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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번가’에서 18년, 남경주 인생의 깊이를 말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들이 내가 무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글·김지은 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기자, CJ E&M 제공

입력 2014.08.14 16:00:00

한국 뮤지컬계의 전설, 남경주가 올해로 18년째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에 출연 중이다. 한 무대에 그토록 오랫동안 선다는 건 배우에게 과연 어떤 의미일까. 뮤지컬 고전과 ‘장맛’ 나는 남자와의 기막힌 만남.
‘42번가’에서 18년, 남경주 인생의 깊이를 말하다
무대 위 배우 남경주(50)를 처음 보는 순간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1백년 넘은 묵은 간장이 생각났다. 햇살에 반들반들 윤이 나는 크고 작은 장독 안에는 수백 년 거친 세월을 묵묵히 이겨낸 장들이 말갛게 찰랑이고 있었다. 간장을 숟가락으로 한입 콕 찍어먹어 본 출연자 입에서 터져 나온 한 마디 감탄사! “캬아~!” 남경주의 연기를 본 이들도 그 어떤 형용사가 생각날 겨를도 없이 “캬아~!” 그 한마디가 먼저다. 오래 묵은 간장처럼 묵직하고 깊은, 그러나 세월을 속이지 않는 말간 울림을 가진 사나이에 대한 찬사.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익숙하지만 낯선 그곳 ‘브로드웨이 42번가’

남경주의 ‘브로드웨이 42번가’는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이들이 남경주와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인연을 지난해 줄리안 마쉬 역을 맡으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남경주는 ‘브로드웨이 42번가’가 국내에 첫 선을 보인 그 해부터 무대 위에서 경쾌한 탭댄스를 췄다. 안무가 앤디에서 다정한 훈남 빌리 로러로, 그리고 이제는 카리스마 넘치는 연출가 줄리안 마쉬로, 근 20년 가까이 한 작품에 출연 중인 그에게 ‘브로드웨이 42번가’는 어쩐지 무척이나 익숙한 풍경일 것 같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까지 작품을 하면서 한 번도 만족스러웠던 적이 없다고 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배우의 삶과 더불어 늘 성장하고 변화해간다. 대본을 들여다볼 때마다 어제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 떠오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본을 보고 또 보며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의 꿈, 그 꿈을 향해 나아가는데 필요한 것들, 그리고 꿈을 가로막는 장애물들까지,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다보면 어느새 고정관념을 깬 또 다른 무언가가 나온다. 그런 생각과 감정들이 연기에 묻어나면 관객들도 ‘아아, 그래! 저런 방법이 있었지!’하며 자신들도 예상치 못했던 부분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곤 한다.

▼ 2014 ‘브로드웨이 42번가’, 어떻게 달라졌나



세월이 흘러도 작품이 가진 매력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대에 선 배우들 각자의 인생은 달라졌다. 아니, 깊어졌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전혀 다른 느낌이 들곤 한다. 나 역시 대본을 들여다볼 때마다 자꾸만 새로운 느낌이 든다. 작년에 느끼지 못했던 걸 올해 느끼는 게 있다. 예를 들어 줄리안이 어떤 여자아이와 부딪히는 장면을 연기할 때, 예전엔 이미 다른 일로 기분이 나빠진 상태였으니까 버럭 화를 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쟤는 또 뭐야!” 하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그럴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너무 짜증이 나 있는 상태에서 어이없는 일을 당하면 허탈해서 웃음이 나지 않는가. 그래서 이전과는 다르게 이번엔 헛웃음을 지었는데 몰입도가 훨씬 좋아졌다. 근육이 자연스럽게 이완되는 느낌이랄까.

답은 고정관념을 벗어던지고 지금의 내 모습, 내 시선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데 있었다. 그걸 깨닫고 난 후부터 굉장히 편안해졌다. 배우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굴곡을 무대 위 인물에 투영하게 마련이다. 지난해보다 올해, 내가 살아온 시간의 폭이 넓어진 만큼 줄리안 마쉬도 더 깊고 넓은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42번가’에서 18년, 남경주 인생의 깊이를 말하다

남경주는 1996년부터 ‘브로드웨이 42번가’와 인연을 맺으며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왔다.

