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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소설같은 삶

일본인 현지처 된 독립운동가의 딸 박명아씨 인생고백

■ 글·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 사진·최문갑 기자

2002. 12. 18

“술에 찌들어 폭력 일삼던 아버지, 고문으로 정신병 앓던남편, 요정에서 만난 45세 연상의 일본인…” 건국훈장까지 받은 항일 독립투사의 딸이 일본인의 현지처로 살고 있다. 해방후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울분을 술과 가정폭력으로 해소했던 아버지,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에 걸린 남편, 먹고 살기 위해 삼청각에서 기생으로 일하다 만난 마흔다섯살 연상의 일본인 남편….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박명아씨의 소설 같은 삶.

일본인 현지처 된 독립운동가의 딸 박명아씨 인생고백

박씨는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되길 바란다고 한다.

건국훈장까지 받은 독립투사였지만 해방후 친일세력 청산이 되지 못하자 술과 폭력에 의지해 살아가는 아버지로 인한 상처와 가난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 유신독재에 항거하다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정신착란증세에 시달리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 먹고 살기 위해 스스로 찾아간 고급요정 삼청각에서의 기생생활, 그곳에서 만난 마흔다섯살 연상의 일본인 현지처가 되어 가족과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세월들….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여인이 있다. 최근 자전 에세이 <아버지는 태극기를 물려주지 않았다>를 통해 밝히기 힘든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박명아씨(43)가 그 주인공.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들어보았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꼭 3년이 걸렸어요. 한줄 쓰고 앓아 눕고, 또 한줄 쓰고 앓아 눕고…. 퇴고할 때도 똑같이 열병을 앓아야 했어요. 지옥과도 같았던 과거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게 그만큼 힘들었어요. 하지만 글을 쓰면서 진정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면서 제 자신도 용서가 되더라고요. 그동안 세상에서 제 자신을 숨기며 살려고 했지만 더 이상 그러지 않을 거예요. 이젠 당당하게 세상에 나설 거예요.”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은 대부분 아버지에 의한 폭력으로 얼룩져 있었다. 9남매가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산으로 가! 산으로” 하는 어머니의 외침만 들리면 신발도 신지 못한 채 허겁지겁 뛰쳐나와 집 뒤에 있는 우이동 산골짜기로 도망을 쳐야 했다. 뒤이어 쏟아지는 술에 취한 아버지의 고함소리와 가재도구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붙잡혀 매를 맞는 언니와 동생의 비명소리…. 밤새도록 산속에서 공포에 떨다 집으로 돌아오면 포탄 맞은 전쟁터처럼 온 집안이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시시때때로 그러다 보니 교과서와 학용품이 제대로 남아날 리 없었죠. 아버지가 술에 취해 갈기갈기 찢어놓은 교과서를 들고 갈 수 없어 빈 가방으로 학교에 가면 또 선생님으로부터 벌을 받아야 했어요. 그렇다고 집안 사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었고.”
늘 술에 취해 사는 아버지는 세상과의 접촉을 거부했다. 어머니가 집 앞에서 우이동 계곡을 찾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 돈을 모으면 아버지는 그 돈을 긁어 가지고 나가 술을 마셨다. 남은 식구들은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할 뿐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분이었다”고 두둔하는 어머니를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목소리만 들어도 식은땀이 날 정도로 너무 무서운 존재였어요. 항상 술을 먹고 있거나, 어머니와 우리 남매를 때리던 기억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항상 기도했어요. 신이 있다면 아버지가 빨리 죽게 해달라고. 아버지의 매질이, 사실은 우리가 아니라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세상을 향한 매질이었다는 걸 지금에야 깨닫게 되었지만….”
박씨의 아버지 박영선 장군(94년 작고)은 일제시대 때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투사였다.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의 비서로 있으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했고, 양세봉이 사망한 후에는 중국 국민군에 입대하여 계속 일본군과 싸웠다. 그는 광복 당시 중국 국민군 구국군 독립제1사단장을 맡을 정도로 기개를 떨쳤는데, 그 공로로 77년 건국포장을, 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박영선 장군은 해방후 국군준비사령부 사령관, 반민특위 반민탐정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33개 민족조직을 규합해 한족회라는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친일파 청산과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이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세력과 손을 잡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그의 목표는 좌절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의 폐인생활이 시작되었다.

