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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noblesse_oblige

김영명 예올 이사장이 전하는 행복의 조건

editor 김지영 기자

2016. 12. 01

옛것을 올바르게 지키는 것만큼이나 현재 누리는 풍요를 함께 나누는 것도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방법이다. 김영명 예올 이사장을 보면 드는 생각이다.


지난 10월 28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자리한 재단법인 예올 한옥은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날부터 이튿날까지 이곳에서 열린 ‘알뜰시장’을 찾은 손님들이었다. 군중 사이에서 낯익은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지금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부인이자 2002년 예올을 만든 주축인 김영명(60) 이사장이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마당에 쌓인 박스 더미에 담겨 있던 의류와 가방, 액세서리들을 꺼내 진열대로 옮기는 김 이사장의 모습은 재벌가 안주인이라기보다 이웃집의 평범한 주부 같았다. 물품으로 가득했던 박스들이 대부분 비워지고 손님맞이가 끝나갈 무렵 김 이사장과 마주했다.



▼ 예올이 원래 이사장님과 미국에서 유학을 같이하던 친구 7~8명이 모여 만든 친목 모임이라고 들었어요.  

맞아요.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이었는데, 문화재 안내판에 영어 오자가 많았죠. 외국인 관광객들이 우리 전통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안내판 하나라도 바로잡아보자는 아주 소박한 생각으로 시작했죠. 시작은 미미했지만 그런 작은 노력들이 모여 변화를 가져왔죠. 지금은 정말 예쁘고 고급스러워진 문화재 안내판들을 보면 뿌듯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 현재 문화재 보호 운동을 넘어 장인 후원, 답사, 강연,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그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나요.

현재 예올에는 기업가나 유명한 스타뿐만 아니라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많은 일반인 회원들이 있어요. 교사, 파티 플래너, 주부, 사진작가 등 회원이 모두 5백명쯤 돼요. 그분들이 기부하는 물품을 오늘 같은 알뜰시장이나 경매를 통해서 팔고, 해마다 여는 ‘예올 후원의 밤’ 행사에서는 테이블 자리를 판매해 그 수익금으로 운영비를 조달하고 있어요.

▼ 예올 알뜰시장의 가장 큰 장점은 뭔가요.

내게는 이제 필요 없는 물건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귀하게 쓰일 수 있다는 거예요. 쓰던 물건이라도 괜찮은 것들을 보내주시기 때문에, 알뜰시장에 오면 정말 경제적으로 쇼핑을 하실 수 있어요. 아주 저렴한 가격에 팔거든요.

▼ 오늘 알뜰시장에 직접 기증하신 물건이 있습니까.

물론이죠. 여러 개 기증했어요. 알뜰시장을 매년 여니까 집에서 쓰던 물건을 버리지 않아요. 저보다 요긴하게 쓰실 분이 있을 것 같아서요. 저희는 쇼핑백 하나도 다 집에서 가져와요. 깨끗한 데 넣어주면 좋지만, 쓰레기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평소 집에서 쇼핑백을 모아둬요.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기엔 아깝잖아요.

▼ 알뜰시장에서 재미있는 일화도 많이 경험하실 것 같아요.

5~6년 전 알뜰시장에 굉장히 고가인 장신구를 내놓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원가를 미처 생각지 못하고 ‘0’ 하나를 덜 붙여서 판 거예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저희끼리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알뜰시장을 연 초창기여서 그런 실수가 잦았어요. 초창기에는 너무 싸게만 팔아서 이튿날에는 팔 물건이 없을 정도였죠. 여러 해 시행착오를 겪다보니 이제 좀 노하우가 생겼어요. 방문객을 위한 팁을 드리자면, 첫날 일찍 오시면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찜할 수 있어서 좋고 둘째 날에는 할인을 많이 해주니까 아주 싸게 살 수 있어서 좋아요.



▼ 원래 물건을 잘 버리지 않으시나요. 2014년 둘째 딸 선이 씨가 이사장님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됐었어요.

그건 재활용이라기보다 딸이 입겠다고 한 거예요. 웨딩드레스를 기념으로 가지고 있다가 딸이 결혼한다고 해서 “엄마 웨딩드레스를 한번 입어봐” 했는데, 딱 맞더라고요. 제가 1979년에 결혼했으니까 만 스물세 살 때 입었던 드레스죠.

▼ 2002년 대선 후보 부인들의 한복 화보 촬영을 할 때도 이사장님이 가지고 있던 오래된 한복을 입으셔서 참 검소하다는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결혼 후 한복 입을 일이 좀 많았어요. 제사나 명절, 결혼식 때는 꼭 한복을 갖추는데, 대가족이다 보니 자주 입을 수밖에 없거든요. 아버님(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한복을 참 좋아하셨어요. 당신도 한복을 즐겨 입으셨고요.

