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오비히로의 전원 풍경.
홋카이도를 찾는 여행객들은 일반적으로 삿포로를 통해 다른 지역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지만 홋카이도 중앙이나 동쪽 지역을 여행하고자 한다면 아사히카와를 시발점으로 하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 도카치 지역도 홋카이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기에 아사히카와를 기점으로 시작해보았다. 도카치라는 지명은 아이누어로 우유 혹은 젖을 뜻하며, 강 입구가 마치 여성의 젖가슴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아사히카와 시내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를 타고 30여 분을 가면 깎아지른 듯한 바위에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계곡 소운쿄(層雲峽)가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도카치를 향해 끝없이 계속되는 계곡을 따라 달리면 1500m 높이의 미쿠니산(三國山)을 넘어가게 된다. 산 정상 가까이 터널을 정점으로 하는 미쿠니 고개를 통과하게 되는데, 홋카이도 내에서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다. 그러나 이 고개가 유명할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는 1km 남직한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시야를 사로잡는 정경 때문일 것이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과 어우러진 광활한 숲이 마치 녹색 카펫을 깔아놓은 듯하여 보는 이의 막힌 가슴을 뚫어주고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한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고개 정상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카페가 보인다.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에 들러 젊은 부부가 정성껏 내려준 커피를 음미하며 천상의 풍경을 감상하는 사치를 누린다. 나의 흥분 역시 진한 커피의 카페인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아득한 듯, 손에 잡힐 듯 원근감에 혼란을 일으킬 만큼 광대한 스케일의 푸른 세계와 장난감 기차 레일처럼 선명한 빨간색의 마쓰미오하시(松見大橋)가 만들어내는 비현실적인 모습에 넋을 잃었다.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한 후 미쿠니산 자락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쪼개진 대나무처럼 일직선으로 쭉 뻗은 숲속 도로 곁에 자동차 서너 대가 멈춰 서 있었다. 차를 세우고 숲속 길을 따라 100m쯤 걸어들어가자 누카비라호(糠平湖)가 빼꼼히 보인다. 누카비라는 아이누어로 ‘사람 모습을 한 바위’라는 뜻. 인공댐으로 생긴 호수지만 자연과의 조화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코에 걸친 안경처럼 생긴 일명 ‘안경다리’로도 유명하다. 고대 로마 시대 수도교(물을 공급하기 위해 세워진 교량) 형태의 다리를 먼발치에서나마 보기 위해 사람들이 이 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이 다리는 원래 철도 노선이었으나 폐선이 된 후 철거하지 않고 근대 유산으로 관리하고 있다. 수량이 늘어나는 6월경 다리는 호수에 잠기기 시작해 10월경이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가 물이 줄어드는 1월경이면 다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누카비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가 누카비라 온천 마을이다. 이 지역을 잘 아는 동료로부터 반드시 가야 할 곳이라고 추천을 받았지만 다음 일정이 촉박해 족욕만 하고 온천욕의 아쉬움은 숙소가 있는 시카리베쓰호(然別湖)에서 달래기로 했다. 무엇보다 이케다(池田) 와인 성을 들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1 미쿠니 고개에서 내려다본 전경. 2 미쿠니 고개를 넘다 보면 만나게 되는 ‘안경다리’. 마치 코에 걸린 안경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역발상의 산물, 이케다 와인
홋카이도 동부 도카치 지역에 위치한 이케다 초(池田町)는 와인 생산지로 유명하다. 기후적으로 와인용 포도 재배가 불가능한 지역이라는 통념을 깨고 와인으로 명성을 얻게 된 비결이 궁금했다.
일단 이케다 초로 가는 동안 차창 밖 풍경만으로도 ‘낙농 왕국’ 도카치에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평선 같은 목초지와 옥수수밭, 야트막한 언덕을 뒤덮은 진노랑 해바라기가 목장 건축물들의 빨간 지붕과 어우러져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의 들녘에 환호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집 앞 너른 잔디밭에서는 갈색 조랑말을 타고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열린 차창을 통해 메아리처럼 여운을 남기며 멀어져간다.
