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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생이다

만신 김금화 드라마틱 인생 고백

“두 번의 이혼과 사회적 냉대 이기고 큰 만신 되기까지…”

기획·송화선 기자 / 글·오진영‘자유기고가’ / 사진·지호영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07.11.23 11:27:00

우리 시대의 큰무당으로 손꼽히는 인간문화재 김금화씨가 올해로 무속인이 된 지 60년을 맞았다. 열여섯 나이에 신내림을 받고 큰무당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번의 이혼과 사회의 멸시 등 숱한 아픔을 겪어야 했던 그의 인생 역정을 들었다.
만신 김금화 드라마틱 인생 고백

지난 10월 중순 인천광역시 강화도에서는 닷새에 걸쳐 큰 굿판이 열렸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무당, ‘나라 만신’으로 불리는 김금화씨(76)가 신내림을 받고 무속인이 된 지 60년이 된 것을 기념하는 ‘만수대탁굿’을 벌인 것. 전체 5일 가운데 3일은 산 자의 만수무강을 빌고 나머지 2일은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이 굿은 큰무당도 평생 세 번을 하기 어렵다고 할 만큼 어려운 굿이다.
1931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일흔 일곱.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닷새씩이나 작두를 타고 하늘 높이 펄펄 날고 뛰는 게 어렵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김씨는 “가을철이라 하루해가 짧아서 아쉽더라. 뭘 좀 해보려고 하면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고 답했다. 여러 날 야외에서 햇빛을 받아 얼굴이 많이 탔다면서 볼 언저리를 매만지는 모습은 여염집 평범한 아낙네 같았지만 “만신이 된다는 것은 뭇사람들이 참지 못하는 고통을 숱하게 참아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모습에선 한평생 무당으로 살아온 그의 인생 역정이 읽혔다.
“무당으로 살면서 서럽고 힘든 일이 참 많았습니다. 옛날에는 왜 그렇게 무당을 죄인 다루듯 했을까요. 그런 시절도 있었는데 무당 된 지 60년 됐다고 그렇게 많은 이들이 찾아와 축하해주니 감격스럽고 행복했어요.”
말을 꺼내는 목소리가 어느새 잠기는 듯하더니 붉어진 눈자위에 촉촉이 눈물이 고였다.
김씨는 황해도 연백 산골짜기 가난한 집에서 육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첫째가 딸이라 둘째는 아들이길 바라던 부모는 그에게 ‘넘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남동생이 어깨너머에서 넘어다보고 있다는 뜻이다. 김씨는 세 살 때 남동생이 태어나자 비로소 ‘금화’라는 정식 이름을 얻었다. 한 많은 어린 시절 이름만큼이나 그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줄줄이 태어난 어린 동생을 종일 업고 다니느라 여름에는 오줌과 땀으로 등이 짓물렀고, 열세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어머니를 도와 종일 밭일을 했다고 한다. 김씨는 “내게 남아 있는 어린 시절 기억은 자나 깨나 먹을 것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렇게 못 먹고 자랐는데도 또래보다 껑충하니 키가 컸던 김씨는 언제부턴가 조금씩 자신이 이상해져간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기놀이를 하다가 누군가 손을 붙잡는 것 같아 허공에서 손을 멈추곤 했다고.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누군가 다른 이가 움직이는 것만 같았어요. 왠지 모르게 늘 몸이 나른하고 항상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하고 초조했죠. 그리고 언젠가부터 나무나 돌, 물을 보고 얘기를 건네기 시작했어요.”
열 살이나 열한 살 됐을 무렵부터는 사람들을 보면 뭔가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동네에서 뭐가 없어지면 “누구네 마당에 있던데” 하기도 하고 “누구랑 누구는 정분났네” 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다녔다고. 어떤 느낌이 오면 아무 생각없이 다 얘기했기 때문에 같이 놀던 친구에게 불쑥 “야, 네 아버지는 일찍 가시갔다(돌아가시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이상한 에미네이’라며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무병을 앓은 거였어요. 신기가 내린 사람이 대부분 그렇듯 횟배(회충으로 인한 배앓이)·학질·감기 같은 잔병치레도 잦았죠. 그러다가 열세 살 때 정신대 끌려가는 걸 피하느라 5리쯤 떨어진 동네로 시집을 갔어요.”
그러나 시집살이는 끔찍했다. 심성 사나운 시어머니는 밥은 주지 않고 고되게 일만 시키며 매질까지 일삼았다고 한다. 하루는 며느리가 굶는 걸 알게 된 시아버지가 당신 밥을 남겨 물을 붓고는 다 먹은 것처럼 뚜껑을 젖혀서 내놓았는데, 김씨가 시어머니 눈을 피해 부엌에서 몰래 먹다가 그만 들킨 일이 있었다. 다음 날 시어머니는 시아버지가 또 남겨놓은 물만밥을 개밥통에 부어버렸다고.
“그때 얼마나 늘 배가 고팠는지, 아무도 안 볼 때 그 밥알을 맨손으로 건져 먹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밥을 주지 않는 것, 끝없이 일을 시키는 것, 시도 때도 없이 욕설을 퍼붓는 것 등등 모든 게 다 힘들었지만 가장 괴로운 건 매를 맞는 거였어요. 시어머니의 매질은 마구잡이였거든요. 일단 화가 나면 부지깽이·빗자루·주걱 등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휘둘렀어요.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무조건 빌고 또 빌어야 했죠.”

