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TYLE

책벌레들이 패션계를 점령한 이유 

안미은 프리랜서 기자

2025. 06. 24

구식 안경에 헐렁한 카디건을 걸친 책벌레가 런웨이를 장악할 줄 누가 알았을까. 촌스러움의 대명사였던 범생이 룩이 이제는 가장 쿨한 스타일로 떠올랐다. 
집을 나서기 전, 책 한 권쯤 집어 드는 애티튜드가 그 어느 때보다 멋져 보이는 순간이다.

어릴 적 ‘책벌레’라는 별명은 흔히 놀림감이었다. 유행과는 담쌓고 사는 촌스러운 스타일의 대명사였으니까. 그러나 돌고 돌아, 도서관 구석에서 책이나 읽을 법한 이른바 ‘책벌레 룩’이 요즘 힙스터 못지않은 패션 트렌드로 부상했다. 이름하여 라이브러리언 코어(librarian core). 지적인 사서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은 이 룩은, 지난해 패션계를 휩쓴 올드머니 룩과 프레피 룩을 절묘하게 섞어놓은 버전이라 보면 된다. 언뜻 과거의 긱 시크나 너드 패션의 연장처럼 보이지만, 훨씬 더 현대적인 감각과 개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스타일 공식은 명확하다. 클래식한 니트 스웨터는 크롭트 형태로 변형하거나 두 벌을 겹쳐 입어 스타일에 밀도를 더하고, 여성스러운 미디스커트는 클래식한 로퍼와 메신저 백을 더해 중성적인 무드를 살리는 것. 여기에 얇은 프레임 안경으로 인상을 정돈하고, 한 손에 책 한 권만 더하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라이브러리언 무드가 완성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애티튜드. 세상에서 내가 가장 세련되고 지적인 존재라는 자신감이야말로 촌티 폴폴 나는 책벌레 룩을 쿨한 스타일로 바꿔놓는 비결이다. 

패션 하우스 넘어 소셜미디어에서도 인기 

트렌드는 언제나 런웨이를 통해 증명된다. 이번 시즌, 주요 패션 하우스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라이브러리언 코어 룩을 선보이며 지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사카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아베 치토세는 모델들의 손에 실제 책을 들려 런웨이에 세웠다. 셔츠에 니트 베스트를 껴입거나 데님 점프슈트를 입고 안경을 쓴 채 무대를 걷는 모습은 마치 청춘 캠퍼스의 한 장면 같았다. 관객들 사이에서 “쇼가 끝나면 곧장 도서관으로 향할 것 같다”는 농담 섞인 반응이 나올 정도. 클래식의 정수인 샤넬도 프레피 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트렌드에 동참했다. 오버사이즈 셔츠와 카디건 셋업을 원피스처럼 연출해 자칫 고루할 수 있는 분위기에 경쾌함을 더했다. 미우미우 역시 색색의 펜슬 스커트에 백팩을 조합해 전형적인 범생이 룩을 트렌디하게 끌어올렸다. 가브리엘라허스트 역시 주목할 만하다. 유머러스한 컬러 프린트의 폴로 셔츠와 허리선을 높인 하이웨이스트 슬랙스로 너드 스타일을 세련되게 풀어냈다. 도쿄와 상하이 컬렉션에서도 흐름은 분명했다. 일본 기반의 하이크는 티셔츠에 체크 셔츠를 겹쳐 입고 슈트 팬츠를 착용하는 식의 과감한 믹스 매치를 즐겼다. 여기에 플랫폼 샌들과 스냅백으로 스트리트 무드를 한껏 끌어올렸다. 한편 상하이의 신예 슈슈통은 셔츠부터 니트 베스트까지 겹겹이 레이어드한 상의에 미디스커트를 매치하고, 무테안경과 시스루 삭스, 키튼 힐로 마무리해 은근한 관능미를 드러냈다. 

라이브러리언 코어는 소셜미디어에서도 빠르게 확산 중이다. 인스타그램과 틱톡에는 이미 #librariancore #bookchic #bookgirl 해시태그를 단 OOTD 게시물이 넘쳐난다. 억 단위 조회수를 기록한 영상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셀럽들 역시 트렌드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고 있다. 패션 인플루언서 카미유 샤리에는 클래식한 화이트 폴로 셔츠에 시스루 미디스커트를 매치한 감각적인 라이브러리언 코어 룩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손에 든 책 한 권이 룩의 마침표 역할을 한다. 디지털 크리에이터 샬럿 올리비아는 편안한 스트링 셔츠와 팬츠 차림에 고전 소설을 읽는 신을 연출해 지적인 무드를 극대화했다. 화제의 핀터레스트 걸, 로라와 켄달 데어는 스트라이프 셔츠에 슬랙스나 데님 팬츠를 매치한 북 시크 룩으로 팔로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모델 신디 브루나는 아버지 옷장에서 꺼낸 듯한 체크 셔츠와 데님 팬츠로 개성을 드러냈다. 슈퍼모델 엘사 호스크 역시 시스루 셔츠와 니트 베스트, 맥시스커트로 세련된 사서 콘셉트를 소화했다. 해당 게시물에는 “책 한 권 들면 완벽해요”라는 재치 있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실제 거리에서도 헌책을 소품처럼 들고 다니거나, 서적이 그려진 에코백을 멘 패피들이 눈에 띈다. 이런 현상은 정보 과잉 시대를 살아가는 Z세대가 갈구하는 내면과 지성을 향한 동경으로 비친다. 라이브러리언 코어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우리 삶의 태도와 이상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코스프레하듯 유행을 좇을 필요는 없다. 라이브러리언 코어의 ‘진짜’ 매력은 본인만의 교양과 취향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데 있다. 케케묵은 장롱 속 니트 베스트, 빈티지 숍에서 발견한 카디건, 대학 시절 쓰던 낡은 노트와 책까지 소소한 물건에 담긴 이야기가 모여 곧 스타일이 된다. 트렌드는 바뀌어도 취향을 드러내는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게 요즘 책벌레들이 멋져 보이는 이유다.

#책벌레패션 #라이브러리언코어 #여성동아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슈슈통 하이크 사진출처 인스타그램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