이케다 초에 들어서자 맑은 하늘은 어느새 안개비가 내리는 날씨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낮은 언덕 위 중세 서양의 성을 연상케 하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와인 성이었다. 건물 앞에는 둥글고 커다란 와인 통을 쌓아놓은 기념물이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미리 연락을 해둔 터라 아카마쓰 씨가 안내를 해주었다. 이케다 와인(브랜드명은 도카치 와인)은 이케다 초의 직영 회사로 공무원들이 다수 운영에 관계하고 있다.
1 이케다 초에 있는 와인 성. 2 낙농 왕국인 오비히로 목장의 그림 같은 건물들. 3 이케다 초에 와이너리가 생긴 유래를 소개하는 아카마쓰 씨.
아카마쓰 씨는 먼저 이곳에서 재배되는 포도 품종들을 보여주는 전시용 과수원으로 나를 안내했다. 1950년대 초 도카치 지역은 냉해 등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당시 이케다 마을 대표였던 마루타니(丸谷) 씨가 포도를 재배해 직접 와인을 제조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사실 도카치 지역은 혹한의 겨울과 건조한 기후 때문에 일반적인 재배 방법으로는 포도나무가 다 말라 죽는다. 반면 장점도 있다. 일본 내에서도 일조량이 많기로 유명하고, 포도의 성숙기인 가을에는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커서 포도의 당도가 높아져 와인을 만드는 데 필요한 포도의 당과 산의 균형이 좋아지는 것이다. 온갖 시행착오 끝에 혹독한 홋카이도의 겨울을 견뎌낼 만큼 한랭지에 적합한 포도 품종과 재배법을 찾아냈다. 즉, 포도나무는 1천 그루에 하나 정도 돌연변이가 나오는데 이를 뽑아내 ‘기요미’라는 토착 품종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어 1963년에는 일본 최초로 지자체가 직접 경영하는 와인 양조장을 세워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했다.
지난 7월에 열린 50주년 기념 행사에는 와인 생산의 최초 제안자인 마루타니 씨가 94세의 나이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기념사를 하고 세 차례나 ‘원샷’ 건배를 했다고 한다. 지역 재건을 위해 와인 생산을 시작한 마루타니 씨의 집념은 방송을 통해서도 여러 차례 소개돼 일본 내에서는 도카치 와인과 나란히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홋카이도 동부 지역을 통틀어 와인 생산을 위한 포도 과수원부터 창고, 연구실을 모두 갖춘 와이너리는 이케다 초 한 곳뿐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도카치 와인은 신맛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도카치 와인이 신맛에 집착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장기 숙성을 하는 레드 와인 맛의 깊이를 더하려면 신맛이 반드시 필요하며, 무엇보다 음식과 조화를 이루는 와인을 만드는 데 신맛이 필수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요컨대 도카치 와인과 음식의 관계는, 음식이 와인의 맛을 살려주고 와인은 다시 음식의 맛을 살려주는 데 있다.
또 포도의 품종에 따라 와인 저장용 통의 종류를 구분해서 최상의 맛을 내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아카마쓰 씨는 와인 성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와인을 비롯한 다양한 상품을 파는 매장과 와인 제조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물이 있는 1층에는 관광객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1층을 돌아본 뒤 와인 저장 통이 가득 쌓여 있는 지하로 갔다. 샴페인 제조로 시작한 와이너리답게 저장고에는 초기 샴페인부터 최근 제조한 와인까지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다. 지하에 들어서자 백열등 불빛 밑에서 와인 병을 거꾸로 했다가 똑바로 하며 불순물 혼합 여부를 검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아카마쓰 씨는 케케묵은 먼지가 쌓인 와인 저장고의 철제문을 열고 수십 년된 초기 와인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이케다 와인 성을 구경한 후 숙소가 있는 시카리베쓰로 향하는 도로변의 산야는 저녁 안개비에 젖어들고 있었다.
천상의 호수, 시카리베쓰호
시카리베쓰호를 바라보며 족욕을 즐기는 관광객들.