혹독하던 시집살이 벗어난 뒤 운명처럼 다가온 무당의 길
만신 김금화 드라마틱 인생 고백

올해로 무당인생 60년을 맞은 김금화 만신.


그 마을에서 며느리를 때려 죽인 집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김씨는 “이대로 있다가는 나도 맞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친정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처음 두 번은 친정 식구들 손에 이끌려 시집으로 돌려보내졌지만, 세 번째 도망쳤을 때는 어머니도 그를 받아주었다고. 그러나 친정에 돌아온 후 다시 무병이 심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아픈 일이 반복됐고, 온몸이 나른하게 아프다가도 혼자 입으로 장단을 맞추며 길길이 뛰고 춤을 추면 몸이 가벼워지곤 했다고. 김씨의 외할머니가 양반가로 시집을 갔다가 우연히 찾아온 무병을 이기지 못하고 무당이 된 터라 무당 노릇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던 식구들은 어떻게든 그의 병을 치료하려 애썼다고 한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못된 귀신을 잘 쫓아내기로 이름 높은 할아버지를 집에 모셔왔지만 그는 김씨를 앉혀놓고 주문을 외우다 “도저히 안되겠다. 아무래도 무당이 돼야 낫겠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고 한다. 그렇게 열여섯 살 되던 해 여름, 김씨는 외할머니를 신어머니로 모시고 내림굿을 받아 무당이 됐다.
그는 내림굿을 받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총명하고 굿 잘하는 무당’으로 마을에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1·4후퇴 때 황해도를 떠나 경기도 부평에 정착한 뒤에도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실질적인 가장으로 살림을 꾸릴 수 있을 만큼 곧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무당으로서의 성공과 별개로 그의 삶에 드리워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스물네 살 때 지인의 집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두 번째 결혼을 했지만 또다시 실패한 것이다. 그의 두 번째 남편은 첫 아내와 사별하고 사업에도 실패해 변변한 직업도 없이 친구 집을 전전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씨를 향해 ‘사랑한다’고 말하는 마음만은 진실해 보였다고.
“처음 그가 저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몇 번이나 거듭해 청혼하는 걸 ‘나는 무당이기 때문에 당신의 결혼상대로 적합하지 않다’며 거절했죠. ‘나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봐야 하고, 신의 말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내 삶을 누가 이해해줄 수 있겠느냐’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렇게 거절하는 제 앞에서 그가 같이 눈물을 쏟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새끼손가락을 깨무는 거예요. 핏물이 주르륵 쏟아지는 손가락을 들고 ‘이렇게 해서라도 내 마음을 증명하겠다. 우리가 결혼하면 다시는 당신이 가슴 아프지 않게, 눈물 흘리지 않게 해주겠다는 걸 피로 맹세하는데, 그래도 나를 못 믿겠느냐’고 하더군요.”
그날 이후 김씨는 그를 다시 보게 됐다고 한다. 평생 외롭고 고될지 모를 삶을 그와 함께 살아간다면 든든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친정 식구들은 만류했지만 김씨는 그럴수록 어서 남편이 자리를 잡도록 도와 주위의 눈총이 사라지게 하겠다는 생각만 했다고 한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며 굿을 했고, 앞장서서 남편의 취직자리를 알아보고 다녔다고. 마침내 김씨 손님의 소개로 남편이 미군부대에 취직한 뒤 첫 월급을 받아왔을 때 그는 ‘이것이 바로 남자의 그늘에서 사랑받는 여자의 행복이구나’라고 생각하며 가슴이 벅찼다고 한다.
그러나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남편은 변하기 시작했다. 내놓고 바람을 피우더니, 급기야는 여자를 만나러 간다며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기까지 했다고. 혼자서 애태우고 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기다리고, 그래도 돌아오지 않는 밤이면 미친 듯이 이곳저곳 그를 찾아다니는 일이 반복됐다고 한다. 남편은 어쩌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의 곁에 오는 법이 없었다. 혹시라도 몸이 닿을세라 이불 밖에 누워 잠을 청하는 그를 보며 김씨는 혼자 울다 목이 메곤 했다고.
“이미 제게서 마음이 떠나버린 거였죠. 제가 아무리 울면서 애원해도 소용 없었어요. 그 사람은 오히려 이혼해달라며 저를 설득하려 들더군요. 결혼해달라고 끝없이 애원하던 그 모습 그대로 이번엔 이혼해달라고 끝없이 애원하는 거예요. 예전엔 그토록 간절히 나를 원하던 사람이, 돈을 많이 벌면 오토바이를 사서 나를 태우고 어디든 다니겠다고 하던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죠.”

