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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삶은 계속된다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 그 후 18년, 김영희 인생 르네상스 맞다

글 김명희 기자 사진 이기욱 기자

2010. 09. 15

나이가 드는 건 서글픈 일이다. 불꽃같은 젊은 날을 보냈다면, 허무함이 더할지도 모른다. 두 번 결혼해 다섯 아이를 낳아 키우며 미술가로, 작가로 큰 성공을 거둔 닥종이 예술가 김영희씨는 조금 다르다고 말한다. 아이와 남편을 모두 떠나보내고 나서야 자신의 진짜 가치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 그 후 18년, 김영희 인생 르네상스 맞다

봄이 오는 소리



볼이 발그레한 아이가 입을 오므려 ‘후’ 하고 꽃을 분다. 통통한 볼, 장난기 가득한 눈, 통통하고 짧은 다리, 어디 한 곳 예쁜 구석이라곤 없는데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웃음이 난다. 한지로 인형을 만들어 온 닥종이 예술가 김영희씨(66)가 2년 만에 귀국, 지난 8월 개인전을 열었다. 단발머리에 벨트 셔츠와 레깅스, 웨지힐 구두를 신은 작가는 나이가 가늠되지 않았다. 사인을 해 달라고 몰려드는 팬들에게 “남자가 나 좋다고 이렇게 따라다니면 얼마나 좋아”하면서 농담도 건넨다. 작품처럼 작가도 정감이 넘친다.
김씨는 다섯 살 때부터 한지를 물들이고 접고 붙이며 놀았다. 그 너머엔 비 그친 여름 날, 눅눅해진 문종이를 떼어 내고 새로 붙이며 국화꽃을 따오라 해서 장식하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자리 잡고 있다. 작가는 그 뒤로 하얀 것만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었노라고 고백한다. 결혼 후, 아이 셋을 키우며 시골학교 미술교사로 그림 같이 살던 그는 서른넷에 남편과 사별했다. 하나의 큰 우주를 떠나보낸 후 닥종이 예술이라는 또 다른 우주와 만났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돼 열네 살 연하의 독일 남자 토마스와 사랑에 빠졌고 그를 따라 81년 독일로 건너가 그곳에서 아이 둘을 더 낳았다.

욕망으로 치닫는 한국 사람들, 마음의 여유 가졌으면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 그 후 18년, 김영희 인생 르네상스 맞다


그는 2~3년마다 한번씩 숙제 검사를 하듯 성실하게 새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예술가의 아집으로, 혹은 나이를 핑계로 안주할 수도 있으련만, 그의 작품 세계는 나날이 깊고 새로워진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자신보다 한국의 변화가 더 놀랍다.
“한국 여성들 얼굴에서 빛이 나요. 그게 경제권이 있어서 그래요. 독일에선 남자들이 경제권을 갖고 있는데 워낙 정확한 사람들이라 가계부 검사도 꼼꼼하게 해요. 맞벌이라면 몰라도 전업주부는 숨이 턱턱 막힐 노릇이죠. 그런데 한편으로 (한국 여성들은) 너무 말랐어요. 아니 거리에 볼륨 있는 여성이 단 한 명도 안 지나가는 나라가 어디 있어요?(웃음) 결혼하고 출산해야 할 젊은 여성들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른 게, 뭔가 크게 잘못돼 가는 것 같아요.”
그는 뮌헨에서도 차를 타고 50분 정도 들어가는 시골의 단독 주택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자동차도 이메일도 없이 작품 활동을 한다. 작품 활동 외의 유일한 취미는 넝쿨장미 키우기. 아이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장미도 잘 키운다고.
“내 일만 하니까 이메일도 휴대전화도 필요 없어요. 우리 아이들이나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집으로 전화할 것이고, 이메일할 시간에는 소설을 쓰겠어요. 그런데 한 번은 오페라 공연을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불러야 하는데 공중전화를 찾지 못해 큰 불편을 겪은 적이 있어요. 딸이 ‘그것 보라’며 휴대전화를 마련해 줬어요. 이제는 너무 낡아 액정이 금이 갔지만 택시 부르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어 그냥 쓰고 있지요(웃음).”
이처럼 느린 삶을 사는 그에게 한국은 독일보다 더 삭막하다. 곳곳에 ‘공사중’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고, 예전에 있던 거리는 흔적을 더듬기도 숨이 가쁘다. 마음의 빈 공간은 나날이 높아지는 건물 높이에 반비례 하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고.
“독일에서는 건물 부수고 새로 짓는 게 굉장히 까다로워요. ‘카이저(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독일 황제)가 와도 안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죠. 그런데 한국은 전통이라고 할 만한 게 과연 얼마나 남았나 싶을 정도로 변화가 빨라요. ‘더 빨리 더 높이’는 사람들 성격도 악착스럽게 만드는 것 같아요. 어제 길을 가다 들었는데 엄마가 다섯 살쯤 됐을까 한 아이에게 ‘엄마가 커서 뭐가 되라고 했지?’라고 묻고는 아이가 머뭇머뭇하자 ‘의사 되라고 했잖아’라면서 막 다그치더라고요. 아이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어쩌면 그럴 수 있나 싶더라고요.”

