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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Story of CEO

‘아딸’ 이경수 이현경 부부

떡볶이로 1천6백억 매출, 대박 신화 뒷얘기

글 | 김명희 기자 사진 | 박해윤 홍중식 기자

입력 2012.01.17 15:52:00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역에서 내려 동네로 들어가는 입구마다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분식 브랜드 ‘아딸’. 현재 8백60개에 이르는 이 프랜차이즈가 서울 성동구 금호동 8평 남짓한 가게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빈손에서 시작해 아딸을 연매출 1천억원 이상의 중소기업으로 키운 이경수 대표 부부의 성공 스토리.
‘아딸’ 이경수 이현경 부부

작은 분식가게를 10년 만에 프랜차이즈로 키워낸 이경수·이현경 부부.



요즘처럼 쌀쌀한 날씨, 주머니가 가벼워도 뜨거운 어묵 국물에 떡볶이 한 접시면 금세 허기가 가시고 얼었던 마음이 녹는다. 부담 없는 음식이라고 해서 얕볼 일은 아니다. 분식 프랜차이즈 ‘아딸’을 거느린 오투스페이스의 2010년 매출은 1천2백억, 2011년에는 1천6백억원을 올렸다.
전국에 8백60개 매장이 있는 ‘아딸’을 이끄는 주인공은 이경수 대표(42)와 이현경 이사(40) 부부다. 아딸은 원래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의 준말로, 이 대표 부부가 2000년 서울 금호동에 8평짜리 가게를 열 때 경기도 문산에서 오랫동안 튀김 장사를 하던 장인을 모셔와 함께 일한 데서 비롯됐다. 처음 상호는 ‘자유시간’. 간판을 새로 달 여력조차 없어 이전 가게 간판인 ‘자유시간 호프’에서 ‘호프’ 자를 지우고 그 아래 ‘분식’이라는 이름을 작게 써 넣었다.

꼼꼼하고 추진력 있는 남편, 부지런한 아내… 사업 궁합이 잘 맞는 부부
이현경 이사에게 성공 비결을 묻자 그는 “부부의 사업 궁합”을 첫 번째로 꼽았다. 남편에게 강의 요청이 쇄도하는데 사실 성공하고 싶은 여성이라면 남편의 강의보다 자신에게 ‘좋은 남편 찾는 법’을 듣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며 웃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92년 수영장에서였다. 이 대표는 지인이 운영하는 수영장의 월급 사장이었고, 이 이사는 갓 입사한 직원이었다. 회원은 7백 명 남짓, 겨우 적자를 면하는 수준이었다. 이 대표는 회원 관리를 체계적으로 하면 회원 수를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당시 갓 출시된 386 컴퓨터를 구해 회원 정보를 입력했다. 직원들 대부분이 가욋일로 여기고 데이터베이스 입력 작업을 피할 때 이현경 이사만은 달랐다. 작업의 취지를 이해하고 다른 직원들이 퇴근한 후에도 남아서 이 대표와 함께 작업을 했다.
“누가 밤을 새우자고 한 것도 아닌데 일하다가 고개를 들어보면 훤하게 동이 터 있더라고요. 이렇게 정리한 정보를 바탕으로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등 서비스를 제공하자 회원 수가 순식간에 1천5백 명으로 늘었어요. 신기할 정도였죠.”(이현경)

▼ 서로 첫인상은 어땠나요.
“첫눈에 반했어요. 함께 일한 지 두 달 만에 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었죠. 결혼한 지 18년이 됐는데 지금도 아내를 보면 가슴이 뛰어요.”(이경수)
“솔직히 외모는 제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얼굴도 형편없고 뿔테 안경에 양복바지까지, 감각도 없어 보였거든요. 그런데 함께 일을 하면 즐거웠어요. 기획력과 추진력이 뛰어나고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알고, 믿음도 가고, 가능성을 보고 제가 잡은 거죠(웃음).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양념통닭 프랜차이즈가 나왔어요. 그걸 보면서 아버지 튀김집도 프랜차이즈가 될 수 없을까란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막연하게 내 남편은 그런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이현경)
당시 이 대표는 우석대 국문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하지만 공부보다 시장에 나가서 물건을 팔거나 다른 사람을 도와 사업을 하는 날이 더 많았다. 아버지가 교회 목사였는데, 장사 수완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교인 가운데 장사가 잘 안 되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 수영장 일을 하기 전에는 어떤 장사를 해봤나요.
“과일 장사, 배추 장사, 중국집도 운영해봤고, 건어물도 팔아봤죠. 그런데 어떤 장사든 원리는 다 똑같아요. 좋은 물건을 남들보다 싼 가격에 파는 거죠. 그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니까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팔아야 하고요.”



