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은(71) 작가는 바위를 지고 산다. 북악산 자락을 타고 내려온 돌덩이들이 그의 서울 평창동 집 옆에 턱하니 걸치고 있어, 거실 창을 열면 마치 드라마 소품같이 현실성 없어 보이는 잿빛 바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거실 벽과 장식장 위엔 모딜리아니 그림 속 여인을 닮은 그의 초상화, 故 김동리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이 놓여 있다. 무거운 바위, 서보영이라는 본명 대신 김동리가 지어줬다는 서영은이라는 이름, 그리고 그 이름에 어울리는 왠지 슬픈 느낌의 목이 긴 여인 초상이 모두 그의 삶의 궤적을 말해주는 것 같다.
1968년 ‘사상계’에 ‘교(橋)’로 등단해 ‘먼 그대’로 이상문학상, ‘사다리가 놓인 창’으로 연암문학상 등을 수상한 서영은은 스물네 살 때 김동리(1913~95)를 처음 만났고, 아내(작가 손소희)가 있던 그와 사랑에 빠졌다. 1987년 손소희가 세상을 떠나자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고 199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동리는 5년 후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김동리와 함께한 삶은 기쁨과 고독, 행복과 번뇌가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문단의 거목과 서른 살이나 어린 여성의 사랑은 사람들의 호기심, 상상력과 맞물려 더 크게 부풀려졌으며, 때로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그럼에도 침묵하던 서영은이 14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해냄)를 통해 김동리와 연애, 비밀 결혼식, 짧은 결혼 생활, 남편의 투병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스토리를 털어놓았다. 사랑을 시작한 지 47년, 김동리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만이다.
김동리 선생과의 치열했던 사랑
책은 두 번째 아내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아내의 발인 전날 아무도 모르게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온 남자는 젊은 연인의 집으로 향한다. 여자는 “네가 불쌍해서 왔다”는 뜻 모를 말을 하는 남자의 발을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남자는 1천 명의 문상으로도 위로받지 못했던 슬픔을 달랜다. 작가는 자칫 지탄받을 여지가 있는 이야기까지 3인칭 시점으로 담담하게 펼쳐낸다. 심지어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절(봉덕사)의 이름은 실명으로 등장한다. 그토록 하지 않았던 자신의 삶 내밀한 부분까지 털어놓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는 그동안 구도의 방편으로 문학을 해왔어요. 그런데 40년 넘게 살고 쓰고 사랑하고 보니 그 안에 내가 문학을 통해 찾아온 구도의 과정이 담겨 있더군요. 그것을 쓰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았어요. 그래서 정면으로 다루게 됐죠. 아주 오래전 이야기지만 이상하리만치 여러 정황들이 눈 위의 발자국처럼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어 과거를 되짚는 일은 어렵지 않았어요.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아프고 고통스러워 몇 차례 덮으려고 했는데, 그런 고통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은 작업을 반복하는 동안 과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 따라줬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통속적인 잣대로 보자면, 문학사를 장식한 문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한 러브 스토리를 담고 있지만 글은 담백하게 읽힌다. 작가가 3인칭 시점으로 글을 전개해 나가면서 작품 속 인물들과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혹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조차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예전에 한 시인이 인도 여행 중 화장 장면을 목격하고 그 곁에서 밤새도록 시체 타는 것을 지켜봤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살과 뼈까지 다 타고도 가장 나중까지 불 속에서 지글거리는 것이 있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저게 뭐냐’고 물었더니 ‘심장’이라고 하더래요. 갑자기 궁금해서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아주 담담하게 ‘내 아내’라고 대답하더래요. 불구덩이 속에서 지글거리는 심장과, ‘내 아내’라고 답하는 남자의 무덤덤함…. 독자들을 아프거나 고통스러워서 외면하고 피해온 내면을 직시하는, 그런 자리까지 데려가고 싶었어요.”