▼ 현대가는 가족 모임도 즐기는 분위기예요.

대소사가 많죠. 그때마다 다 모이고요.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는 특히 조찬을 항상 자식들과 함께하셨어요. 젊었을 때는 아버님이 새벽에 부르시면 힘들어했지만, 제가 부모가 되어 보니 아버님은 더 힘드셨겠다 싶어요. 자식들 챙기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 이사장님 부부도 자녀들과 조찬을 함께하나요.

매일 함께하지는 못해요. 아이들이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가족 ‘단톡방’에서 약속을 잡고 다 함께 식사를 하려고 노력해요. 그렇다고 매주 그렇게 하지는 못해요. 아이들마다 출근 시간이 다르고 큰아이(정기선 현대중공업 전무)가 울산에 내려가 있어서요.  

▼ 동생이 먼저 시집가서 큰딸(정남이 아산나눔재단 사무국장)이 섭섭해하지는 않나요.

요새 아이들은 생각이 참 자유롭더라고요. 큰딸보다 둘째가 먼저 (시집을) 가게 돼서 처음에는 인간적으로 조금 망설였는데, 언니가 언제 갈지 모르니까 기다리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편하게 짝이 생기는 순서대로 보내려고 해요.

▼ 어떤 사위를 보고 싶으세요.

조건보다 사람 됨됨이죠. 선후배들끼리 소개해서 만나고 그러는데, 조건을 굳이 본다면 우리 딸은 키가 크니까 비슷한 키의 신랑감이면 좋겠어요. 그리고 서로 대화가 돼야죠. 부부간의 소통이 중요하니까요. 가정환경도 비슷하면 좋겠고, 취미도 같으면 좋고. 하지만 무엇보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중요하죠.

▼ 이해심 많은 엄마네요.

서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부모가 억지로 결혼시킬 수 있나요.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부터 결혼을 자유스럽게 했어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아버님에게 보이고 허락받았어요.  


▼ 요즘 남편 내조는 어떻게 하세요.

지금은 남편이 정치인도 아니고, 기업 경영 일선에 있는 게 아니니까 오히려 저를 외조해줘요. 지난달에 열린 ‘예올 후원의 밤’에도 끝까지 함께했어요. 정신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제가 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주시니 감사하죠.

▼ 가정에서 자녀들에게는 어떤 점을 강조하시나요.

특별한 교육 철학 없이 사랑을 많이 주려고 노력해요. 아이들은 충분한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웃음). 아이들이 자랄 때도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보다 “정직하고, 약속 잘 지키고. 소박하게 살라”는 말을 자주 한 것 같아요.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결혼도 좋아하는 사람과 하라”고 했고요.

▼ 옛것을 올바르게 지키자는 예올의 정신을 자녀들이 이어가고 있나요.

저희 아이들은 모두 예올 회원이에요. 각자 생활이 바빠서 모임에 자주 오진 못해도 시간이 되면 참석해요. 지난 10월 5일 열린 예올 ‘후원의 밤’ 행사에도 큰딸 남이가 참석했어요. 저희 아이들뿐만 아니라 회원들의 자녀도 예올 정신을 이어가고 있어요. 연령에 맞춘 다양한 교육 모임을 통해서요. 20~30대 엄마들을 위한 ‘영예올’, 어린 자녀가 있는 ‘예올맘’,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예올 주니어’ 등이 대표적이죠. 아직 회원수는 적지만 예올 정신이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려면 어려서부터 꾸준한 교육이 필요하죠.

▼ 어느덧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耳順)의 나이가 됐습니다. 세월이 흐른 만큼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달라진 점이 있나요.  

항상 제 자신을 되돌아보게 돼요. 그러면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부족한 게 많다는 걸 새삼 알게 돼요. 남은 시간이라도 젊을 때 하지 못했던 일을 다시 할 수 있게 좀 더 노력해보자 하는 마음이 생겨요. 저도 이제 환갑이잖아요. 육십갑자를 새로 시작하는 출발선상에 있으니 남은 인생을 후회 없이 잘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져요. 그러다 보니 엄마로서 앞으로 자녀에게 남기게 될 추억, 할머니로서 손자 손녀에게 남기게 될 추억이 굉장히 소중하고 의미심장하게 다가와요. 매 순간 맞이하는 ‘현재’라는 선물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이유죠.  



인터뷰를 마치고 김 이사장은 다시 알뜰시장의 판매 도우미로 나섰다. 자원봉사를 하는 다른 회원들과 똑같이 1만원짜리 스카프를 목에 두른 그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다.



사진 홍중식 기자
디자인 박경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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