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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울린 장진영 영화 같은 37년 삶 &아내 그리는 김영균씨 애절한 심경

글 이설 기자 | 사진 이기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연합뉴스, 김영균 제공

입력 2009.10.23 15:29:00

동그랗고 순진한 눈과 고혹적인 자태를 동시에 품은 배우. 순수와 퇴폐를 넘나들며 관객을 매혹하던 배우.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아우라를 내뿜던 배우 장진영이 끝내 숨졌다. 자신을 똑 닮은 러브스토리로 세상을 울리고 그답게 갔다.
세상 울린 장진영 영화 같은 37년 삶 &아내 그리는 김영균씨 애절한 심경


“여러분, 제가 없어도 저 잊으시면 안 돼요.”
특유의 해사한 웃음과 호쾌한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 故 장진영의 추모행사에서 마련한 영상자료다. 촬영차 잠시 한국을 떠나왔으니 그간 자신을 잊지 말라고 팬들에게 메시지를 띄운다. 화면 속 그는 저리 생기발랄한데 정말 그랬나 싶다. 그의 말대로 그가 없어도 그를 잊을 수 없는 많은 사람이 생전 사진과 영화를 돌려보며 헛헛한 마음을 달랬다.
장진영이 끝내 세상을 등졌다. 9월1일 가까운 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먼 길을 떠났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에는 이병헌 김희애 송혜교 유선 한지혜 김아중 최진영 차태현 김민종 등 많은 연예인들의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9월4일 경기도 분당 스카이캐슬에서 열린 추모식에서는 장진영의 아버지와 동료배우 안재욱이 못다 한 말을 편지에 담아 띄웠다. “진영아, 너와 나눴던 소주 한 잔이 너에게 독이 된 것 같다”며 울먹이는 안재욱의 말에 추모객들의 어깨가 나직이 들썩였다.

#“진영이는 처음 결혼을 상상하게 한 사람”
그가 떠난 뒤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는 남편 김영균씨(43)다. 병을 발견하기 전인 지난해 초 인연을 맺어 아픈 연인의 곁을 끝까지 지켰다. 평범한 일상에 갑자기 쏟아진 관심이 적잖이 부담일 터. 그럼에도 그는 고인의 사망 나흘 전에 혼인신고를 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추모식 행사가 끝난 뒤 근처 설렁탕집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딸을 떠나보낸 장인과 마주 앉아 힘들게 숟가락을 뜨고 있었다. 장례식 내내 빈소를 지키느라 입술이 부르트고 살은 4kg이나 빠졌다. 얼굴이 너무 안돼 보여 명함만 남기고 돌아섰다.
열흘쯤 지나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안부를 물었더니 “이거 인터뷰 아니죠?”라고 확인부터 한다. 그간 질문에 몇 마디 대답한 내용이 인터뷰처럼 보도돼 난감한 적이 많았다고 했다. 인터뷰가 아니라는 확답을 듣고서야 “정신없이 지냈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소 힘 빠진 목소리다.
거듭된 인터뷰 요청에도 그는 단호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장진영과 만나는 동안 쌓인 추억과 이야기는 한보따리지만, 본인이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데다 불필요한 오해를 살까 걱정된다고 했다. 결국 그의 동네까지 찾아갔다. 언짢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전화로 하시지 여기까지 오셨느냐”며 예의를 차렸다. 매몰차게 기자들을 거절하지 못하며 무거운 노트북을 들어주겠다는 행동에서 여린 마음과 온화한 품성이 묻어났다.
“많은 분이 저희 두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을 주시는 이유가 뭘까요.”
매력적인 여배우, 불치병, 투병 중 이어진 사랑, 죽음을 앞둔 결혼식…. 김씨는 세간의 관심에 고마움을 표하는 한편 의아해했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사랑. 많은 이가 그들을 보며 세월의 강에, 일상이라는 핑계에 밀쳐뒀던 사랑의 감정을 꺼내보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2008년 1월23일. 장진영이 친언니처럼 따르는 지인의 소개로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장진영은 당시 SBS ‘로비스트’를 마치고 휴식을 취할 때였다. 당시 김씨와 장씨의 나이는 각각 42세, 36세. 인생과 사랑과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금세 닮은 구석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특히 사랑에 있어 타협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에 마음이 끌렸다.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려왔어요.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고, 작은 일에 실망하지 않으며, 어떤 허물도 덮을 수 있는 그런 사랑이요.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 믿고 기다렸기에 진영이를 만난 거죠. 진영이도 저와 비슷했어요. 자기 세계가 확실해서 배우임에도 좋은 인연을 찾을 거라 믿고 기다렸죠. 그런 두 사람이 만났으니 금세 감정이 통할 수밖에요.”
세상 울린 장진영 영화 같은 37년 삶 &아내 그리는 김영균씨 애절한 심경

김영균씨는 장진영의 37번째 생일인 올 6월14일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서울 신사동 카페에서 촛불을 켜고 청혼했다.


