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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첫 인터뷰

대선 출마한 장세동·지경자 부부

“한번도 공개하지 않았던 우리 부부의 27년 가정 생활·자녀 교육 이야기”

■ 글·이영래 기자(laely@donga.com) ■ 사진·최문갑 기자

2002. 12. 23

최근 장세동 전안기부장이 전두환 전대통령의 만류를 물리치고 대선 출마를 전격 선언해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12·12사태의 주역으로, 5공 권력의 핵심으로 격동기 한국사의 가장 큰 뉴스메이커 중의 한사람이었던 그가 처음으로 공개하는 가정생활 이야기.

대선 출마한 장세동·지경자 부부
전두환 전대통령과의 의리를 빗대 ‘의리의 돌쇠’로 불리는 장세동(66) 전안기부장이 지난 10월21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역사적 평가야 뒤로하더라도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임엔 틀림없는 그가 2%에 채 못미치는 낮은 지지율, 조직의 부재 등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뻔히 알면서도 대선 출마를 선언한 것은 의외의 일이다. 때문에 출마 선언 직후 정가에선 5공 세력의 재집결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기도 했다.
“저는 육사 출신으로 나라에서 길러준 사람입니다. 국가에 대한 책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월남에 3번이나 갔고 또 권력의 정상에 섰던 고통과 아픔도 느껴봤습니다. 너무 일찍 권력의 정상에 섰기 때문에 지금은 덤의 인생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남은 인생을 국가를 위해 살자, 전대에 쌓아놓았던 동서 갈등과 통일문제를 해결하자는 생각으로 나섰습니다.”
인터뷰를 위해 서초동 자택에서 만난 장세동은 기자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장세동’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강인한 이미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악수를 나눌 때, 잠시 동작을 멈추고 시선을 맞추는 그의 눈빛에서 비로소 ‘장세동’이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으리라 막연히 추정했던 무언가가 느껴졌다. 강함, 신념, 의리 또는 힘이라고 부를 만한 그 무엇.
1936년생. 그는 전남 고흥에서 3형제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네살 때 서울로 이주한 후 성동공고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서울에 살다 57년 육군사관학교 16기로 군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무려 세번이나 베트남에 파견됐는데, 대한민국 군인 중 베트남에 세 번이나 간 것은 그 하나뿐이라고 한다. 전두환 전대통령과 만난 것도 66년 베트남에서였다. 그가 입원한 병원에 상급자인 전두환이 위문을 오며 인연을 맺었고, 이후 그는 전 전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친 육사 출신 하나회 멤버가 됐다. 전 전대통령과는 67년 11월, 수경사 30경비대 대대장과 작전장교로 같이 근무하기 시작, 대통령과 대통령 경호실장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무려 17년 8개월간 동거동락했다.
“결혼한 건 71년, 제가 35세 때였습니다. 제가 월남에서 돌아오니까 사람들이 안되겠다, 더 이상 늦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며 중신을 서더군요. 그때 우리 집사람과 선을 봤는데, 결혼하자고 했더니 섬마을 선생님으로 갈 생각이라 안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난 그 섬에 가서 새마을 지도자가 되겠다고 했죠. 그 다음에 별 대답을 안하길래 제가 결혼 날짜를 잡았습니다(웃음).”
부인 지경자 여사는 47년생으로 그보다 무려 아홉살이나 연하. 당시 중령 승진을 앞두고 있는 촉망받는 청년 장교에게 시집온 그녀는 군인 부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당시 상관의 부인이었던 이순자 여사를 통해 배웠다고 한다. 이여사는 부하 장교 부인들과 만나면 살림법을 비롯해 마음가짐, 그리고 처신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여전히 깍듯한 호칭을 쓰며 이순자 여사에 대해 얘기했다.
“이순자 영부인님은 군인의 아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신 분이었어요. ‘군인의 아내는 다른 사람과는 달라야 한다, 남들 대리석 깔고 사는 거 부러워하지 말고 시멘트 바닥 열심히 닦아 광낼 생각을 해야 한다’며 누구보다 솔선수범하셨죠. 진정 배울 게 많았던 분이었다고 생각해요.”
부인 지여사는 이순자 여사에게 살림법, 내조법까지 조언받아
결혼 이듬해인 72년 큰아들 재훈을, 그리고 74년 둘째 재혁을 낳아 슬하에 두 아들을 둔 이 부부는 여느 가족과 마찬가지로 주로 자녀문제로 많이 다퉜다고 한다. 현재 두 자녀는 평탄하게 성장, 미국 유학중이다.
“아이가 갓 말을 배울 때였어요. 뭘 물으면 ‘응’하고 대답을 하니까 남편이 그 어린 아이를 30cm자로 때려요. ‘예’라고 대답하라는 거죠. 그래서 그걸 말렸더니 ‘강아지도 훈련 시키는데 사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훈련하면 된다’는 겁니다. 아이들이 줄넘기를 해도 목표를 정해서 하도록 시켰어요. 너무 그러지 말라고 그래도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걸 가지고 싸움이 계속된 거죠.”
12·12와 같은 격동의 순간, 과연 그녀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의외이긴 하지만 당시 그녀는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원래 장후보가 말이 별로 없는데다, 바깥 일을 집에서 말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고 한다. 79년 12월 12일, 문제의 ‘경복궁 모임’이 바로 수경사 30경비단장으로 재직중이던 그의 사무실에서 열리고 있었지만, 그날 밤에 그녀가 받았던 전갈은 단 하나였다.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잣죽을 좀 끓여서 보내라’는 것.