▼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데요.
“그렇죠?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요. 제가 건어물 장사를 할 때 가락동 도매 시장에 가서 ‘무조건 가장 좋은 물건 주세요’ 했더니 상인들이 어디에 쓸 거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소포장을 해서 길거리에서 팔려 한다’고 했더니 저더러 ‘뭘 모른다’며, ‘장사란 적당한 물건을 가져다가 적당한 가격에 팔아 이익을 남기는 거고, 더군다나 길거리에서 파는 것은 그렇게 좋은 것을 가져갈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도매상의 만류에도 저는 좋은 물건을 가져다 싸게 팔았더니, 고객들이 먼저 알아주더군요. 다른 가게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저희가 가는 날만 기다리는 거예요. 수박 장사를 할 때는 ‘맛없으면 다시 오세요. 무거운 수박, 집에 두고 그냥 오세요. 하나 더 드립니다’라고 외쳤어요. 그래도 기어이 수박 반 통을 들고 와서 바꿔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소리 지르죠. ‘그냥 오라는데 이걸 왜 들고 왔어요?’ 그러면서 더 큰 걸로 한 통 줍니다. 구경하던 사람들 얼굴에 감동이 지나가요.”

▼ 주변 상인들 원성도 많이 들었겠어요.
“처음에는 항의를 많이 받았어요. 그러면 사촌형이 완도 사람이다, 우리 집이 과수원을 한다고 둘러대곤 했어요. 그러면 그분들도 어쩌지 못해요(웃음). 그리고 항의하던 분들도 하나둘씩 좋은 물건을 싸게 팔게 됐고, 결과적으로는 상권 전체가 경쟁력이 높아져 매출이 올랐어요.”

분식집 하면서 맛은 호텔 레스토랑, 서비스는 항공사 수준을 목표로

‘아딸’ 이경수 이현경 부부


이경수 대표는 지인들을 도와 틈틈이 사업을 했지만 한 번도 그것이 자신의 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결혼 후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우연찮게 다시 사업과 인연을 맺게 됐다. 아버지의 교회가 송파구 방이동에서 금호동 아파트 상가 지하로 이사를 했는데 당초 50% 대출이 가능하다는 상가 측 설명과는 달리 은행은 가난한 개척 교회에 대출해주는 것을 꺼렸다. 자금난을 해결하려고 어쩔 수 없이 이 대표 부부가 나섰다. 떡볶이 가게를 열자고 한 건 아내였다. 떡볶이라면 누구보다 맛있게 만들 자신이 있었고, 여기에 남편의 사업 수완이 보태진다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장인 이영석씨(2004년 작고)도 문산에서 금호동까지 매일 4시간씩 왕복하며 딸과 사위를 도왔다. 이렇게 문을 연 분식집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인근에서 깔끔하고 맛있는 집으로 소문이 났고,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한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날개를 달았다.

▼ 떡볶이 맛이 거기서 거기일 텐데, 다른 가게와 차별화되는 부분이 있었나요.
“가게를 내면서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이 저울과 계량컵이었어요. 맛을 업그레이드하려면 여러 가지 시도를 해야 하고, 정점의 맛을 만들어냈을 때는 그걸 유지하기 위해 레시피를 정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남편이 저를 설득했죠.”(이현경)
“저는 요즘도 음식점을 하시는 분들이 ‘어떻게 하면 장사가 잘될까’ 물어오면 먼저 저울부터 사라고 말씀드려요. 음식 장사를 하는 분들은 손맛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주인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하겠다는 이야기와 다름없어요. 고객은 그 음식점 맛이 그리워서 오는 건데 그 맛이 수시로 바뀌면 안 되죠.”(이경수)

▼ 그 외에 다른 비결이 있다면요.
“밖에서 튀김을 하는 장인과 저는 호텔 조리사 복장을 하고 아내는 스튜어디스 차림으로 손님을 맞았어요. 비록 작은 분식집이지만 좋은 재료를 갖고 위생적으로 조리하고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거죠. 그러면서 손님들 사이에서 저 분식집은 맛도 있고, 복장도 신기하고, 친절하다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어요. 맛을 업그레이드하니까 성인 고객이 모여들고, 위생적으로 조리하니까 아예 저희 집에 돈을 맡기고 아이들 간식을 부탁하는 부모들도 많아졌어요.”

▼ 아무리 그래도 작은 분식집이 금방 프랜차이즈가 되지는 못했을 텐데.
“그렇게 손님이 점차 늘더니 2002년 방송에 소개된 후로는 가게 문이 미어터지고, 전국 각지에서 문의전화가 쇄도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어요. 오죽하면 전화기 코드를 뽑아놓고 영업을 했겠어요. 그러다 2002년 서대문구 신촌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고모님 요청으로, 그곳에 1호점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를 시작하게 됐죠. 그때 이름도 ‘아딸’로 바꿨어요.”(이현경)