▼ 캐스팅이 정말 화려하다. 김영호, 박해미, 홍지민 등 이름만으로도 기대가 된다.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기도 하고, 삶의 경험이 많은 배우들이다 보니 이제는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알 정도로 편안하다. 옛날엔 서로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이젠 그런 것들이 아무 의미 없다는 것까지도 잘 알고 있다. 서로 배려하고 감싸주면서 연기할 수 있고 그래서 훨씬 자연스럽고 좋은 연기가 나오는 듯하다.

▼ 티저 영상으로 공개된 탭댄스 독무대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티저 영상 때문에 나의 탭댄스 독무대가 있는 줄 오해하시는 분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는 줄리안 마쉬가 탭댄스를 추는 장면은 없다. 티저 영상은 내가 오랫동안 탭댄스를 춰왔고, 배우들의 탭댄스 신이 ‘브로드웨이 42번가’의 놓칠 수 없는 명장면이기에 이를 모티프로 만든 것이다. ‘브로드웨이 42번가’는 배우들의 팀워크로 완성되는 작품이다. 28명이 함께하는 화려한 탭댄스는 볼거리 그 이상의 감동을 선사한다.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소리를 맞추기 위해 늘 함께 연습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팀워크가 좋을 수밖에 없다. 이게 매우 큰 힘을 발휘한다. 무엇보다 탭댄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뛴 시간만큼, 뛴 양만큼 소리가 야물어지고 무게감이 생긴다. 리듬이란 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적 센스, 감각이다. 탭댄스가 가진 리듬감은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가슴 뛰는 울림, 그게 바로 감동 아닌가.

▼ 남경주만큼 탭댄스를 하려면 얼마나 연습해야 하나.

1960~70년대 코미디언 선배님들이 탭댄스를 추시기도 했지만 아마 우리나라 뮤지컬 무대에 탭댄스를 적용한 건 내가 처음일 거다. ‘싱잉 인 더 레인’ 초연 무대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한번 탭댄스를 추기 시작하면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쉬지도 않고 계속 췄다. 땀이 바닥에 뚝뚝 떨어져 흥건해질 정도였다. 그 후로도 다양한 공연에서 탭댄스를 췄다. 이제는 자전거 타기처럼 근육이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동영상 촬영을 위해 따로 연습을 한 건 아니었는데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딸과 태권도장에서 운동하는 다정한 아빠

‘42번가’에서 18년, 남경주 인생의 깊이를 말하다
올해 나이 쉰. 배우로서 결코 적지 않은 나이다. 그것도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뛰어다녀야 하는 뮤지컬 배우들에게 세월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부담이다. 뮤지컬 ‘맘마미아’의 샘, ‘시카고’의 빌리 플린, ‘삼총사’의 아토스, ‘넥스트 투 노멀’의 댄, ‘위키드’의 마법사, 그리고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줄리안까지 30여년 세월 동안 그가 연기해온 인물들의 숫자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 그의 팬들은 ‘남경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고 말한다. 그는 여전히 젊은 배우다. 외모도 그렇지만 삶에 대한 열정적인 태도와 성향도 그렇다. 심각한 얘기를 나눌 때 이마 위에 얼핏 내려앉는 주름마저 없었다면 그가 가진 관록을 알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2005년 11세 연하의 아내와 결혼해 딸 하나를 둔 남경주는 몇 해 전, 어느 인터뷰에서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 삶의 최종 목표라 말했다. 그런 그에게 이번에는, 무엇을 위해 사느냐고 물었다. 서슴지 않고 ‘가족’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에게 가족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존재다.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뒷산에 오르고, 일주일에 서너 번은 가족과 함께 태권도장을 찾아 운동을 즐긴다고 한다. 거창하고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갈 것 같은 국내 최정상의 중견배우에게서 이런 말랑말랑 소박한 꿈 얘기를 듣는 것, 꽤나 안심이 된다.

▼ 무엇이 남경주를 뮤지컬 배우로 살게 했나.