대선 출마한 장세동·지경자 부부

꽃나무와 작은 화분들을 놓아 실내정원으로 꾸민 지붕 아래 다락방에서 부부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질 때가 많다.

“우리 아이들은 고향이 궁정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87년 이 집(서초동 빌라) 장만해서 나오기 전까지 쭉 거기 살았으니까. 그날 가끔 총소리가 들려서 아이들이 무서워했던 건 기억나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저도 나중에 알았어요. 사람들은 그날 이후 우리가 벼락 출세해 호화롭게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저희는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혹 누가 저희한테 로비를 해보려고 해도 남편이 워낙 단속을 엄하게 했어요. 그리고 당시 궁정동이 누가 오고갈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5공이 시작되면서 소장으로 진급한 장후보는 81년 7월 대통령 경호실장에 취임, 무려 3년7개월간 재직했다. 그리고 84년 12월 중장 진급과 동시에 전역, 28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그는 87년 5월 박종철군 고문 은폐 사건으로 물러날 때까지 안기부장(현 국가정보원장)으로 재직, 명실상부한 5공의 2인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온 이후, 그는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먼저 5공 청문회에 불려나갔다. 개인적인 시련일 수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긍정적 이미지는 청문회를 통해 쌓은 것이다. 5공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했던 시절이었음에도, 사람들은 그를 ‘의리의 돌쇠’ ‘진짜 사나이’라 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 “어른을 구속하려 들 경우에는 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막을 것이고, 그러지 못한다면 나도 어른의 뒤를 따라가겠다” “가만히 있어라. 내가 링에 올라가면 모두가 불행해진다” 등 청문회 당시 그가 했던 말들은 유행어처럼 퍼지기도 했었다.
더욱이 그는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안에 책임지기를 주저하지 않아 이런 긍정적인 평가는 더해졌다. 그는 89년 1월 일해재단 설립비용 모금과 관련해 직권 남용혐의로 처음 구속됐고, 이어 93년 3월에는 87년 있었던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세칭 용팔이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두번째 구속됐다. 당시 그는 “용팔이 사건에는 나 이상의 배후가 없다”는 말을 남겨 화제를 일으켰고, 석방될 때는 전 전대통령에게 찾아가 “각하, 휴가 잘 다녀왔습니다”라고 신고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96년, 12·12, 5·18에 대한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구속돼 모두 세번의 수감 생활을 했다.
“세번째 감옥에 갈 때는 가족들에게 정말 미안했습니다. 그때 꿋꿋이 버텨주고 이해해준 가족들이 너무 고마워요. 한창 민감한 나이여서 아이들 마음고생이 컸을 텐데….”
당시 이야기가 나오자 장후보와 지여사는 모두 눈이 벌겋게 충혈됐다. 먼저 두번은 권력의 2인자로서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대가로, 또 치러야 할 홍역이라 감수할 수 있을지라도 군인으로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반역’이라는 틀로 낙인찍은 것만큼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그는 유독 세번째 구속 상황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남북문제, 지역문제, 그리고 민생문제 해결! 저는 목숨을 걸고 제가 내건 공약을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단기필마로 선거 혁명을 이뤄보겠습니다.”
선거혁명. 과연 장세동 후보가 이번 대선 가도에서 자신의 약속을 끝까지 지킬 수 있을지, 예의 ‘뚝심’을 보여줄지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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