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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와 ‘밀어붙이기’는 이제 그만

글·김영희 전 주세르비아 대사

입력 2013.10.31 15:00:00

해외에 몇 달간 체류하다 귀국하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사이 변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어리둥절해진다. 정부의 고위직도 임명된 지 겨우 몇 달 만에 여러 명이 바뀌어 있고, 동네 슈퍼나 식당도 주인이 바뀌거나 다른 가게로 변경돼 있다. 외국에서는 몇 년 만에 일어날 일들이 우리나라에서는 몇 달 만에 발생한다. 긍정적으로 보면 ‘역동적’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무계획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빨리빨리’가 짧은 기간에 이룩한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추진력일 수도 있다.
그런데 중진국으로 발돋움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는 몇 년 전부터 그 자리에 멈추어 있고, 사회 곳곳에서는 온갖 부조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수도 없이 터지는 대형 사고의 대부분은 후진국형 인재(人災)다. 무언가에 항상 쫓기는 것 같은 일상생활은 여유가 없고, 미래는 불안하다. 우리가 자랑하는 짧은 기간 내에 이룩한 경제 발전과 앞만 보고 달려온 사회의 한계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양적이 아닌 질적인 발전으로 변해야 한다. 우리가 선진국 문턱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다른 나라들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다. 나라 밖에선 국제적인 이해관계가 서로 얽히며 냉혹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국내에선 편 가르기 싸움에 몰두하는 모습이 답답하다. 이제는 변해야 한다.
“나는 가난해서 싼 물건을 살 수가 없어요”라고 독일 사람들은 말한다. 싼 물건을 사면 자주 사야 하기 때문이다. 집을 짓거나 도로공사를 할 때 독일에서는 답답할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나 완성되면 아주 튼튼하다. 예전에 내가 베를린에서 살았던 집은 지은 지 백 년이 넘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벽이 두꺼워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서울의 아파트는 십 년 되면 헌 집이고 보수해야 할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다. 얼마나 큰 불편이고 비용인가. 하물며 나라의 정책을 조급하게 실행했을 때 발생하는 후유증은 얼마나 클 것인가. 짧은 기간 내에 추진한 대규모 국책 사업과, 지방자치단체의 과시용 사업으로 얼마나 많은 국민의 세금이 낭비되는가. 주먹구구식과 대충대충 해결 방안은 생활의 혼란과 고통만 가중시키고 비용도 훨씬 더 든다. 탄탄한 기초 위에 탑을 쌓을 때 무너지지 않고 계속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빨리빨리는 전문가를 키우기 어렵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자녀 교육은 모든 국민의 큰 관심사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제도가 바뀐다. 지난 반세기 동안 입시제도는 18번 바뀌었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세부 변경 사항까지 포함하면 수십 차례 바뀌었다. 매번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혼란스러움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제도를 악용하는 사교육의 편승으로 고통과 부담은 오히려 계속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래를 볼 수 없는 사교육의 나라다. 이제는 제발 땜질 수준이 아닌 국민이 수긍할 수 있는 교육개혁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아이들이 학교 가는 재미가 있어야 미래가 있다.
좋은 공교육이라고 모두가 인정하는 핀란드의 교육제도는 긴 세월에 걸쳐 준비된 것이다. 총체적인 교육개혁이 필수적이라는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기까지 10년의 준비 과정을 거쳤다. 또한 정권이 교체돼도 정책은 변경되지 않고 지속되게 하기 위해 정부 차원이 아닌 의회에서 여야 합의 하에 새로운 교육제도를 채택했다. 1963년 채택된 이 제도는 그 후 10년 주기의 점검을 통해 30년 동안 개선해왔다. 이제 핀란드는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교육 모델 국가다.

