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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의 역사’와 ‘냉장고를 부탁해’ 사이 만화가 김풍

글 · 김지은 자유기고가 | 사진 · 조영철 기자, JTBC 제공

입력 2015.05.19 14:10:00

김풍은 요즘 제일 잘나가는 만화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김풍이 만화가’라고 하면 뜬금없다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그 사람이 요리사가 아니라 만화가였어?”
그런데 놀랄 일이 또 있다. 이 남자의 뇌, 무척이나 진지하고 섹시하다.
믿을 수 없다면 그의 만화 ‘찌질의 역사’를 보라.
지난 4월 2일 연재를 한 주 쉰다는 4컷짜리 공지 만화를 올렸는데, 사람들은 거기에까지 9.59의 평점을 주었다.
‘찌질의 역사’와 ‘냉장고를 부탁해’ 사이 만화가 김풍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마치 무림의 강호를 기다리는 기분으로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인터뷰이 중에는 간혹 너무 눈치가 빨라서 마주한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들을 늘어놓는지 꿰는 재주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예상컨대 김풍(38 · 본명 김정환)도 그런 부류임에 틀림없었다. 잠시라도 정신줄을 놓았다가는 역공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에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괜한 걱정만은 아니었다. 유명인의 냉장고를 스튜디오로 옮겨다 놓고 그 안에 있는 재료로 9명의 셰프가 주제에 따라 돌아가며 2명씩 짝을 지어 대결을 펼치는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그는 짧은 자취 경력만으로 쟁쟁한 요리 고수들을 들었다 놨다 하며 진땀을 흘리게 만들고 있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연재 중인 만화 ‘찌질의 역사’는 사람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쓴 한 편의 심리소설 같은 느낌이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남자들이 객기로 가득했던 20대 초반의 흑역사를 돌아보는 이 만화는 탄탄한 구성과 긴장감 있는 스토리 전개, 주연부터 조연, 심지어 그냥 지나가는 단역처럼 등장하는 캐릭터까지도 세세하게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웹툰답지 않은 기나긴 회별 분량과 스크롤의 압박에도 개의치 않고 긴 숨을 몰아쉬며 그의 만화에 몰입한다.

그런데도 TV에서 단편적으로 보여준 캐릭터 때문에 사람들은 간혹 그의 만화에 대해 오해를 하곤 한다. 요즘 넘쳐나는 엽기 코믹 버전의 웹툰들처럼 읽을 때는 배꼽을 잡고 웃지만 컴퓨터 화면의 전원을 끄는 순간 무엇을 보았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을 거라 지레짐작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그 선입견에는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보여준 깐죽대는 모습과 ‘찌질의 역사’라는 다소 가벼워 보이는 작품의 제목도 적잖이 한몫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입견은 김풍의 그 어떤 면도 설명해내지 못한다. 생각 없이 깐죽대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가볍지는 않다. 그것은 그와 그가 만든 요리, 그리고 그의 만화가 가진 공통점이자 단단한 합일점이다.

MSG 같은 캐릭터



“제가 원래는 좀 내성적인 성격이거든요.”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말을 그가 먼저 꺼내는 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오늘은 엄마가 기분이 좋나 안 좋나 살피고, 기분이 좋은 것 같으면 이런 얘긴 꺼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고. 어떻게 보면 좀 피곤하게 사는 타입인 거죠. 일단 과감하게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얘기하고 지르는 게 남자로서는 더 매력적일 수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상대의 심리를 살피고, 거기에 맞춰서 얘기하는 그런 타입이거든요.”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김풍의 역할 역시 그렇다. 요리를 배운 적 없는 ‘자취 요리 연구가’가 실력을 아무리 연마한들 직업 요리사들의 노련한 손끝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갈고닦은 ‘눈치 보기’ 재능을 발휘하기로 했다.

“제작진이 저를 섭외한 건 요리 때문이 아닐 거라 생각했죠. 세상에 요리 잘하는 전문가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나를 캐스팅한 건 요리사들이 할 수 없는 걸 해낼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결론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 안에서 사람들과 케미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어요. ‘기대치도 않던 사람이 좀 재미있네?’ 이런 반응을 얻는 게 프로그램 안에서 제가 원하던 역할이에요.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다른 출연자분들이 정통 요리라면 저는 거기에 살짝 첨가되는 MSG 같은 거예요. 조미료. 아, 저는 MSG가 나쁜 거라고 생각 안 해요. 살짝만 첨가해도 놀라운 맛을 내잖아요. 하지만 어떤 요리에서도 MSG를 재료로 치지는 않죠. 가지볶음, 된장찌개, 콩나물국… 어디에나 들어가지만 말이죠.”