여행의 흥분과 여독을 푸는 데는 온천이 최고다. 이날 머문 숙소는 홋카이도의 호수 가운데 표고가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다이세쓰산(大雪山) 국립공원 안에 있는 유일한 호수인 시카리베쓰호(然別湖)주변이었다. 호텔을 향해 고지대로 올라갈수록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잿빛 공기가 코앞의 길조차도 보기 힘들게 밀려왔다. 이런 산봉우리에 호수가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자동차를 몰고 계속 올라갔다. 정상을 넘은 듯하자 이번엔 다시 내리막길이 나왔다. 구름 위로 솟아올라가는 듯한 묘한 기분과 함께 구부러진 터널을 나오자 홀연 호수가 나타났다. 어둠이 내린 뒤라 그런지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 들 정도로 호수는 현실 속의 공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여장을 풀고 뛰어들 듯 들어선 온천은 유황 냄새가 적당히 코를 자극했고, 온천수는 오일을 바른 듯 기분 좋게 피부에 달라붙었다. 여느 때보다 긴 시간을 온천에서 보내고 호텔을 나와 코앞에 있는 호숫가에 가보았다. 호텔 객실 불빛만 네온사인처럼 불규칙하게 주변에 투영시키고 있을 뿐 호수는 다음 날 아침에 보일 정경은 상상조차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한 치 앞도 보여주지 않았다.
내가 시카리베쓰호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와인을 만들려는 이케타 초의 노력과 지혜가 보여주듯 일반적으로 생활에서 거추장스럽거나 오히려 방해물로 보일 지역의 환경과 조건을 오히려 자신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줄 지혜, 즉 역발상의 좋은 예로 승화시켜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혹한기에만 설치되는 시카리베쓰의 명물 시카리베쓰코탄(然別コタン)이다. 코탄이란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의 민족어로 ‘마을’이란 의미다. 꽁꽁 언 호수 위와 호숫가에 눈과 얼음으로 만든 이글루가 들어서 혹한기에만 존재하는 마을이 생기는 것이다. 코탄이 형성되면 거대한 이글루 안에 카페와 아이스 바가 설치되고, 콘서트 홀에서는 라이브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무엇보다 세계 유일의 얼음 위 노천 온천을 무료로 즐기는 환상적인 체험이 마련돼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얼음 호수 위에서 숙박할 수 있는 아이스 로지 및 결혼식장도 마련된다. 내가 이번 겨울을 기다리는 것은 이런 체험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여행은 진짜 겨울을 기다리며 사전 답사 격으로 진행됐다. 도대체 어떤 호수이기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막 동이 트자마자 호숫가로 달려나갔다. 1km를 훌쩍 넘는 산 정상이 야트막한 언덕쯤으로 보일 만큼 호수는 800m가 넘는 높은 곳에 정확한 생성 내력도 알려주지 않은 채 자리 잡고 있다. 오전 6시가 되기 전임에도 호숫가에 마련된 무료 족욕탕에 발을 담그고 새벽 호수를 바라보는 관광객들이 몇 팀인가 눈에 띄었다. 새벽 호수는 머리에 닿을 듯한 구름이 일체의 다른 세상 구경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했고, 고요와 적막 속에 오직 이름 모를 새의 노랫소리만 잔잔한 여운을 남겼다.
이번 여행을 통해, 비에이나 후라노가 자연에 인공을 가미한 성형 미인 같은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라면 도카치 지역은 자연과 인간의 삶이 연출해내는 자연 미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중요한 것은 성형 미인이든 자연 미인이든, 미인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재차 돌아보게 한다는 사실이다.
홋카이도 닛싱 역의 명예역장 황경성은…
도쿄대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나요로시립대학 보건복지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홋카이도의 문화 예술 진흥에 힘을 쏟고 있다. 2012년 1월부터 ‘여성동아’ 지면에 홋카이도 구석구석을 소개하는 ‘Life in Hokkaido’를 연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홋카이도의 관광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아 2013년 4월 홋카이도관광대사로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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