1호점 대성공 후, 2호점은 쪽박 교만을 반성하고 진심을 구하다

‘아딸’ 이경수 이현경 부부


신촌 가게는 60평 정도로 규모가 컸지만 반지하인 데다 대학가와 떨어져 있어 입지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자유시간’의 성공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이 대표는 젊은 사람들 취향에 맞춰 인테리어에도 공을 들이고, 카운터도 패스트푸드점처럼 홀 안쪽에 두고 손님들이 메뉴를 골라 계산을 하면 바로 주방으로 주문이 들어가는 식으로 바꿨다. 이웃에서 오랫동안 부동산을 하던 사람이 지나가다 이것을 보고 끌끌 혀를 차며 ‘떡볶이집을 이렇게 크게 내면 어떡하느냐, 두고 보라, 석 달 안에 망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아딸 1호점은 오픈 첫날부터 손님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신촌 일대에서 유명한 분식집이 됐다. 파격적인 스타일이 오히려 주 고객층인 여대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한 번 맛을 본 사람들은 계속 이곳을 찾았다.
여기에 고무된 이 대표 부부는 이번에는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가게를 열었다. 이번에는 2층이었다. 반지하에서도 성공했으니 2층에서도 너끈히 성공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밥·국수·라면까지 메뉴도 다양화했다.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조건인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금호동이나 신촌 가게처럼 손님이 모이지 않았다. 이 대표는 장사가 안 되자 배달을 시작했다. 한겨울에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나갔다가 미끄러져 사고가 난 적도 있다.

▼ 등촌동 가게는 왜 실패했나요.
“자신감 때문에 앞뒤 고민 안 하고 매장을 열었고, 메뉴가 많았던 게 치명적이었어요. 그때 사람이 성공하면 교만해져서 판단을 정확하게 하지 못하게 된다는 걸 알았어요. 그러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죠. 2층은 안 된다, 메뉴는 떡볶이와 튀김 위주다, 배달은 안 된다는 거죠. 그러고 보니 저희가 처음 가게를 열었던 금호동 때가 옳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5년 만에 빈털터리가 돼서 초심으로 돌아갔습니다.”

▼ 그때가 사업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였겠군요.
“그렇죠. 아내가 카드 결제일이 되면 저 몰래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나요. 저희는 부엌에 딸린 1평짜리 방에서 겨우 잠만 잤고, 아이들은 계단 아래를 스티로폼으로 막아 그 공간에서 생활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불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아이들도 아무렇지 않게 친구들을 데려와 계단 밑에서 소꿉놀이하고 놀고….”

▼ 아무리 행복해도 계속 돈을 까먹고 있을 수는 없었을 텐데.
“계속 적자가 나니까 ‘목회를 하라는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어 2005년 5월 사업을 접었어요. 그런데 얼마 후 작은 가게를 갖고 있는 분이 ‘여러 가지 장사를 해 봤는데 다 안 됐다, 마지막으로 떡볶이 가게를 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느냐’고 전화를 걸어오셨어요. 그래서 직접 찾아가 봤더니 딱 저희가 처음 분식집을 했던 금호동 가게 규모더라고요. 그래서 아내와 제가 인테리어부터 음식 조리법까지 일일이 챙기며 마치 우리 가게를 여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 도와드렸어요. 그랬더니 그곳이 대박이 났고, 그러면서 소문이 나기 시작해 점포가 두 개에서 네 개로, 여덟 개로 순식간에 늘어나더니 지금에 이르게 됐어요.”

▼ 가장 큰 성공 비결을 꼽자면.
“고객을 진심으로 대하는 거예요. 좋은 재료를 써서 양심적으로 장사하고 고객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죠. 예를 들어 순대를 사간 손님이 냄새가 난다고 다시 가져왔는데 맡아봤더니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그래도 고객이 냄새가 난다면 나는 거예요. 돈으로 달라고 하면 돈을 내드리고, 다른 걸로 바꿔달라고 하면 바꿔드리면 돼요. 사람마다 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그걸 인정하면 되죠. 어떻게 보면 사업은 도 닦는 것과 같아요. 고객이 항의하거나 혹은 정당한 것을 요구할 때 흥분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거죠.”

▼ 진심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그땐 어떻게 하나요.
“저는 지극히 도덕적인 것이 성공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세계 경제를 쥐고 흔드는 유대인을 봐도, 아이들에게 지식보다 사람됨을 먼저 가르치지 않습니까. 설령 내 진심을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도덕적으로 살았다’는 자부심은 남을 겁니다. 매일 기름을 바꾸는 튀김집 사장에게 아들이 묻습니다. ‘아빠, 우리 집은 장사도 안 되는데 왜 만날 멀쩡한 기름을 내려요?’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오래된 기름은 건강에 나쁜 거란다. 우리가 돈을 많이 벌자고 손님에게 해로운 음식을 먹일 순 없잖니.’ 아이가 그걸 보고 배웠다면 부모 세대에서 부자가 되지는 못했더라도 그 아이는 나중에 꼭 훌륭한 사람이 돼서 사회에 도움 되는 일을 할 거라고 믿습니다.”

여성동아 2012년 1월 5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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