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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첫사랑 유치원 친구 이경희

“남준이 일은 70년 전인데도 생생해요”

글 | 김명희 기자 사진 | 박정우 프리랜서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11.11.16 16:31:00

희한하게도 유년 시절의 기억은 다른 것들보다 또렷하다.
오염되지 않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순수한 마음으로 관계를 맺기 때문일 터.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이 17세에 조국을 떠나 부초처럼 세상을 떠돌면서도
한국적인 정서를 잃지 않았던 건 그런 어린 시절 덕분이었다.
백남준의 유년 시절은 유치원 친구이자 첫사랑인 이경희와 동의어다.
그가 들려준 백남준과의 70년 인연.
백남준의 첫사랑 유치원 친구 이경희


유명한 예술가에게는 흔히 로맨스가 따라붙는다. 슈만과 클라라,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 등의 운명적인 사랑은 작품의 모티프가 됐으며 예술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고 작가 특유의 아우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세계적인 아티스트 고 백남준에게는 이경희(79)라는 우정 이상의 감정을 나눈 친구가 있다.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백남준은 한국을 떠난 지 35년 만에 고국 땅을 밟는 순간 기자들에게 “나의 유치원 친구, 이경희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있던 백남준에게 이경희는 고향처럼 그리운 존재였던 것이다. 당시 이경희씨는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스무고개’ ‘재치문답’ 등에 출연하며 라디오 스타로 자리매김하던 시절. 두 사람은 곧 재회했고 이후 2005년 백남준이 별세할 때까지 20년 동안 우정을 이어갔다.
이씨가 최근 여섯 살 동갑내기로 만난 백남준과의 어릴 적 추억과 재회 이후 나눈 우정을 담은 수필집 ‘백남준, 나의 유치원 친구’(디자인하우스)를 펴냈다. 10월 중순, 서울의 한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책을 내놓고 몸에서 뭔가 빠져나간 듯 허전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성화가 번거롭기도 해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다녀왔다”는 그는 세계적인 예술가의 첫사랑답게 곱고 정정했다. 화사한 연두색 재킷과 늘어뜨린 스카프가 멋스러웠다. 70년 전의 기억을 끌어올려낸 그에게 “총기가 대단하다”고 하자 이씨는 “내가 가장 부족한 게 기억력이다. 정작 기억해야 할 것은 뒤돌아서면 잊는데, 남준이와 있었던 일은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며 웃었다.

백남준의 첫사랑 유치원 친구 이경희

1 두 사람이 함께 다녔던 애국유치원 졸업사진. 뒷줄 오른쪽 여덟 번째가 백남준, 가운뎃줄 오른쪽 일곱 번째가 이경희씨다. 2 1985년 백남준과 만났을 때. 백남준은 사진 찍을 때 항상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했다고. 3 1984년 백남준이 35년 만에 한국을 찾았을 때. 오른쪽은 백남준의 아내 구보타 시게코씨. 4 백남준은 이경희씨가 한복 입은 모습을 좋아했다고 한다.