그는 글에서 서영은이 많이 보였다면 자신의 글쓰기가 실패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교과서에 등장하는 문학 작품의 저자로만 알고 있던 김동리의 숨겨진 면모를 알게 되는 쏠쏠한 재미를 부여한다.
서영은의 김동리에 대한 첫 기억은 ‘사상계’에 게재된 ‘등신불’을 통해서다. 그 작품을 보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으나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은, 그런 인상을 받았다. 그 후 얼마 안 돼 첫 소설인 ‘교’를 들고 박경리를 찾아갔는데, 박경리는 뜻밖에도 김동리에게 그를 소개시켜줬다고 한다.
“박경리 선생님께서 원고를 읽어보시더니 추천감인데, 자신은 추천권이 없다며 김동리 선생에게 보이라고 쪽지를 써 주시더라고요. 그때 제가 ‘그분 별로 안 좋아하는데…’라고 답했지 뭐예요(웃음). 김동리 선생님이 글을 보더니 너무 수필적이라고 하시더군요. 그해 ‘사상계’ 신인문학상에는 강은교 씨가 당선됐고, 제가 가작 1석, 최인호 씨가 가작 2석이었어요. 그런데 시상식 때 보니 심사위원이 황순원, 김동리, 안수길 세 분이더라고요. 그래서 ‘김동리 선생 때문에 내가 당선이 안 됐구나’ 생각했죠(웃음).”
그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함께 들른 산사에서 첫날밤을 보낸 후 연인이 된다. 손소희는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젊은 연인을 찾아와 “남편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한다. 상식적으로는 그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김동리와 손소희의 관계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손소희 역시 김동리와 연애하던 시절, 첫 번째 아내에게 머리끄덩이를 붙잡힌 것은 물론 여러 차례 봉변을 당했다고 한다. 남편과 아꼈던 후배에 대한 애증, 남의 남편을 앗아가더니 똑같은 꼴을 당했다고 손가락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손소희는 숱한 고민 끝에 김동리와 서영은을 끌어안기로 한 것이다.
“만약 손소희 선생이 다른 여성들처럼 나를 비난하거나 헤어지라고 요구했다면 당장 그랬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손 선생님의 남편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컸던 거죠. 어느 날 저를 찾아와 ‘김 선생 가엾은 분이다, 잘 부탁한다’고 하시는데, 그 말씀을 듣고 나니 두 분의 관계가 제가 상상할 수 없는 경지란 생각이 들더군요.”
인색하고 정의롭고 뜨거웠던 김동리
그에 대한 손소희의 마음과 별개로, 서영은 역시 그 상황이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김동리로부터 달아나고자 마음먹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다만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았던 건 김동리의 힘이었다.
“언젠가 한번 제가 도망갈 생각을 하는 걸 눈치채셨는지, ‘딴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 사랑은 목숨 같은 거야. 목숨을 지키려면 의지를 가져야 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끊임없이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맹세하도록 시키셨죠. 하지만 그런 맹세 때문에 선생님 곁에 끝까지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분만이 제 삶의 동기이자 필연이었고, 그분 외엔 삶의 의미를 확인할 수 없었어요. 선생님도 그러셨던 것 같고요.”
김동리 이외의 남자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을까.
“젊은 남자의 몸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던 적은 있어요.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도 선생님이 답을 주셨어요. 젊어도 노인 같은 남자가 있는가 하면 일흔이 넘은 노인도 청춘일 수 있어요. 선생님이 그러셨죠.”
작품 속 김동리의 분신인 ‘노인’은 여러 겹의 덧문으로 집 안을 꼭꼭 걸어 잠근다. 집안일을 하는 도우미 외에도 밤에 집을 지키는 작은 아줌마를 따로 들일 정도였다. 그의 행동으로 보면 집 안 어딘가에 엄청난 보물을 숨겨놓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노인이 인생의 대단한 성취로 여겼던 그 소유, 즉 김동리 선생이 평생 모았던 1천 점이 넘는 골동품들은 나중에 거의 가짜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소설이 출간되기 전, 친구 몇 명에게 글을 보이면서 노인과 김동리 선생의 모습에 대해 검증을 부탁했더니, 골동품을 지키려고 작은 아줌마를 고용한 게 가장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이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요. 그게 인생이죠. 김동리 선생이 수집했던 골동품 중 진짜는 20% 정도에 불과했어요.”