결정했으니 따르라?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먼저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에서는 타협과 양보보다 ‘밀어붙이기’가 아직도 성행하고 있다. 결과가 급하다고 반대 의견에 대한 합리적인 설득과 타협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양측 간에 앙금만 쌓인다. 시간이 걸려도 해당되는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설득하며 그들의 고충을 아우를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한다면, 공권력을 투입해 밀어붙이는 것보다 더 성공적이고 비용도 더 적게 들 것이다.
1970년대 독일 쾰른대학교 교육학과에 다니고 있을 때 나는 유치원에서 한 달간 실습한 적이 있다. 3~5세 아이들이 모이면 유치원 선생님이 그날 무슨 놀이를 할 것인가 물었다. 아이들은 모두가 손을 들어 답했고, 그 놀이를 하고 싶은 이유도 함께 말했다. 어린아이들이 모두 자기 생각을 분명히 말하는 것이 신기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날 놀이학습을 결정했다. 결정 이유도 물론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자기 의견을 말하고, 합리적인 절차로 결정된 사안에 대해 따르고 존중하는 민주의식을 기르고 있었다. 어른들이나 위에서 이미 결정한 것을 따르기만 했던 우리 방식과는 너무나 달라 실습 나간 내가 오히려 아이들의 행동 양식에서 배우고 느낀 점이 많았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주요 관심사는 복지다. 특히 고령화 시대로 빠르게 변하는 현실에서 노인 복지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회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저소득층과 독거 노인 지원, 가정에서 기거하는 노인의 간병 문제, 요양 병원과 양로원 개선 등 모두가 하나같이 중요한 복지 현안이다. 복지에는 반드시 비용이 따른다. 종합적인 복지 청사진이 필요하다. 재원 마련을 위한 연구와 우선순위에 대한 포괄적인 검토가 앞서야 한다.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정책을 추진해야만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앞서간 나라들의 다양한 사례들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문제가 많은 제도 중 하나는 병원의 간병인 제도다. 최근 나는 병원에 입원한 친지를 방문하고 깜짝 놀랐다. 한 병실에 수많은 환자들과 환자 수와 맞먹는 간병인들이 함께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이곳이 병실인가 난민 시설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환자 침대 아래 놓여 있는 작은 간이 침상에서 간병인들이 24시간 같이 기거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위생적이고 비인간적인가. 밖으로 자유롭게 드나드는 간병인들이 얼마나 많은 세균을 병실에 퍼트릴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독일의 병실은 3인·2인·1인실이고, 간병은 간호요원의 업무다. 우리나라 병원에서 간병은 딸이나 며느리 등 대부분 가족이 하는데, 그들은 환자 간병에 대한 전문 지식이 거의 없다. 입원이 길어지면 간병인들의 개인 생활은 엉망이 되고 간병하다 병이 나는 경우도 다반사다. 간병을 업으로 하는 이를 부르면, 그 비용이 병원 진료비나 입원비보다 큰 경우가 많아 부담이 엄청나다. 가족 중 환자가 발생하면 온 집안이 난리다. 의료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은 이 후진적인 제도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다행히 7월 ‘보호자 없는 병원’에 대한 시범사업이 시작됐다고 한다. 전국 13개 병원에서 보호자 없는 병원 시범 운영을 2014년 7월까지 실시하고, 문제점을 보완한 후 점차적으로 확대 추진할 예정이라 한다. 현재 이 시범사업에 동참한 대부분 병원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간호요원 부족이라고 한다. 보호자 없는 병원제도가 성공하려면 간호 인력 확충과 의료 수가 및 입원료 조정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간호요원, 특히 남자 간호요원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점과 그 준비 기간을 충분히 고려하길 바란다. 전문 간병인의 도움과 더 나은 진료를 받으며 가족의 부담도 덜 수 있는 선진 제도가 꼭 도입되길 바란다. 이 모든 것이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쳐야 성공할 수 있다. 누구든 환자가 돼 병원에 입원할 수 있고, 늙으면 도움이 필요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과정이다.
김영희 전 대사는…

‘빨리빨리’와 ‘밀어붙이기’는 이제 그만


전북 전주에서 6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나 전주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시 9급 공무원으로 일하다 1972년 파독 간호보조원으로 독일로 건너갔다. 3년간 정형외과 병동에서 일한 후 공부를 계속해 쾰른대에서 교육학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쾰른대 6백 년 역사에서 최초로 ‘전공 과목을 강의한 외국인 여성’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독일 통일 직후 1991년 외무부에 특별 채용돼 주독일 한국대사관에서 1등 서기관부터 공사까지 역임한 뒤 2005년 세르비아 대사로 임명돼 대한민국 세 번째 여성 대사가 됐다. 공직에서 은퇴한 후 한국과 미국, 독일을 오가며 학술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20대, 세계무대에 너를 세워라’가 있다.

여성동아 2013년 11월 5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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