모든 일들은 현실을 인정하면 의외로 쉬워진다. 요리 대결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스스로를 주재료가 아닌 MSG라 인정하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만 같은데도 그는 오히려 그런 상황을 즐겼다. 쟁쟁한 프로들 앞에서 주눅이 들거나 괜한 허세로 분위기를 망치는 것보다 오히려 그 편이 재미있고 편하기도 했다.

다른 셰프들과 옥신각신하는 모습도, 출연자들의 실수를 들춰내서 부아가 치밀게 만드는 것도 실은 다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게 그의 얘기다. 역시나 그는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스마트하고, 진지하며, 섬세했다.

“만화가도 연출자잖아요. 그래서 제가 출연하는 프로그램도 자꾸만 연출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는 거 같아요. 만화를 그릴 때 제가 만든 캐릭터들이 제 역할을 못하면 답답해지는 것처럼 제작진도 그럴 거라 생각해요. 그걸 보는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찌질의 역사’와 ‘냉장고를 부탁해’ 사이 만화가 김풍


생애 첫 요리는 정통 이탈리아식 루콜라 피자

‘찌질의 역사’와 ‘냉장고를 부탁해’ 사이 만화가 김풍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하기 전에도 그는 이미 꽤나 유명한 만화가였다. 홍익대 애니메이션학과에 다니던 2003년 웹툰 ‘폐인가족’으로 데뷔했는데, ‘아·#54671;·#54671;’ ‘행자’ ‘득행’ 같은 신조어들로 가득했던 이 만화는 폐인 신드롬을 낳았고, 그는 단숨에 인기 작가 반열에 올랐다. 웹툰 등장인물이 싸이월드 미니홈피 캐릭터로 인기를 끌어 돈방석에 앉기도 했고, 번 돈을 다 쓸 때까지 놀기도 했다. 만화는 손에서 놓은 사람처럼 영화기자에 연극배우, 게임 디자이너로 일한 적도 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잉여력을 발휘해 SNS에 대충 만든 기발한 요리들을 올리며 스스로에게 ‘자취 요리 연구가’라는 타이틀도 달아주었다.

이렇게만 열거해놓고 보면 뭔가 진중하지 못하고 막 사는 인생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무언가 하나에 재미가 들리면 끝장을 볼 때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나는 전문 요리사가 아니니까 요리를 막 해도 괜찮다, 모든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요리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얘기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직접 만들어본 음식이 ‘무려’ 이탈리아식 루콜라 피자였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서른 무렵부터 자취를 시작했는데 끼니때마다 음식을 사 먹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더라고요. 어머니가 음식 솜씨가 무척 좋으셔서 자취를 하기 전까지는 먹거리 걱정을 해본 일이 없었거든요. 기껏 맛집을 발견해서 단골 리스트에 올려놓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이 문을 닫아버리고 그런 식이었죠. 홍대 쪽 상권이 특히 그런 분위기가 심해요.”

그가 스스로 피자를 만들 결심을 한 건 자취방 근처 자주 가던 단골 바가 곧 문을 닫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서였다.

“피자가 정말 맛있는 집이었거든요. 그런데 조리장이 이탈리아로 돌아가야 해서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다시는 그 피자를 맛볼 수 없다니 너무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 레시피를 물어봤더니 흔쾌히 알려주더군요. 중요한 건 온도와 숙성 시간이었어요. 해외 직구로 화력이 좋은 피자 스톤을 사서 만들었더니 얼추 그 집에서 맛보던 피자 맛이 나더라고요. 그때부터 요리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이것저것 조리도구도 사 모으게 되고….”

요리라곤 해본 적도 없는 남자가 단골 피자집에서 맛본 피자 하나를 만들어보겠다고 피자 스톤까지 구매했다는 얘기에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런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얼마 전 TV를 통해 공개된 그의 집 주방은 어지간한 요리 전문가의 주방 뺨칠 정도로 갖가지 향신료와 조리 도구들로 넘쳐났다. 종류만 많은 게 아니라 정리한 모양새나 구조도 여간 노련미가 넘치는 게 아니었다.

“취미로 그림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따라 그리는 모작을 많이 시켜요. ‘그걸 어떻게 그려’ 싶지만 선생님이 옆에서 좀 거들어주고 하면 그럴싸하게 그려지거든요. 그러면 ‘우와, 내가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 싶으면서 그림에 취미가 생기게 돼요. 요리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어요. 요리에 관심을 가지려면 김치찌개 이런 것보다는 남들이 쉽게 손대지 못하는 음식부터 시작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한 거죠. 버터로브스터나 스테이크 같은 거? 그런 걸 해내고 나면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지거든요. 고급 레스토랑에서 맛본 걸 흉내내보고, 비슷하게 해내고 나서는 ‘오, 나도 할 수 있구나!’ 감탄하면서 재미를 느끼게 되더라고요.”