사소한 부분에 집착하고, 때로는 인색한 노인. 교과서 속 김동리에 대한 환상이 깨질 무렵 서영은이 일침을 놓는다. “하지만 선생님은 엄청나게 정의로운 분이었다”고.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6·25전쟁 때 선생님이 미처 피란을 못 가시고 손소희 선생님 댁에 숨어 있었던 적이 있대요. 당시 두 분은 각자 배우자가 따로 있을 때였는데, 손 선생님 남편이 치안감이었던 터라 그 댁은 안전할 거라 생각하고 손 선생님이 숨겨주신 거죠. 그 댁 다락방에 숨어 있는데, 손 선생님이 남편에게 어떤 사람에 대해 잘못된 이야기를 하시더래요. 김동리 선생님이 그걸 듣고는 못 참고 내려와 ‘그건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남편에게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럴 정도로 옳지 않은 일은 참지 못하는 분이셨죠.”
세상 그 어떤 것도 ‘신상’보다 좋은 것은 없다. 천하 없는 명품도 쓰다 보면 무덤덤해지는 것처럼 남녀 간의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랜다. 서영은 역시 남자의 숨겨진 여자로 살면서 느꼈던 절절한 감정이 결혼과 동시에 변질되는 걸 경험한다. 언제나 당당해 보였던 남자는 갑자기 ‘노인’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특히 두 사람을 둘러싼 주변 환경을 통해 결혼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임을 절감한다. 그는 남편이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진 후 전처의 자식들(김동리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다섯을 뒀다)로부터 폭언까지 듣는다.
“결혼은 철저하게 현실이었고 벼랑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순간도 있었죠. 선생님이 쓰러지면서 그동안 쌓아온, 문학만이 인생의 큰 대답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은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살아 계시지만 한마디 말씀도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오해가 생겨도 해명을 할 수 없고 그러니 더 힘들더군요.”
서영은은 달콤하면서도 고통스러웠던 김동리와의 사랑을 ‘미션’이라고 표현했다.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결코 알지 못했으나 오랜 시간이 흘러 돌아보니, 시련을 통해 자신을 담금질해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피가 뚝뚝 흐르는 처절한 사랑의 대가로 인생과 사람을 향한 더욱 깊은 눈을 갖게 됐다.
“돌아보면 제가 미션을 완성하도록 도와준 분들이 계세요. 손소희 선생님과 제 어머니, 두 분이 펄쩍 뛰거나 반대했더라면 아마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미션을 치르려면 그 사람 자신이 고통 속에서 뒹굴어야 하지만 인내하면서 지켜봐주는 사람의 도움이 절실하거든요. 자녀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어머니들이 담대하게 자식들이 치르고 있는 어려움을 지켜봐주면 그 끝은 반드시 훌륭한 열매와 연결될 거예요.”
극한의 고통 뒤에 만난 또 하나의 문
평생을 의지했던 김동리라는 절대자가 사라지고 난 후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신앙이었다. 그는 지인들의 권유로 오랫동안 신앙 공부를 하고 가톨릭 영세를 받았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그의 대모다. 그리고 서영은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2010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났다.