1막>> 캐딜락 타고 다니던 왕자와 공주
두 사람은 지금의 서울 명동성당 건너편, 애국유치원 동기로 처음 만났다. 초등학교 입학도 어렵던 시절, 애국유치원은 장안의 내로라하는 집안 아이들이 다니던 고급 유치원이었다. 백남준은 방직업으로 거부가 된 백낙승씨의 3남2녀 중 막내로, 서울에서 한두 대밖에 없었다는 캐딜락 자동차를 타고 다니던, 그야말로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반면 이씨 집안은 아버지가 일본에서 유학하고 경성전기에 다니긴 했지만 백남준 집안과 비할 바는 못 되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애국유치원에 다녔던 건 순전히 무남독녀 외동딸을 향한 어머니의 교육열 덕분이었다고.
이씨가 기억하는 백남준은 말이 없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였다. 백남준의 어머니와 이씨 어머니가 친해지면서 이경희씨는 종종 어머니 손에 이끌려 큰 대문집이라고 불리던 서울 창신동 백남준의 집에 놀러 가곤 했다. 이씨가 가면 외사촌들과 피구 같은 놀이를 하던 백남준은 공을 슬그머니 내려놓고는 자기 방으로 가서 일본 출판사 고단샤에서 나온 동화책을 방 안 가득 펼쳐놓고는 읽는 척했다고 한다. 이씨가 동화책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던 백남준은 좋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이다. 두 사람은 이씨 어머니가 내주는 귤이나 약과 같은 간식을 함께 먹고 매일 아침 캐딜락 자동차로 함께 등교하고, 유치원을 마치면 다시 전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우정을 쌓았다.
이씨의 수필 ‘왕자와 공주’에는 그런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말을 잘 하지 않는 남준이를 좋아했던 것 같다. 늘 좋은 옷을 깨끗이 입고 머리는 짧게 상고머리를 한 남준이를 속으로 ‘고단샤노에혼(고단샤의 그림책)’에 나오는 왕자 같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거기 나오는 어느 공주가 되어보곤 했던 것이다. 왕자와 공주는 서로 말없이 좋아했다.’

그는 백남준의 예술가적 자질에 관해서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백남준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사업가였던 반면 어머니는 정이 많고 낭만적이었다고. 봄에는 집 뒷동산에 전등을 달아놓고 밤 벚꽃놀이를 즐겼으며 아이들에게도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각자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어린 백남준은 책 읽기를 좋아해 유치원, 초등학교 시절 이미 세계 각국의 동화는 물론 중·고등학생들이 읽는 고전까지 섭렵했다. 그는 “남준과 이야기하다 보면 재치와 인문학적, 과학적 지식에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백남준은 천재이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 방대한 독서량이 그의 예술 세계를 더욱 깊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남준 집안에서는 그런 이씨를 ‘남준이 색시’라고 불렀다. 이씨는 친한 여자 친구를 부르는 별칭인 줄 알았으나, 부모들끼리는 이미 “저희들끼리 좋아하니 결혼을 시키지요”라며 결혼 약속까지 했다. 이경희씨는 이런 사연을 한참 후 백남준이 일본으로 떠나고 자신이 결혼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고 한다. 두 사람은 유치원 졸업 후 각각 다른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만남이 뜸해졌고, 이후 백남준은 일본 유학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으로 떠돌았다.



백남준의 첫사랑 유치원 친구 이경희

백남준이 이경희씨에게 보낸 연하장. 카드 한 장에도 개성이 넘친다.