얼렁뚱땅 만든 것 같은 요리에 출연자들이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거나, 인스턴트에만 집착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엉뚱한 재료들의 조합이 어떤 맛을 낼지 기막히게 예상해내는 실력이 어쩐지 예사롭지 않다 싶더니 그 짧은 요리 경력에 숨겨진 내공의 비결은 비범함이었다.

‘찌질의 역사’와 ‘냉장고를 부탁해’ 사이 만화가 김풍
나는 누가 뭐래도 만화가다

그는 최근, 요즘 뜨는 연예인들만 출연한다는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또 한 번 화제를 모았다. 함께 방송에 나온 출연자들 중에서도 그의 입담은 단연 돋보였다. 그에게 러브 콜을 보내는 건 ‘라디오스타’만이 아니었다. 각종 요리 프로며 예능 프로까지, 방송 요청을 죄다 수락했더라면 펜대를 놓고 아예 방송인으로 전업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방송 대신 ‘찌질의 역사 시즌2’ 연재를 시작했다. 자신의 직업을 한마디로 정의 내리자면 무엇이라고 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만화가”라 대답했다.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엔 직장인이 아니고선 직업을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엔 음악을 하다가 일러스트레이터로 전향한 사람도 있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여지를 두는 경우도 많아요. 그런데 저는 만화가예요. 아마 다른 걸 하게 되더라도 평생 만화를 손에서 놓지는 않을 거 같아요. 솔직히 예전에 ‘폐인가족’을 그릴 땐 제가 만화가라고 말하는 게 부끄러웠어요. 작품에 자신이 없었던 거죠. 그렇지만 지금은 달라요. 사람들한테 ‘저 만화가입니다. 제 작품 안 보셨으면 한번 보세요. 재미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요. 그만큼 제 작품에 애착도 생기고, 자신감도 생겼달까요.”

그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가 전작 ‘폐인가족’에 대해 스스로 왜 그렇게 평가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폐인가족’은 분명 재미있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김풍이라는 만만치 않은 감수성과 자존심을 가진 사내가 만화가라는 타이틀을 내걸기에는 성에 차지 않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찌질의 역사’를 준비하기 전에 따로 준비하던 작품이 있었는데, 지금 ‘찌질의 역사’ 작화를 담당하고 있는 심윤수 작가가 영화 ‘건축학개론’을 꼭 보라더라고요. 작품을 봤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죠. 사람들은 자신의 지질함을 감추고 깎고 도려내면서 기억을 재편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그래놓고선 먼 훗날 ‘아, 그때는 멋있었지’ 이렇게 추억하거든요. 하지만 사람은 실패며 좌절도 겪어보고, 때로는 망신도 당해보고, 누구한테 상처를 받거나 주기도 하면서 성장하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걸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찌질의 역사’는 지질해서 아름다웠던, 하지만 우리가 제멋대로 기억을 재편해버렸던 젊은 날들을 긴 호흡으로 되새김질하는 만화다. 그래서 대충 넘겨가며 보기엔 그 무게가 만만치 않다. 짧고 자극적인 내용의 에피소드가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었던 웹툰 시장에서 이와 같은 아날로그적 감성과 진중함이 성공하리라고는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풍은 ‘자취 요리 연구가’ 자격으로 방송에 출연하는 날 외에 대부분의 날들을 만화가로 살아간다. 만화가 김풍으로 살아가는 날들은 그에게 자신의 성장을 반추하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방송에서의 제 모습만 보고 제가 엄청 활동적이고 외향적일 거라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예요. 방송이 없는 날엔 주로 혼자 생각하고 작업하고, 그게 거의 전부거든요. 하루 종일 멍때리면서 보내는 날도 있어요. 멍때리는 시간이 참 중요한 게, 그렇게 잡생각을 많이 하면 할수록 작품의 결과물이 좋아져요. 계속 뇌를 괴롭히면서 생각을 하게 만들다 보면 그동안 쌓아왔던 수많은 메모리들 중 잊고 있던 것들이 생각날 때가 있거든요. 어제 짜놓은 콘티보다 오늘 퍼뜩 생각난 게 더 좋을 때도 있고, 어제 생각한 대사보다 오늘 생각해낸 대사가 인물의 상황이나 캐릭터를 더 잘 살릴 때도 있고 그런 거죠.”

그는 만화에도 향취라든가, 각자만의 온도 같은 게 있다고 믿는다. 책꽂이에 꽂힌 오래된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H2’ 앞에 설 때면 책을 꺼내들기 전부터 한여름의 뜨거운 고시엔(일본의 고교 야구 대회)이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만화가로서의 새로운 출발점에 선 이 순간이 그래서 그에겐 더없이 각별하다. 향기가 있는 만화, 가슴 두근거리는 온도가 느껴지는 만화를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은 바로 지금 말이다.

디자인 · 최진이 기자

의상협찬 · PAT

여성동아 2015년 5월 6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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