“선생님 쓰러지고 나서 어떤 것도 힘이 되지 못하고 너무나 힘들었는데 하나님이 답을 갖고 계셨어요.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하나님을 만나 증거를 받고 나니까 다른 데서 생의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산티아고 길엔 다른 아무것도 없어요. 노란 화살표만 따라가다 보면 성당에 이르는데, 그 화살표 하나하나가 다음에 오는 사람을 위해 누군가가 만든 거예요. 깊은 산속을 혼자 걸을 때 화살표의 위력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그 화살표를 따라 길을 걸으며 ‘내가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겠구나’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길고 긴 사랑의 터널을 빠져나온 그는 이제 온전히,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사람이든 다른 무엇이든. 막다른 벽에 이르면 또 다른 문이 있다는 것, 고통 속에 온몸을 던져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서영은은 이제 바위를 지고 있어도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1968년 ‘사상계’에 ‘교(橋)’로 등단해 ‘먼 그대’로 이상문학상, ‘사다리가 놓인 창’으로 연암문학상 등을 수상한 서영은은 스물네 살 때 김동리(1913~95)를 처음 만났고, 아내(작가 손소희)가 있던 그와 사랑에 빠졌다. 1987년 손소희가 세상을 떠나자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고 199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동리는 5년 후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김동리와 함께한 삶은 기쁨과 고독, 행복과 번뇌가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문단의 거목과 서른 살이나 어린 여성의 사랑은 사람들의 호기심, 상상력과 맞물려 더 크게 부풀려졌으며, 때로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그럼에도 침묵하던 서영은이 14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해냄)를 통해 김동리와 연애, 비밀 결혼식, 짧은 결혼 생활, 남편의 투병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스토리를 털어놓았다. 사랑을 시작한 지 47년, 김동리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만이다.
김동리 선생과의 치열했던 사랑
책은 두 번째 아내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아내의 발인 전날 아무도 모르게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온 남자는 젊은 연인의 집으로 향한다. 여자는 “네가 불쌍해서 왔다”는 뜻 모를 말을 하는 남자의 발을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남자는 1천 명의 문상으로도 위로받지 못했던 슬픔을 달랜다. 작가는 자칫 지탄받을 여지가 있는 이야기까지 3인칭 시점으로 담담하게 펼쳐낸다. 심지어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절(봉덕사)의 이름은 실명으로 등장한다. 그토록 하지 않았던 자신의 삶 내밀한 부분까지 털어놓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는 그동안 구도의 방편으로 문학을 해왔어요. 그런데 40년 넘게 살고 쓰고 사랑하고 보니 그 안에 내가 문학을 통해 찾아온 구도의 과정이 담겨 있더군요. 그것을 쓰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았어요. 그래서 정면으로 다루게 됐죠. 아주 오래전 이야기지만 이상하리만치 여러 정황들이 눈 위의 발자국처럼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어 과거를 되짚는 일은 어렵지 않았어요.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아프고 고통스러워 몇 차례 덮으려고 했는데, 그런 고통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은 작업을 반복하는 동안 과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 따라줬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통속적인 잣대로 보자면, 문학사를 장식한 문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한 러브 스토리를 담고 있지만 글은 담백하게 읽힌다. 작가가 3인칭 시점으로 글을 전개해 나가면서 작품 속 인물들과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혹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조차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예전에 한 시인이 인도 여행 중 화장 장면을 목격하고 그 곁에서 밤새도록 시체 타는 것을 지켜봤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살과 뼈까지 다 타고도 가장 나중까지 불 속에서 지글거리는 것이 있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저게 뭐냐’고 물었더니 ‘심장’이라고 하더래요. 갑자기 궁금해서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아주 담담하게 ‘내 아내’라고 대답하더래요. 불구덩이 속에서 지글거리는 심장과, ‘내 아내’라고 답하는 남자의 무덤덤함…. 독자들을 아프거나 고통스러워서 외면하고 피해온 내면을 직시하는, 그런 자리까지 데려가고 싶었어요.”
1989년 9월 즈음 서울 청담동 자택에서. 이듬해 김동리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서영은의 김동리에 대한 첫 기억은 ‘사상계’에 게재된 ‘등신불’을 통해서다. 그 작품을 보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으나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은, 그런 인상을 받았다. 그 후 얼마 안 돼 첫 소설인 ‘교’를 들고 박경리를 찾아갔는데, 박경리는 뜻밖에도 김동리에게 그를 소개시켜줬다고 한다.