2막>> 짧은 만남, 긴 이별 견우와 직녀
비디오 아티스트로 활동하던 백남준은 1984년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뒤 금의환향했고 그토록 그리던 이씨와의 만남도 성사됐다. 하지만 백남준 곁에는 예술적 동지이자 든든한 내조를 펼치는 아내 구보타 시게코씨가 있었다. 물론 이씨도 결혼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재회하기 전 전화 통화를 했다. 그때 백남준이 이씨에게 가장 먼저 물었던 것은 이마의 상처. 어릴 때 두 사람이 숨바꼭질을 하다가 이씨가 양철 지붕에 찔려 이마에 피가 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일이 자기 탓이라고 여겼던 백남준은 그 일을 44년 동안이나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남준이가 ‘경희, 이마 다친 것 어떻게 되었지? 그때 내가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 우리가 함께 탔던 전차 생각나? 땡땡거리는 소리도 좋았고, 참 재미있었는데…’라고 하는데 마치 유년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어요.”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씨는 자신의 이마에 난 상처를 보여준다. 외모에 민감한 젊은 시절에도 그는 백남준과의 추억이 사라지는 것 같아 이마의 상처가 희미해지는 게 두려웠다고 한다. 이씨는 그 후에도 두 번 더 이마를 다쳤고, 그때마다 신기하게 백남준과 관련된 일이 생겼다며 웃는다.
전화 재회 뒤 이씨와 직접 만난 백남준의 첫마디는 “C’est la vie!(인생이란 그런 거지!) 우린 너무 늦게 만났어”였다. “나는 섹스를 못해. 당뇨병이라서”라는 말도 했다. 첫사랑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후 백남준은 한국에 올 때마다 이씨를 자신의 숙소로 초대해 함께 아침 식사를 했고 외국에서 전시가 열릴 때도 잊지 않고 초청장을 보냈다. 시게코씨는 이런 이씨를 ‘교 히메(서울 아가씨)’라고 부르며 은근히 경계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이씨가 백남준의 둘째 누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았을 때였다. 이씨는 백남준 누나가 시키는 대로 생선살도 발라주고, 다른 음식도 골고루 백남준 앞에 놓아주었다. 처음엔 “남편에게 유치원 친구라고 이야기 많이 들었다”며 아무렇지 않게 대하던 시게코씨는 식사가 끝날 무렵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고 한다. “백남준이 누구 때문에 유명해진 줄 알아요? 내가 유명하게 만든 거예요. 왜 한국에서는 백남준에게만 관심을 가져요?”라고 흥분해서 고함을 치더니 혼자 가겠다고 일어섰다. 그러자 말수가 적은 백남준이 평소와 달리 시게코씨에게 “혼자 가!”라며 마주 큰 소리로 외쳤다. 당황한 이씨가 시게코씨를 껴안으며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라고 사과하고 나서야 사태는 진정됐다.