그는 장진영과 만난 시간을 “눈에 들려고 노력한 시간이 반, 살리려고 애쓴 시간이 반”이라고 말했다. 혼기를 지나면서 선도 보고 소개도 받았지만 결혼의 인연은 만나지 못했다. 42세에 처음 찾아온 결혼의 꿈. 행여 인연의 끈을 놓칠까 일도 친구도 제쳐두고 진지하게 만남에 임했다. 자신보다 연인을 먼저 생각했고, 연인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진영이는 웬만해선 자기가 쌓은 성을 허물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사귄 지 반년이 지나서야 제 친구들과 어울릴 정도였죠. 그런 진영이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때까지 있는 힘껏 노력했어요. ‘너그럽고 책을 좋아하고 미술 등 관심사도 다양한 남자면 좋겠다’는 농담 섞인 말도 예사로 듣지 않았죠. 정말 이 여자와 결혼 하고 싶었으니까요.”

#실의에 빠질 틈 없이 데이트하던 아름다운 시절
이틀에 한 번꼴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며 평범하지만 행복한 데이트를 즐겼다. 둘 다 혼자 지내는 터라 서로의 끼니와 건강을 챙기며 서서히 하나가 되어갔다. 그렇게 9개월째 만남을 이어가던 중 비보가 날아들었다. 위가 쓰려 병원에 간 장진영이 위암4기 진단을 받은 것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위암4기 생존율’을 치면 10%가 나와요. 눈앞이 깜깜했죠. 하지만 저보다 당사자인 진영이가 더 걱정이었어요. ‘의사가 이상하게 집에 가라고 한다’며 증상을 묻는 진영이에게 사실을 말하기 힘들었죠. 진영이도 나중에 상태를 알았지만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자신이 꼭 10%에 들 거라는 희망을 가졌던 거죠.”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일단 연인을 살려야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김씨는 장진영의 건강회복에 모든 일정을 맞췄다. 병원 치료와 건강요법을 병행하는 한편 실의에 빠질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빡빡하게 데이트 스케줄을 잡았다. 둘 다 워낙 여행과 스포츠를 좋아하는 터라 어딜 가든 잘 맞았다. ‘전국 꼭 가야 할 여행지’류의 책을 사서 좋다는 곳은 죄다 돌아다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봐 이별을 통보했던 장진영도 김씨의 진심에 의지를 다잡았다. 매일이 다시 오지 않을 추억이고 설렘이었다.

세상 울린 장진영 영화 같은 37년 삶 &아내 그리는 김영균씨 애절한 심경

김영균씨는 고인과 나눴던 결혼반지를 왼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에 나란히 꼈다.


반년간 투병생활을 이어갔지만 암은 만만치 않았다. 항간에는 그의 건강이 회복된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사실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김씨는 함께 있는 시간이 얼마든 할 수 있는 건 죄다 해주고 싶었다. 결혼도 그중 하나였다. 2년 전 장진영은 SBS ‘한밤의 TV연예’ 인터뷰에서 “최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외롭다는 생각이 많이 들고 당분간 일 안 하고 쉬고 싶기도 하다. 배불러 아이를 가져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올해 6월14일 연인의 37번째 생일을 맞아 프러포즈를 했다. 처음 만난 그 카페에서 바닥에 장미와 촛불을 켜고 “평생 동반자가 되고 싶다”는 청혼의 편지를 읽으며 반지를 건넸다. 장진영의 회복이 어렵다는 걸 아는 지인들이 하나 둘 흐느끼기 시작했다.
“진영이가 아프니 집에서는 결혼을 못 할 거라 생각하셨어요.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평생 부담을 지울 수 없다’고 말리셨고, 진영이도 다 나으면 결혼하자는 입장이었죠. 하지만 병세가 좋지 않았고, 지금이 아니면 면사포를 씌우기 힘들 것 같았어요. ‘나는 오래전부터 너와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이 소원인데, 이제 네가 답해줄래’ 하고 물었죠.”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둘만의 결혼식
두 사람은 7월 초 치료와 요양차 미국으로 떠났고 같은 달 26일 라스베이거스의 작은 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하객은 없었고 김씨의 선배 부부가 증인을 섰다. 장진영은 평소보다 체중이 5kg 준 상태였지만, 무릎길이의 하얀 원피스에 빨간 장미꽃 부케를 든 모습은 어느 신부보다 눈부셨다.
결혼 후에도 병세는 계속 나빠졌다. 8월 초 귀국한 뒤에는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의료진은 “암세포가 온몸에 퍼졌다”고 했다. 사망 열흘 전부터는 암이 뼛속까지 퍼져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견뎠다. 집과 가까운 곳으로 병원을 바꾸는 과정에서 몸에 무리가 갔는지, 8월 말이 되자 의식을 잃을 정도로 증세가 나빠졌다. 김씨가 혼인신고를 한 것은 이즈음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혼인신고를 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병은 깊어지는데 주어진 시간은 얼마 없었어요. 해줄 수 있는 건 내 호적에 올려 진영이 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 하는 것이었죠. 결혼은 했는데 진영이가 아프다고 혼인신고를 안 하면 나 자신이 기회를 보는 비겁자가 되는 것 같았어요. 저렇게 보내면 세상에 진영이와 나의 연결고리가 없어질 것 같았고. 후세에 만나더라도 부부의 연으로 만나고 싶었어요.”
장씨의 마지막 곁은 김씨를 비롯해 가족과 친지, 친구들이 지켰다. 의식을 잃은 귓가에 많은 이야기를 건넸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좀 더 버텨줄 줄 알았는데, 김씨와의 인사를 끝으로 숨을 거뒀다.
갓 아내가 되었던 연인이 떠났지만 그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장례식 후 1주일은 결혼식 때 증인을 서준 선배가 한국에 와 집에서 함께 지냈다. 이제는 혼자다. 운전을 하거나 생전 좋아하던 음악을 듣거나 나누던 이야기가 떠오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늘 함께하던 옆 사람을 떠나보낸 슬픔보다 추억을 잃을 것이 더 겁난다. 두 사람만의 많은 이야기, 두고두고 꺼내보며 곱씹을 것이다.
김씨가 혼인신고를 한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유산 때문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김씨가 “유산 문제는 모두 장진영의 부모님께 위임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논란은 사라졌지만 본인은 세간의 억측에 마음이 상한 것으로 전해진다. 순수한 의도로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까지 선택한 일인데,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속상했을 것이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얘기가 참 많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봐요. 다음에 차분히 말할 기회가 있겠죠. 지금은 많은 분이 저를 칭찬해주시고 위로해주시는데 정말 고마운 마음 헤아릴 수가 없어요. 특히 네티즌 분들의 격려가 큰 힘이 돼요.”