“박경리 선생님께서 원고를 읽어보시더니 추천감인데, 자신은 추천권이 없다며 김동리 선생에게 보이라고 쪽지를 써 주시더라고요. 그때 제가 ‘그분 별로 안 좋아하는데…’라고 답했지 뭐예요(웃음). 김동리 선생님이 글을 보더니 너무 수필적이라고 하시더군요. 그해 ‘사상계’ 신인문학상에는 강은교 씨가 당선됐고, 제가 가작 1석, 최인호 씨가 가작 2석이었어요. 그런데 시상식 때 보니 심사위원이 황순원, 김동리, 안수길 세 분이더라고요. 그래서 ‘김동리 선생 때문에 내가 당선이 안 됐구나’ 생각했죠(웃음).”
그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함께 들른 산사에서 첫날밤을 보낸 후 연인이 된다. 손소희는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젊은 연인을 찾아와 “남편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한다. 상식적으로는 그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김동리와 손소희의 관계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손소희 역시 김동리와 연애하던 시절, 첫 번째 아내에게 머리끄덩이를 붙잡힌 것은 물론 여러 차례 봉변을 당했다고 한다. 남편과 아꼈던 후배에 대한 애증, 남의 남편을 앗아가더니 똑같은 꼴을 당했다고 손가락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손소희는 숱한 고민 끝에 김동리와 서영은을 끌어안기로 한 것이다.
“만약 손소희 선생이 다른 여성들처럼 나를 비난하거나 헤어지라고 요구했다면 당장 그랬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손 선생님의 남편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컸던 거죠. 어느 날 저를 찾아와 ‘김 선생 가엾은 분이다, 잘 부탁한다’고 하시는데, 그 말씀을 듣고 나니 두 분의 관계가 제가 상상할 수 없는 경지란 생각이 들더군요.”
1 1988년 자택에서. 생전 김동리 선생은 집으로 지인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2 1990년 4월. 왼쪽은 서영은의 모친.
그에 대한 손소희의 마음과 별개로, 서영은 역시 그 상황이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김동리로부터 달아나고자 마음먹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다만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았던 건 김동리의 힘이었다.
“언젠가 한번 제가 도망갈 생각을 하는 걸 눈치채셨는지, ‘딴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 사랑은 목숨 같은 거야. 목숨을 지키려면 의지를 가져야 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끊임없이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맹세하도록 시키셨죠. 하지만 그런 맹세 때문에 선생님 곁에 끝까지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분만이 제 삶의 동기이자 필연이었고, 그분 외엔 삶의 의미를 확인할 수 없었어요. 선생님도 그러셨던 것 같고요.”
김동리 이외의 남자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을까.
“젊은 남자의 몸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던 적은 있어요.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도 선생님이 답을 주셨어요. 젊어도 노인 같은 남자가 있는가 하면 일흔이 넘은 노인도 청춘일 수 있어요. 선생님이 그러셨죠.”
작품 속 김동리의 분신인 ‘노인’은 여러 겹의 덧문으로 집 안을 꼭꼭 걸어 잠근다. 집안일을 하는 도우미 외에도 밤에 집을 지키는 작은 아줌마를 따로 들일 정도였다. 그의 행동으로 보면 집 안 어딘가에 엄청난 보물을 숨겨놓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노인이 인생의 대단한 성취로 여겼던 그 소유, 즉 김동리 선생이 평생 모았던 1천 점이 넘는 골동품들은 나중에 거의 가짜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소설이 출간되기 전, 친구 몇 명에게 글을 보이면서 노인과 김동리 선생의 모습에 대해 검증을 부탁했더니, 골동품을 지키려고 작은 아줌마를 고용한 게 가장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이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요. 그게 인생이죠. 김동리 선생이 수집했던 골동품 중 진짜는 20% 정도에 불과했어요.”