믿음으로 키운 아이들, 이젠 모두 어엿하게 성장해 엄마 품 떠나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 그 후 18년, 김영희 인생 르네상스 맞다

책 읽어주는 엄마



엄마는 종이로 작업을 합니다. 그러니까 닥종이로 말입니다. 유럽에서는 종이를 포장지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이 맑은 종이의 숨결을 느껴보렴!” 엄마는 햇살 좋은 날 한지를 햇볕에 펴보여 줍니다. “엄마는 이 종이를 무지무지 사랑해” “엄마, 돌이나 쇠는 영원한 예술품으로 남지만 종이는 금방 없어질 수도 있잖아?” 엄마는 말합니다. “그렇지 않아. 닥나무의 질감은 천년을 간다고 했어. 사람도 떠나는데 예술품도 떠날 때는 떠나야지” 엄마가 종이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눈에서 빛이 납니다….(‘책 읽어주는 엄마’ 중에서)

셋째아들 장수의 눈으로 본 엄마의 모습이다. 김영희씨는 92년 에세이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를 펴내면서 유명해졌고 이후 ‘책 읽어주는 엄마’ ‘뮌헨의 노란 민들레’ 등 여러 편의 에세이를 더 냈다. ‘아이를 잘 만든다’는 건 중의적인 표현이다. 그는 닥종이 인형만큼이나 다섯 아이도 잘 만들어냈다.
김씨는 아이를 키우는 동안 단 한 번도 ‘커서 어떤 사람이 될래?’ 물은 적이 없다고 한다. 아이가 무엇을 하고 싶다고 할 때도 그 일을 하면 돈이 될까, 장래성이 있을까 계산해 본 적이 없다. 오직 아이의 행복만을 생각했다. 맏딸 유진은 변호사가 됐고, 피아노에 재능이 있던 둘째 윤수는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장수는 패션 디자이너를 거쳐 철학을 공부 중이고, 봄누리와 프란츠도 독립해 엄마의 품을 떠났다.
“아이들 중에 돈을 많이 버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가 있지만, 돈을 더 버는 아이가 더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어요. 돈을 잘 버는 아이는 그 나름의 스트레스가 있고, 그렇지 않은 아이는 만족하면서 행복하게 살거든요. 한국 엄마들은 아이들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처럼 규격화해서 키우고, 거기에 남보다 플러스알파를 원하지만 제 경험으로 봤을 때 대성하는 사람은 예외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예외는 남과 다른, 자기 생각을 갖는다는 거죠. 다른 집 아이와 비교한다는 건 이미 엄마가 주눅이 들었다는 거예요. 그럼 아이도 지는 거예요. 엄마의 주눅, 초조, 자기비하 이런 건 금방(아이에게) 전염되거든요.”
유진이 자신의 네 살 난 아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야겠다고 조바심을 낼 때도 그는 “절대 네 주관을 아이에게 주입시키지 마라. 바이에른에서 양고기 먹고 자라는 아이에게 한국어가 무슨 소용이냐.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아이가 필요하면 다 배우게끔 돼 있다”며 말렸다고 한다.
“유진에게 아이를 많이 놀리라고 했어요. 제가 10남매 중 막내였는데 유난한 오빠가 하나 있어 ‘아버지 환갑되기 전에 형제들이 전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 계산에 따라 저도 다섯 살에 학교에 들어갔는데 처음엔 언니오빠들한테 주워들은 게 있어 영재 소리 들었죠. 그래도 학교가 너무 재미가 없었어요. 때마침 6·25 전쟁으로 휴교령이 내려 학교를 쉬고 사금파리 주워 소꿉놀이 하고 지천으로 핀 꽃구경 다니고, 꽃물 들이며 신나게 놀았어요. 전쟁이 끝나고 여덟 살에 다시 학교에 갔는데 천재는 무슨, 중간도 못 갔어요(웃음). 그런데 그때 본 하늘이며 꽃이 소중한 예술적 자산이 됐어요. 그런 시기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김영희도 없었을 거예요.”