‘내가 상처받고 울어봤으니 다른 사람들의 고통 잘 이해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두번째 이혼의 아픔 극복’
결국 김씨는 결혼 11년 만에 남편과 이혼하고 말았다고 한다. 매일매일 ‘이혼해달라’고 사정하는 그를 견딜 수 없어 ‘그래, 이혼해주마’ 하고 함께 관청으로 가는 길에서까지 남편을 붙들었을 만큼 그의 변심이 마음 아팠다는 김씨는 “가끔씩 왜 나는 마음 의지할 남편 하나 곁에 두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너무 괴롭고 마음이 아파 죽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무당은 모든 사람의 한과 눈물을 보듬어 안아야 하는 사람인데, 내가 상처받고 울어봤으니 이젠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을 다독였다”고 말했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부평에서 서울로 이사 온 것이 지난 66년. 그의 앞엔 이제 여자로서뿐 아니라 무당으로서 살기조차 힘겨운 세상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당과 굿이 미신으로 몰린 것이다. 늘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며 죄인처럼 숨 죽인 채 몰래 굿을 하던 그 무렵, 김씨는 바로 아래 남동생이 조카 넷을 남겨놓고 서른둘의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아픔도 겪었다고 한다.
“굿을 하기는 점점 어려워지는데 조카까지 더해져 부양할 식구는 늘어나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벅차고 힘들기만 했어요. 그런데 82년, 미국 LA에서 한·미 수교 1백주년을 기념하는 굿 공연을 펼치면서부터 조금씩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죠. 그 공연은 우리 민속문화에 관심이 많던 고 조자용 선생의 주선으로 이뤄졌는데, 현지 한국 공관에서는 처음에 ‘웬 굿이냐’며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고 해요. 하지만 미국에서 워낙 뜨거운 반응을 얻으면서 워싱턴·뉴저지·뉴욕 등 미국 곳곳을 돌며 석 달간 계속 공연하게 됐죠.”
이후 김씨는 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2-나호 배연신굿 및 대동굿 예능보유자로 지정됐고, 우리 전통을 계승하는 예인이자 ‘나라 무당’으로 사도세자 진혼굿 등 각종 대형 굿을 주재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날의 상처가 모두 사라진 건 아니다. 그는 “아직도 새 제자를 맞아들이는 내림굿을 할 때면 늘 무당으로 살아온 지난 길의 고통을 떠올리며 울고 만다”고 털어놓았다.
김씨는 최근 이 같은 삶의 이야기를 담아 자서전 ‘비단꽃 넘세’를 냈다. 그의 이름 ‘금화’를 풀어낸 ‘비단꽃’과 어린 시절 이름 ‘넘세’를 이어 책 제목을 붙인 김씨는 “굴곡지고 험한 신명의 길을 걸으며 돌부리에 차이고 진흙탕에 빠지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젊은 날에는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신을 원망한 적도 많았지만 힘든 길을 통과하고 나면 나는 어느새 더 강건한 모습이 돼 있었다”며 “이제 돌아보면 고통도 시험도 결국은 모두 나를 단련시키려는 신령님의 뜻이었던 듯싶다”고 말했다.

여성동아 2007년 11월 5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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