사소한 부분에 집착하고, 때로는 인색한 노인. 교과서 속 김동리에 대한 환상이 깨질 무렵 서영은이 일침을 놓는다. “하지만 선생님은 엄청나게 정의로운 분이었다”고.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6·25전쟁 때 선생님이 미처 피란을 못 가시고 손소희 선생님 댁에 숨어 있었던 적이 있대요. 당시 두 분은 각자 배우자가 따로 있을 때였는데, 손 선생님 남편이 치안감이었던 터라 그 댁은 안전할 거라 생각하고 손 선생님이 숨겨주신 거죠. 그 댁 다락방에 숨어 있는데, 손 선생님이 남편에게 어떤 사람에 대해 잘못된 이야기를 하시더래요. 김동리 선생님이 그걸 듣고는 못 참고 내려와 ‘그건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남편에게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럴 정도로 옳지 않은 일은 참지 못하는 분이셨죠.”
세상 그 어떤 것도 ‘신상’보다 좋은 것은 없다. 천하 없는 명품도 쓰다 보면 무덤덤해지는 것처럼 남녀 간의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랜다. 서영은 역시 남자의 숨겨진 여자로 살면서 느꼈던 절절한 감정이 결혼과 동시에 변질되는 걸 경험한다. 언제나 당당해 보였던 남자는 갑자기 ‘노인’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특히 두 사람을 둘러싼 주변 환경을 통해 결혼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임을 절감한다. 그는 남편이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진 후 전처의 자식들(김동리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다섯을 뒀다)로부터 폭언까지 듣는다.
“결혼은 철저하게 현실이었고 벼랑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순간도 있었죠. 선생님이 쓰러지면서 그동안 쌓아온, 문학만이 인생의 큰 대답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은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살아 계시지만 한마디 말씀도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오해가 생겨도 해명을 할 수 없고 그러니 더 힘들더군요.”
서영은은 달콤하면서도 고통스러웠던 김동리와의 사랑을 ‘미션’이라고 표현했다.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결코 알지 못했으나 오랜 시간이 흘러 돌아보니, 시련을 통해 자신을 담금질해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피가 뚝뚝 흐르는 처절한 사랑의 대가로 인생과 사람을 향한 더욱 깊은 눈을 갖게 됐다.
“돌아보면 제가 미션을 완성하도록 도와준 분들이 계세요. 손소희 선생님과 제 어머니, 두 분이 펄쩍 뛰거나 반대했더라면 아마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미션을 치르려면 그 사람 자신이 고통 속에서 뒹굴어야 하지만 인내하면서 지켜봐주는 사람의 도움이 절실하거든요. 자녀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어머니들이 담대하게 자식들이 치르고 있는 어려움을 지켜봐주면 그 끝은 반드시 훌륭한 열매와 연결될 거예요.”
극한의 고통 뒤에 만난 또 하나의 문
평생을 의지했던 김동리라는 절대자가 사라지고 난 후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신앙이었다. 그는 지인들의 권유로 오랫동안 신앙 공부를 하고 가톨릭 영세를 받았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그의 대모다. 그리고 서영은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2010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났다.
“선생님 쓰러지고 나서 어떤 것도 힘이 되지 못하고 너무나 힘들었는데 하나님이 답을 갖고 계셨어요.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하나님을 만나 증거를 받고 나니까 다른 데서 생의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산티아고 길엔 다른 아무것도 없어요. 노란 화살표만 따라가다 보면 성당에 이르는데, 그 화살표 하나하나가 다음에 오는 사람을 위해 누군가가 만든 거예요. 깊은 산속을 혼자 걸을 때 화살표의 위력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그 화살표를 따라 길을 걸으며 ‘내가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겠구나’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길고 긴 사랑의 터널을 빠져나온 그는 이제 온전히,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사람이든 다른 무엇이든. 막다른 벽에 이르면 또 다른 문이 있다는 것, 고통 속에 온몸을 던져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서영은은 이제 바위를 지고 있어도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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