나에게만 집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 세상 이목 신경 쓰지 않고 내 식대로 살기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 그 후 18년, 김영희 인생 르네상스 맞다

요즘 들어 ‘김영희가 근사한 여자’라는 걸 알게 됐다는 김영희씨.



김씨는 이제 막 예술을 시작한 젊은 아티스트처럼 열정이 넘쳤다. 자신의 전부인 아이들을 위해 삭막한 독일 땅에 굳건하게 뿌리를 내렸던 그는, 아이들이 떠난 요즘 그 에너지를 오로지 자신에게만 쏟아 붓고 있다. 남편 토마스도 근무지를 따라 영국에서 지내고 있어 신경 쓸 일이 없다.
“저는 현재에만 충실한 사람이에요. 아이들과 함께 살 때는 아이들이 내 현재였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했죠. 그 덕분에 아이들은 학교에 다녀오면 항상 엄마가 집에 있었고, 따뜻한 밥을 해 줬다고 기억하고 있어요. 하지만 예술가로서는 늘 아쉬움이 남았죠. 이젠 아이들 눈치, 남편 눈치, 화랑 눈치 볼 필요 없이 온전히 내 세계에만 몰두할 수 있어요. 아무 얽매임 없이 내 자신에게만 충실했던 소녀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이 산책하고, 꽃도 기르고 음악도 듣고… 아이들이 오면 좋고, 가면 더 좋고(웃음).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기면 주저함 없이 바로 시작할 수 있어요. 지금이 내 인생의 르네상스예요.”
가끔은 예쁘게 꾸미고 나들이도 한다. ‘할머니가 바람났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러거나 말거나”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다. 김영희에게만 집중하기에도 시간이 빠듯하다.
“사람들이 혼자 지내는 게 외롭지 않느냐고 물어요. 전혀. 나는 사람들 속에 있을 때 더 외로워요. 아이들과 남편이 다 떠나니 비로소 김영희가 보이더라고요. 내가 근사한 여자라는 것도 알았어요. 예전에는 좋은 평가를 받아도 스스로 만족한 적이 없었는데 요즘엔 ‘김영희 참 잘한다’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비로소 진정한 동반자인 예술과 결혼한 것 같다”고 말하는 그의 눈에선 아름다운 빛이 났다. 사랑은 배반을 해도 일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걸, 돌고 돌아 예순을 훌쩍 넘어 깨달았다고 했다.
“사랑은 할 때는 좋지만 그 영수증이 너무 버거워요. 그래서 진짜 사랑보다 소설이 재밌지요.”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 그 후 18년, 김영희 인생 르네상스 맞다

꿈나무 사과향기



그가 소설 ‘러브’를 펴낸 것도 그 때문이다. ‘러브’는 60대 여성 경희와 순수하고 아름다운 청년 파스칼의 사랑 이야기다. 몇 년 전 우연히 만난 젊은 독일 청년이 ‘내가 당신과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은 데서 모티프를 따 왔다. 그때 청년의 유혹에 넘어가 사랑에 빠졌더라면 지금쯤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의 사랑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흥미진진하다. ‘사랑은 내 눈동자의 창을 닫으면서 다가왔다’고 하니, 어쩌면 작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근원적인 사랑을 말하고 싶었나 보다.
김씨는 9월 중순 독일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곳에서 또 하루 10시간씩 그림과 글쓰기에 매달리며 자신과 대면할 터이다.
“저는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 그 많은 시련을 이겨냈나 싶기도 하고, 한 번 살아본 걸 뭘 또 해? 그보다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 너무 궁금해요. 내 앞에 지금보다 훨씬 더 화려한 예술세계가 펼쳐지면 좋겠어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려면 아주 밑바닥에 있는 것까지 끌어올려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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