#조용히 선행 실천한 기부천사
김영균씨는 지인들과 건설관련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다. 중앙대 사진학과를 나와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MBA를 마쳤다. 이후 국내 대기업 건설사에서 수년간 근무한 뒤 지금까지 건설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는 또 김봉호 전 국회부의장의 아들로도 관심을 모았다. 김 전 부의장은 전남 해남 출신 5선 의원으로, 15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김씨는 2남2녀 중 차남이다. 김씨의 부모는 처음 아들의 결혼소식을 듣고 적잖이 당황했다고 한다.
“성북구청에 혼인신고를 했다는 기사가 나간 뒤에야 아셨어요. 장례식 첫날 설마설마 하면서 전화를 걸어오셨죠. 아버지께 ‘결혼한 게 맞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셨어요. 어머니도 많이 우셨고요. 제 선택에 절대 후회는 없지만 부모님 마음을 생각하면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주변의 격려 속에 그의 부모는 곧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9월3일 흰색 장미 꽃 한 다발을 들고 빈소를 찾은 김 전 부의장은 “아들이 미국에서 결혼한 사실을 어제야 알았다. 처음에는 충격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다시 생각하니 아들이나 고인을 위해 아주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에 많은 사랑과 격려를 주시고, 고인이 간 뒤에는 슬픔과 위로를 함께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편 고인이 떠난 뒤 생전 선행 사실이 하나 둘 밝혀져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위암 진단을 받기 전 서울 마포구 홀트아동복지회 일시보호소를 수시로 찾았다. 2007년 처음 인연을 맺은 뒤 바쁜 스케줄에도 틈틈이 방문해 아이들을 씻기고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아이들에게 정기적으로 간식을 제공하는 방법을 문의하기도 했다.
또 올해 7월 중순에는 힘든 투병생활 중에도 아버지에게 모교인 전주 중앙여고에 장학금 전달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의 한 지인은 “장진영은 생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선행을 했다. 연예인자선봉사단체인 ‘따사모’에서도 활동했다. 하지만 본인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전했다. 선행사실이 새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린 장진영과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어 가까운 이조차 피했던 장진영. 남편 김씨의 탄식이 그의 단면들과 겹쳐졌다.
“진영이는 항상 생각이 많았어요. 완벽함을 추구하는 성격이라 작품에 대한 고민도 많았고 자신에 대해서도 늘 엄격했죠. 저를 만나기 전에는 행복하기보다 우울한 편이었다고도 말했어요.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들이 스트레스로 이어져 병이 온 게 아닌가 해요.”
10월20일은 그의 49재다. 그날 이후 장지인 분당 스카이캐슬에 마련된 추모관이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작은 방 크기의 추모관에는 그가 아끼던 시계, 목걸이, 평소 사진,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신발, 영화 촬영 소품, 결혼식 사진, 청룡영화제 시상식 때 입었던 드레스 등이 전시된다.
“진영이는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어요. 기도내용도 그거 하나였죠. 저도 그랬고요. 정말 울면서 애원했어요. 병이 안 나아도 좋으니 더 이상 나빠지지만 않게 해달라고…. 요즘은 잠이 잘 안 와서 늦게까지 깨어 있어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진영이가 많이 그리워요.”
세월이 흘러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던 장진영을 많은 이들이 잊어도 끝내 잊지 않을 단 한 사람. 그의 그리움이 크다.

여성동아 2009년 10월 5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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