일본인 현지처 된 독립운동가의 딸 박명아씨 인생고백

박씨는 책을 쓰며 아버지와 자신을 용서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타협을 모르는 외곬이었어요. 아버지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게 이따금 가재를 잡을 때예요. 물웅덩이에 가재가 있을 만하다 싶으면 무조건 바가지로 웅덩이의 물을 밖으로 퍼내는 거예요. 그래서 바닥이 드러나 가재들이 보이면 바구니에 주워담아요. 무식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죠. 친일문제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해결방법이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고 믿으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버지는 가재를 잡기 위해 물을 퍼낼 때 송사리와 피라미도 함께 퍼내져 죽게된다는 걸 생각하지 않았어요. 가족들의 삶도 피라미처럼 던져졌던 거죠.”
그래도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가인 박영선 장군에게 한강골재 채취권, 고아원 운용권을 맡겨 경제적 도움을 주려고 하기도 하고, 경찰 총경자리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모두 거부한 채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상과 점점 담을 쌓아갔다.
“저는 너무 어려서 기억을 못하지만 어머니 말에 따르면 과거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지인들이나 조병옥 박사, 장면 선생 등 야당 지도자들이 집으로 찾아와 시국을 논하곤 했다고 해요. 저희 집을 ‘모충사’라고 부른 것도 ‘충신들이 모인 곳’이라 뜻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어린 박씨에겐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아버지보다는 돈을 많이 버는 아버지, 자식을 때리지 않고 휴일에 놀아주는 아버지가 필요했다. 그에게 ‘독립군의 딸’이라는 호칭은 아무짝에도 필요없었다. 그래서 그는 학교 수업시간에 독립운동을 한 위인들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 우습기조차 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청춘을 바친 독립군 집안에 남은 건 지독한 가난과 가정폭력뿐이었기 때문이다.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교과내용에 반감까지 생겼다.
“어려서부터 전 결심했어요. 다시 태어나면 독립운동가 같은 건 절대 안할거라고. 옳은 것을 옳다고 외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 역시 제 아이들에게는 교과서에서처럼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게 되더라고요(웃음).”
‘고생하는 엄마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대학졸업장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들어간 대학. 그러나 집안 형편은 갈수록 나빠지기만 했다. 심지어 박씨 가족이 30년 가까이 살고 있던 집이 토지분쟁에 휘말려 절반이 헐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렇지만 수리하거나 이사할 돈이 없어 천막을 덧대 비바람을 막아가며 살아야 했다. 이런 비참한 현실을 탈출하고 싶었던 박씨가 생각한 것이 결혼이었다.
박씨는 평소 자신을 좋아했던 친구의 오빠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신학대학을 나온 남편은 70년대말 유신정권 반대운동을 하다 붙잡혀 고문을 당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사람이었다. 몸과 마음을 추스를 겸 제주도로 내려가 목회생활을 하던 중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착란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느닷없이 방안에 도청장치가 되어 있다고 하기도 하고, 아내인 박씨를 경찰 끄나풀이라며 칼로 찌르려 하는 등 증세가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서울로 돌아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시집의 가세가 기울었다. 그는 집안을 꾸려가기 위해 가정부생활을 하기도 하고 외판사원 일도 해보았지만 살림은 더욱 어려워져만 갔다. 결국 스스로 당시 고급요정으로 이름난 삼청각에 발을 디뎠다.
“그곳에서 하는 일은 손님들 술시중을 드는 것이었어요. 손을 잡는 사람도 있고, 껴안고 주무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꼭 송충이가 기어가는 느낌이었죠. 밤에 집에 와서 남자들이 잡았던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박박 닦아내곤 했어요. 그래도 손님들이 대부분 텔레비전 뉴스시간에 나오는 고관대작들이라 아주 짓궂지는 않았어요. 몸이 힘들지도 않았고요. 정말 힘든 것은 제 자신이 미워지는 것이었어요. 요정에서 일하려고 그 고생을 해서 대학까지 갔나 하는 생각에 울기도 많이 울었죠.”
시집에서도 그가 요정에 나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탁비를 아끼기 위해 주말이면 한복 속치마를 가져와 빨래를 했기 때문에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말리거나 욕할 수 없었다. 당장 먹고 살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현지처 된 독립운동가의 딸 박명아씨 인생고백

84년경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와 찍은 마지막 사진.