뮤지컬 배우가 된 데는 형님(뮤지컬 배우 남경읍)의 영향이 가장 컸다. 어릴 때부터 형과 방을 같이 쓰면서 매일 뮤지컬 음악을 듣고 뮤지컬과 관련된 얘길 들으며 자연스럽게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들었던 거 같다. 하지만 배우로 데뷔한 건 뮤지컬이 아닌 연극을 통해서였다. 서울예술대학 연극학과를 나왔는데, 당시 교수님이 나를 연극무대에 설 수 있도록 주선해주셨다. 솔직히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한 게 더 컸다. 어릴 때부터 춤을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교회 연극무대에서 웃긴 춤을 췄더니 사람들이 엄청 웃으면서 박수를 쳐줬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AFKN에서 나오는 ‘소울 트레인’이라는 프로그램도 즐겨봤다. 신곡을 소개하는 음악 방송 같은 거였는데 노래가 나오면 댄서들이 각자 제멋대로 춤을 춰댔다. 별의별 희한한 춤을 추는 사람들이 다 나왔는데 그걸 보면서 따라 추곤 했다. 신기하게도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추는 춤들은 모두 달랐다. 그렇게 춤에 빠져들다 나중엔 본격적으로 레슨도 받고, 여기저기 춤꾼들을 찾아다니며 춤을 배웠다. 무용과 도강도 많이 했다. 재미있는 건 딸아이도 춤을 무척 좋아한다는 거다. 우리 가족에겐 무언가 그런 역동적인 걸 좋아하는 피가 있나보다. 하하.

▼ 남경주에게 남경읍이란?

형은 내가 이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다리를 놓아준 사람이자 언제나 모범을 보여주는 좋은 선배다. 4남1녀 중 맏이였던 형은 늘 동생들에게 양보하느라 손해를 많이 봤다. 먹을 거, 입을 거, 늘 자신보다 동생들이 먼저였다. 대학에 들어갈 때도 그랬다. 형은 입시 첫해에 중앙대학교 교육학과에 합격했다가 등록금이 없어 대학엘 못 갔다. 아마 어떻게든 대학을 가겠다고 우겼으면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질 않았다. 물론 그 덕분에 재수를 하면서 영화감독들을 쫓아다니고 그러다 이 길로 들어서게 되었지만, 그래도 형을 떠올릴 때마다 형제로서 마음이 싸해올 때가 있다. 이제는 동생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해내고 있으니 형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활동하면 좋겠다.

롱런의 비결,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않을 것

‘42번가’에서 18년, 남경주 인생의 깊이를 말하다
남경주는 뮤지컬 배우가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자질로 성실함을 꼽았다. 얼마 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회를 보면서도 ‘모든 예술가들은 무엇을 만들기 위해 일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꾸준히 작업을 해나갈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림을 오래 그리다보면 자신만의 화풍이 나오고 작품에 자신의 생각이 반영되듯이 배우들 역시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야만 관객을 심금을 울리는 연기를 펼칠 수 있다는 것. 남경주는 “만인에게 인정받는 대가가 된 후에도 늘 초심으로 돌아가 기본기를 다지고 또 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팬들은 남경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고 말하는데, 그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인가.

예전엔 사는 게 참 복잡했다. 다른 사람의 시선, 세상의 시선이 중요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순하게, 주위 시선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나 자신에게만 충실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나도 사람이다 보니 모자라고 실수도 많이 하지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려 애쓰고,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다. ‘예술이란 인생을 반영하는 것’. 안톤 체홉이 한 말이다. 어떤 분야든 자기 인생을 반영시키려면 충실한 자기 삶이 있어야 한다.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들이 내가 무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 배우 남경주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스스로에게 관대해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괜히 나태해진 건 아니지, 안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책하고 돌아본다. 그러한 노력들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남들 앞에서 최선을 다한 척 꾸미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사실 배우는 몹시 위험한 직업이다. 조금만 ‘잘 한다’ 소리를 들어도 금세 나태해지고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딜 가나 알아보고 대접해주니까 내가 정말 잘해서 그런 줄 알고, 더 열심히 안 해도 되는 줄 착각한다. 하지만 지금 받고 있는 것들을 누리면 그만이란 생각에 빠지는 순간 배우는 보여줄 게 없어진다. 자기 삶에 충실하지 않은 배우가 누구의 삶을 표현해낼 수 있겠는가.

▼ 남경주에게 꿈이란.

가족과 일상의 소소한 행복들을 누리며 건강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배우로서는 언제이건 준비가 돼있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그걸 해낼 수 있는 준비가 돼있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선 내 생활을 좀 더 충실하게,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지금처럼 꾸준히, 몸도 생각도 녹슬지 않도록 기름칠을 해가면서. 그래야 내가 느꼈던 많은 부분들을 배역에 충실하게 투영해내고, 무대 위에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여성동아 2014년 8월 6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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