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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해피토크

나이 든다는 것 - 낮아지는 법 배우기

2008. 08. 04

나이 든다는 것 - 낮아지는 법 배우기

안혜림, 제주도, 캔버스에 아크릴릭, 90×150cm, 2008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휴가를 다녀왔다. 신용카드를 부지런히 쓰고, 출장이며 여행으로 비행기를 많이 탄 덕에 차곡차곡 쌓인 마일리지로 딸아이와 함께 모처럼 모녀여행을 떠난 것. 스페인은 아름다웠고, 딸아이는 행복해했다. 하지만 즐거운 와중에도 서글픈 일이 있었다. 마치 사진작가라도 되는 듯 부지런히 디지털카메라를 눌러대던 딸아이가 카메라의 LCD창을 보여주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엄마, 이것 봐. 얼굴은 그럭저럭 봐줄 만한데 흰머리가 너무 많이 자라서 사진으로 보면 꼭 머리가 빠진 것 같아. 염색 좀 하고 오지 그랬어.”
태양의 나라 스페인에서 멋 좀 부려보겠다고 서울에선 도저히 입지 못하는 민소매 원피스에 가슴이 푹 파인 셔츠 등을 입고 심지어 해변에선 비키니까지 시도했는데 아뿔사, 옷차림은 백화점이지만 얼굴과 머리는 박물관이었다. 계속 흰머리가 마음에 걸려 쇼핑몰에서 염색약을 사와 호텔 목욕탕에서 궁상스럽게 염색을 했다. 스페인의 미용실에 가서 염색을 해달라는 말을 할 자신도 없었고 가격도 너무 비쌌기 때문에.

정상에 있을 때보다 중요한 건 내려온 뒤의 삶
나이가 든다는 건 이렇게 서글프고 불편한 일이다. 하지만 흰머리는 염색약으로 감출 수 있고 주름살은 기능성화장품이나 수술로 지울 수 있다. 나이 들어서 더 괴롭고 남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태도다.
며칠 전 한 친구가 전화를 걸어서 지난밤에 너무 속상했다고 털어놓았다. 그 친구는 최근 좋은 일이 많이 생겨서 몇몇 지인들, 그리고 지금은 퇴직한 여자선배를 초대해 저녁식사를 했다고 한다. 요즘 다이어트로 날렵해진 몸매에 피부과에서 갈고닦은 빛나는 피부를 자랑하는 그 친구에게 지인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예뻐졌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 비결이 뭐냐 등…. 물론 예의상 한 립서비스도 있겠지만 그날의 주인공에게 덕담을 해준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여선배가 시비를 걸어왔다고 한다.
“너 정말 용됐다. 전에는 살도 찌고 얼굴도 푸석푸석하더니 현대의학이 좋긴 좋구나. 그래봤자 네 나이가 뭐 어디 가니? 너 올해 오십 살이던가? 아니 마흔아홉이던가?”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친구는 그냥 웃어넘겼고 누군가 화제를 돌려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선배가 계속해서 친구가 예전에 저질렀던 실수를 이야기하고 자신의 옛 업적을 들춰내 자랑하며 최근 결혼한 자기 아들 며느리의 이야기를 혼자 떠들어 다른 사람들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 선배는 한때 아주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이었다. 지금은 퇴직해 집에서 쉬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아들, 딸도 모두 잘 키워서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 사람이다. 현직에 있을 때는 매우 유쾌하고 사교적인 성격이어서 주변에 인기도 좋았다. 집에서 심심해할 선배를 배려해 저녁식사에 초대했던 친구는 선배에 대한 배신감보다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더 서글프다고 했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왜 그렇게 자기 이야기, 그것도 우리와 아무 공통점이 없는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를 떠드는지 몰라. 또 왜 나한테 그렇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지…. 사람은 누구나 늙고 정상에 오래 머물 수 없어 내려오기 마련인데 내려와서의 삶이 참 중요한 것 같아. 전엔 멋져 보이던 선배가 너무 심술쟁이처럼 보여서 다시 보고 싶지 않더라.”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50대 중반의 한 여성이 얼마 전 교통사고를 당해 최근에야 회복됐다. 나와 친한 분이 서울 근교 전원주택에 사는데 자기 집 뒤뜰에서 딴 야채로 점심이나 먹자며 우리 부부를 초대하기에 그 여성도 불러 함께 갔다. 상추·배추·고추 등 싱싱한 야채에 구수한 된장국, 정성이 담뿍 들어간 나물과 전 등으로 차려진 식탁에 행복했다. 그런데 그 여성이 계속해서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 경위, 그 후에 일어난 일을 혼자 떠들었다. 난 이미 몇 번이나 들어서 지겨웠지만 그래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며 들었다. 맛있는 커피와 과일까지 잘 먹고 선물까지 받았다. 다음 약속이 있어 남편과 함께 일어서며 “태워드려요?”라고 물었더니 “난 여기서 좀 더 놀다 갈게요”라고 했다. 그집 주인 부부는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그러세요, 우리와 더 이야기하다 가세요. 인경씨네는 바쁘니까 먼저 가시고요”라고 사려 깊은 태도를 보였다.
“주책 그만 떨고 우리와 같이 가요. 이분들, 식사 준비하느라 힘드셨을 텐데 좀 쉬셔야죠. 다음에 또 같이 와요”라는 말이 어금니까지 차왔지만 참고 돌아섰다. 이 삼복더위에 왜 남의 집에서 그렇게 민폐를 끼친단 말인가. 별로 허물없이 친한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그 여성 역시 젊은 시절에는 남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스타일이 아니었다.
전성기 때 너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이들일수록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 크고, 높은 동네가 아니라 아랫동네에 사는 것을 못 견뎌한다. 언제 어디서건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지 못하고 항상 존중받고 대접받기를 원한다.

상대 이야기 들어주고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며 살아가기
나이 든다는 것은 노화의 과정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하염없이 낮게, 겸허하게 비울 수 있는 자세를 익혀야 하는 것이다. 어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남의 입장을 배려하고, 자신의 존재 때문에 남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어른다운 겸손함을 가져야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하다. 내가 아는 이야기,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이 아무리 많아도 수시로 혀를 깨물건 허벅지를 찌르건 참아내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뒷방 늙은이로 외롭게 지내란 것이 아니다.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상대방의 이야기에 공감한다는 모습을 보이고 적절한 시기에 자기 목소리를 내면 어디서나 환영받는다. 주인공이 아니라 기꺼이 조연이 될 각오를 할 때 나이 드는 것이 억울하지도 않고 서글픈 일이 아님을 배우게 된다.
젊은 시절에도 주인공이 아니었고, 별로 찬란한 시절도 없었기에 난 늘 조연으로 살 각오가 돼 있다. 그래서 별로 나이 드는 것이 두렵지도 슬프지도 않다. 그래서 인생은 공평한 거다. 평생 조연은 가늘고 길게, 평화롭게 살 수 있으니 말이다.

나이 든다는 것 - 낮아지는 법 배우기

유인경씨는…
경향신문사에서 선임 기자로 일하며 인터뷰 섹션을 맡아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직장 여성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인데 성공이나 행복을 위한 가이드북이 아니라 웃으며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실수담이나 실패담을 담을 예정이다. 그의 홈페이지 (www.soodasooda.com)에 가면 그가 쓴 칼럼과 기사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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