박씨는 더 이상 이런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구원해줄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신에게 기도했다.
어느날 일요일이라 집에서 쉬고 있는데 삼청각에서 전화가 왔다. 누가 만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전에 한두 번 술자리에서 보았던 사업가였는데, 일본 거래처 사장을 소개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만난 게 오토씨(88)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이게 바로 신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까 저보다 마흔다섯살이나 많은 일본인 할아버지더라고요. 그 순간 ‘아, 내가 기도를 잘못했구나’ 싶더군요. 그저 막연하게 나를 구해줄 사람을 보내달라고만 하니까 일본인 할아버지를 보내주신 거잖아요. 구체적으로 이런이런 사람을 보내달라고 했으면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을 텐데(웃음).”
그래도 독립군의 딸인데 일본인 현지처 제안을 받으면 갈등이 있었을 법도 하건만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오직 이 지옥 같은 현실의 돌파구가 생겼다는 데 감사할 뿐이었다고 했다.
“이 남자만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후 갈등을 잠깐 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죠. 다시 바람 부는 거리로 나설 용기가 없었어요. 그만큼 먹고사는 게 절박한 문제였죠.”
현지처로 살면서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엔 반갑게 다가서던 이웃들도 일본인 현지처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를 송충이를 대하듯 피했다. 그런 따가운 시선이 두려워 처음엔 1년에 한번씩 이사를 해야 했다. 학교 동창들도 현지처라는 것을 말하는 순간 벌레를 씹은 듯한 표정을 짓고는 그후 두번 다시 연락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차라리 내가 못 배웠다든지 뭔가 모자라는 부분이 있었다든지 하면 덜 싫어했을 거예요. 대학까지 나온 멀쩡한 여자가 그런다고 하니까 더 싫었나봐요. 그 냉대가 너무 힘들 땐 온 방안을 빙빙 돌면서 ‘나는 파충류가 아니야, 나도 상처가 나면 빨간 피가 흐르는 사람이야’ 하며 절규한 적도 있어요. 아빠가 일본인이라고 아이가 동네 아이들에게 맞고 들어올 땐 제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아픔을 느꼈죠.”
그는 최근에도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뭐 하러 책까지 써가며 일본인 현지처라는 것을 밝히느냐”는 핀잔을 들었다고 했다.
“발가락이 4개인 사람도 양말을 신고 있으면 사람들이 모르는데 뭐 잘났다고 양말을 벗어 ‘나는 발가락이 4개다’라고 떠드느냐는 거예요. 말을 안하면 아무도 제가 현지처인 줄 모르는데 뭐 자랑이라고 떠드느냐는 거죠. 또 어떤 사람은 ‘그래도 너는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해서 지금의 생활이 정상참작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해요. 도대체 현지처인 게 죄를 짓기라도 한 건가요?”
가족들로부터도 냉대를 당했다. 오토씨가 매달 주는 생활비를 쪼개 가족들을 먹여살리고, 동생들을 가르쳤는데도 가족들은 그를 죄인 취급했다. 박씨 역시 그런 수모를 묵묵히 받아넘기며 스스로를 학대했다. 하지만 이젠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엄마의 지난 삶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아이들이 고마워
일본인 현지처의 고통은 당사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아이들에게까지 이어진다. 이들 사이에는 딸 소윤이(17)와 아들 재홍이(11)가 있다. 둘 다 박씨의 호적에 올라있다.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에요. 아이가 커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의 출생에 대해 말해야 하잖아요. 그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엄마의 과거까지 일일이 이야기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 삶은 제가 짊어져야죠. 그래서 앞으로 아이들이 사랑하게 될 사람이 이 책을 통해 저에 대해 알 수 있도록 쓴 거예요. 아이들이 저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할 수는 없지만 직접 말하게 하는 고통을 안기고 싶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책이 나온 후 아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아이들은 지금까지 박씨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에 결혼을 한번 했었고, 삼청각에 다닌 기생이었다는 걸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 마음에 상처가 생기지 않을까 우려를 했는데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고마워했다.
“고1인 큰애에게 ‘엄마가 자유로워지기 위해 글을 쓰고 싶은데 괜찮겠니?’ 물으니까 좋다고 하더군요. ‘엄마의 모든 것을 알고 친구들이 내 곁을 떠난다면 그건 진실한 친구가 아니다. 그런 친구들은 필요없다. 그러니 쓰고 싶은 것 다 쓰라’는 거예요. 그때 정말 제가 딸을 잘 키웠구나, 하는 생각에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요. 책이 나온 후 딸애 책상에 올려놓았더니 밤 새워서 읽었나봐요. 다음날 ‘담임선생님께 드리고 싶다’며 한권 더 달라고 하더군요. 초등학교 4학년인 작은애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제가 어렸을 때 가난해서 속옷을 안 입고 다녔다는 게 창피하다며 그 부분만 빼래요(웃음).”
물론 걱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저는 제가 선택한 삶이니까 괜찮지만 솔직히 아이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 걱정이 돼요. 앞으로 아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한국에서 계속 공부를 시켜야 할 것인지, 아니면 외국으로 가야할지 결정을 못하고 있어요.”
박씨는 지금 암투병중인 오토씨를 간병하며 살고 있다. 오토씨 아내가 이미 세상을 떠나 두 사람이 정식 부부가 될 수도 있지만 일본에 있는 자식들의 반대가 거세 결혼식을 치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결혼에 대해서는 그다지 욕심이 없다고 한다. 아이들 아빠로서의 몫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
그는 마지막으로 앞으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힘을 쏟고 싶다고 한다. 아버지의 정신이 남아 있는 ‘모충사’를 복원하고, 그곳에 흉상이라도 세웠으면 하는 게 소망이다. 그리고 내년 3·1절에 자신의 삶을 그린 드라마를 방영해 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해방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애국지사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을 세상 사람들이 한번쯤 되돌아보아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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