회 안에서도 “왜 교회가 정치문제에 개입하느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교회의 현실 참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교회와 정부의 마찰이 마치 그에게 원인이 있는 것처럼 교황청에 투서를 보내기도 했다. 정부에서도 여러 차례 교황청에 그를 문책할 것을 요구했다.

황혼의 들녘에서 회고록 펴낸 김수환 추기경

81년 한국을 방문한 데레사 수녀와 함께한 모습.


그럴 때마다 그는 기도를 하면서 버텨왔다. 그는 정치와 사회가 균형을 잃고 정의가 위협받을 때 중심추 역할을 하고 올바른 물꼬를 트려고 했을 뿐, 결코 정치가 좋아 정치문제에 개입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 그의 간절한 소망은 “정치문제 때문에 기도회를 열거나 강론하는 일이 없는 세상이 하루 빨리 와서 다리 뻗고 쉬는 것”뿐이었다고.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구상하고 있던 1971년, 전국에 TV로 생방송되는 미사에서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려는 정부여당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또한 1980년 1월, 새해 인사차 방문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서부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며 면전에서 쓴소리를 쏟아내기도 했다. 87년 ‘6·10 규탄대회’ 때 경찰에 밀려 명동성당으로 들어온 학생과 시민들을 강제연행 하기 위해 찾아온 정부 고위 당국자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이고,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불의 앞에서는 그토록 강인한 그이지만 알고 보면 순수하고 천진스런 면도 있다. 새벽까지 축구 국가대표팀이 외국팀과 경기를 벌이다 극적으로 역전승하는 방송을 보고난 뒤 눈물을 흘리면서 애국가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모자를 눌러 쓴 채 등산을 갔다가 등산객들에게 “추기경을 많이 닮으셨네요”라는 말을 들으면 시치미를 뚝 떼며 “저도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하고 능청스럽게 대답한다고.
인생을 하루에 비유하자면, 그는 지금 자신이 해거름에 와 있다고 말한다. 그의 나이 여든넷. 하지만 눈꼬리가 살짝 내려가게 웃는 모습은 여전히 어린아이같이 해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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