3막>> 가슴 아팠던 마지막 순간 그리고 영원한 이별
이경희씨가 추억하는 백남준과의 관계에서는 때로는 끈끈한 우정이, 때로는 이뤄지지 못한 아련한 사랑이 읽힌다. 시게코씨 못지않게 그의 남편이 백남준과 이씨의 관계를 어떻게 봤을지 궁금한 대목. 이씨의 남편은 한화 부회장을 지낸 고(故) 오수인씨다. 오씨는 백남준이 공항에서 이경희씨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듣고는 첫마디에 “미친놈”이라는 말을 내뱉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백남준과 이씨의 관계를 존중해줬다.
“남편은 ‘왕자와 공주’라는 글을 통해 우리 사이를 알고 있었고 남준이를 유치원 친구 이상의 성장한 남자로 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친구 사이에 응당 그럴 수 있겠거니 생각을 했겠죠. 자존심이 강한 양반이라 다소 못마땅했던 점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또 남편과 저는 배 속 친구(어머니들끼리 친구)였기 때문에 따지고 들면 남편이 한 수 위이기도 하고(웃음).”
이씨의 남편과 달리 시게코씨는 끝내 두 사람 사이를 불편해했다. 백남준은 그런 아내를 배려해 아내가 듣고 있을 때는 이씨와의 전화 통화에서 호통을 치기도 했고 절교 선언을 한 적도 있다. 세상을 떠나기 1년여 전인 2004년, 이씨가 그가 사는 미국 마이애미로 찾아갔을 때는 “당신을 보면 남준이 흥분해 뇌혈관이 파열될 수 있다”며 시게코씨가 서둘러 백남준의 휠체어를 밀고 가버리는 바람에 짧은 만남으로 끝내야 했다. 그는 그때 절규하는 듯했던 백남준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당시 백남준은 96년부터 앓던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했고 건강이 극도로 좋지 않았다. 자신의 몸으로는 갈 수 없는 ‘고향’이 그에게 와줬으니 그 감정이 어땠을까. 더는 바랄 게 아무것도 없었던 백남준은 1년 후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백남준 49재에 맞춰 한국을 찾은 시게코씨는 남편이 이씨가 보내준 리넨으로 만든 수의를 입고 세상을 떠났노라고 일러주었다.
“언젠가 여름에 뉴욕이 더울 것 같아 남준과 시게코에게 모시로 홑이불을 만들어 보냈어요. 그런데 시게코가 이불로 쓰기에는 아깝다며 안쪽에는 리넨을 바깥쪽에는 실크를 대 마고자를 만들어줬더니 그렇게 좋아했다고 하더군요. 시게코는 제가 보낸 천이라서 남준이 좋아했다고 하지만, 시게코가 편하게 디자인을 잘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남편이 평소 좋아하던 옷이라고 저세상을 떠날 때도 입혀 보낸 걸 보면 남준에 대한 그의 사랑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이날 시게코씨는 이씨에게 그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여러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한국전쟁만 아니었으면 백남준은 이씨와 결혼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백남준이 누구에게나 친절했기 때문에 그와 결혼했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백남준은 너무 착해서 자신처럼 강한 여자가 곁에 필요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돌아보면 남준은 참 행복한 사람이었어요. 시게코의 탱크 같은 사랑을 받으며 하고 싶은 예술을 맘껏 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씨는 백남준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만약 그가 백남준과 결혼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는 이 질문에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우리는 (결혼은 운명적으로) 안 되게 돼 있었다”라고 말했다.
“남준이네는 대가족이었기 때문에 남준 어머니는 늘 누군가의 상을 치르느라 소복 차림이었어요. 남준이는 제가 흰색 모시 한복 입는 걸 참 좋아해서 항상 자신의 행사 때도 한복을 입고 오라고 조르곤 했죠. 그런 걸 보면 저는 남준이에게 엄마의 품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지금 남준이 곁에 있다면 꼭 한번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어요.”
이경희가 말하는 진짜 백남준
백남준의 첫사랑 유치원 친구 이경희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은 끝까지 도와주려 애썼던 사람
백남준은 1995년 호암상(예술 부문)을 받았다. 이씨가 수상 리셉션에서 축하 인사를 건네자 백남준은 대뜸 “이제 내가 죽기를 바라도 돼”라고 말했다고 한다. 권위 있는 호암상을 받았으니 그림 값이 올라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작품을 갖고 있는 소장자들에게 미안하지 않게 돼 홀가분하다는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명예보다 소장자들에게 더 마음을 쓴 것 같다. 이씨는 백남준이 자신과 한번 인연을 맺거나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도움을 주려 노력했다고 한다. 호텔도 전시장도 마찬가지였다고. 한 번 이용했던 호텔과 전시장은 웬만해서는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화낼 때는 불같은 성격
백남준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온순한 성격이지만 한번 화를 내면 무서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화를 낼 때는 자신이 머릿속으로 구상했던 일이 현실에서 잘 진행되지 않을 때. 1980년대 후반 이경희씨에게도 크게 한 번 화를 낸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이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때라 이씨는 동베를린 사건에 연류됐던 윤이상과 공연을 하면 백남준에게도 괜한 불똥이 튈까 싶어 전화로 만류했다. 그러자 백남준이 버럭 화를 내며 수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나중에 백남준은 윤이상과의 공연을 만류했던 이들을 향해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와 상상력이다. 이데올로기, 제도,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무한한 상상력을 지닐 수 있다”고 말했다.
타인의 실수에 관대했던 대인배
한번은 한 무용가가 백남준과 부산에서 퍼포먼스를 한다고 허위 광고를 잡지에 게재한 적이 있다. 백남준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평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오독할 때도, 신문에 자신과 관련된 잘못된 기사가 나가도 한 번도 ‘왜 이렇게 썼느냐’며 항의한 적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시간과 기회를 주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게 했다는 것. 그는 “남준이는 쫓아다니며 잘못된 이야기를 고쳐달라고 할 만큼 시간 여유도 없었고, 그렇게 쩨쩨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예술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지나칠 정도로 너그러운 성격을 탓하는 그에게 백남준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인간은 잘못을 저지르는 자유를 가질 수 있어야 해.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


여성동아 2011년 11월 5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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