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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아름다운 성공담

어려운 가정환경 딛고 미국 프린스턴대 합격한 김현근

글·송화선 기자 / 사진·김형우 기자

입력 2006.07.30 17:20:00

한국과학영재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 특차 합격한 김현근군. 그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성공을 거뒀지만 학창 시절 평범한 머리와 어려운 가정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최선을 다하면 세상에 못할 일은 없다’고 말하는 김군의 특별한 성공담.
“남과 비교하지 않고 최선 다하다 보니 공부하는 게 행복했고 꿈을 향해 달릴 수 있었어요”
어려운 가정환경 딛고 미국 프린스턴대 합격한 김현근

김현근군(19)은 천재다. 우리나라 최고 두뇌들이 모이는 한국과학영재학교를 수석 졸업했고, 순수 국내파면서도 미국 아이비리그 명문 프린스턴대에 특차 합격했다. 전국에서 딱 20명만 뽑아 대학 4년간 2억원을 지급하는 삼성장학금까지 받는다.
그런데 정작 그는 자신이 평범하다고 말한다. 재능이 있다면 그건 ‘무서울 만큼 노력할 수 있는 능력’뿐이라는 것이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며 설득당하고 말았다. 때로는 평범한 사람이 ‘무서운 노력’만으로 천재를 능가할 수도 있다는 걸. 노력도 능력이라면, 그는 세계 챔피언감이었다.

초등학교 겨울방학 때부터 매일 밤 10시까지
반배치고사 공부, 시험 때면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
부산 출신인 현근군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다. 부잣집 아이, 싸움 잘하는 아이들 앞에서 스스로를 당당하게 해줄 수 있는 건 ‘공부’뿐이란 걸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IMF 위기가 찾아오면서 증권회사에 다니던 그의 아버지는 2억원의 빚을 안은 채 실직자가 됐다. 현근군의 집은 급격히 어려워졌고, 급기야는 살던 아파트를 팔고 할머니집에 ‘얹혀 지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아버지를 대신해 돈을 벌기 시작한 어머니는 슈퍼마켓 점원, 학습지 교사, 회사 경리 등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산더미 같은 빚의 이자를 갚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었다. 현근군이 부모 몰래 신문배달도 해봤지만,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다니던 학교에서 식당 아주머니로도 일한 현근군의 어머니는 남들 몰래 아들 식판 위에 반찬을 수북이 더 얹어주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곤 했다.
그래서 현근군은 공부를 했다. 스스로 당당하기 위해,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초등학교 졸업 무렵, 친구들이 보습학원에 다니며 중학교 과정을 선행 학습할 때 그는 혼자 반배치고사를 준비했다. 학원에 다닐 돈은 없지만, 초등학교 과정을 복습하면 되는 반배치고사 준비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초등학교 졸업식이 끝난 다음에 반배치고사 공부를 시작하잖아요. 저는 겨울방학 때부터 매일 집 근처 시민 도서관 열람실에 가서 밤 10시까지 공부했어요. 주위에는 대부분 고시 공부하는 어른들이나 대입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이 있었죠. 인생을 걸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풍기는 열기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저도 그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반배치고사 대비 문제집만 열 권 정도 풀고 외웠어요. 그러고 나니 ‘할 만큼 했다’는 만족감과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시험 결과는 뻔했다. 현근군이 전체 수석을 차지해 신입생 대표 선서를 하게 된 것이다. 전교의 선생님들이 다 그를 알게 됐고, ‘실력 있는 놈’으로 인정했다. 그 시절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였다. 이 경험은 현근군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이 명예를 절대 잃지 말자’는 오기를 함께 심어주었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중학교 과정을 알고 들어왔잖아요. 그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면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죠. 요령 부리지 않고, 교과서를 통째로 외웠어요. 시험 때는 교과서를 최소한 다섯 번 이상 정독하고 문제집을 풀었어요.”
그는 중학교 기말시험에서 12과목 전부 100점을 받아 평균 100점으로 전교 1등을 했고, 이후 단 한 번 전교 2등한 걸 빼고는 고등학교 진학 때까지 이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어려운 가정환경 딛고 미국 프린스턴대 합격한 김현근

김현근군이 한국과학영재학교를 졸업한 날,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1등을 하려면 예·체능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체육 실기시험이 농구 자유투 넣기였을 때의 일이다. 10번을 던져 7번 이상 득점을 성공시켜야 만점을 받을 수 있는데, 당시 현근군의 실력은 두세 번 던지면 한 번 정도 골이 들어가는 수준. 그는 반에서 제일 농구 잘하는 친구에게 찾아가 특별지도를 부탁했다. 그리고 매일 수업이 끝난 후 운동장에 남아 농구공을 던졌다. 결국 실기 시험날 공 7개를 던져 모두 성공시키는 기록으로 만점을 받았다고 한다. 그에게 농구를 가르쳐준 아이보다도 높은 점수였다. 사생대회를 간다고 하면 며칠 전부터 집에서 풍경 사진을 보면서 풍경화 그리는 연습을 했고, 변성기 때문에 음악 실기시험을 제대로 치를 형편이 안됐을 때는 성악을 전공한 음악선생님을 찾아가 따로 발성법 레슨을 받기도 했다. 한 달간의 연습 끝에 음악시험에서도 만점을 받았다고. 스스로 ‘이 이상은 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까지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이 현근군의 공부 스타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에게 좌절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가 처음으로 ‘넘을 수 없다고 느껴지는 벽’을 만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교내 수학경시대회가 열렸는데, 학교 시험에서는 늘 만점만 받던 그가 손도 댈 수 없을 만큼 어려운 문제들이 출제된 것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그보다 공부를 못하던 같은 반 친구가 그 문제를 다 풀고 학교 대표로 수학경시대회에 출전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수학경시대회 문제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원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학원에 다닐 형편이 못됐기 때문에 혼자서 ‘거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실력자들이 있는 걸까’ 두려워하기만 했죠.”
중학교에 진학한 뒤 그가 늘 경시학원에 다니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부모가 그를 학원에 보내주었다. 반배치고사 전교 1등 경력 덕분에 ‘쟁쟁한 내공’을 가진 아이들이 있는 최고반에 편성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그는 아직 중학교 1학년 수학도 배우지 못했는데, 경시반 아이들은 이미 2학년 진도를 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수업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어찌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학원 수업이 끝나면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속의 것을 다 토해내곤 할 정도였다고 한다.
“경시반에는 초등학교 때 부산광역시 수학경시대회에서 최우수상, 금상을 탄 아이들도 있었어요. 전 도저히 그 아이들을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이렇게 뛰어난 친구들과 한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고요. 그 다음부터는 어려운 수학문제에 부딪히고 그걸 해결해가는 과정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죠.”
현근군은 중학교 1, 2학년 수학교과서를 혼자 독파하며 다른 아이들과 보조를 맞추기 시작했다. 두세 달쯤 지난 뒤에야 조금씩 수업내용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나중엔 그 반에서 우수한 그룹에 속할 수 있었다고.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집에서 몸을 녹이느라 손에는 장갑을 끼고, 가스레인지에 구운 몽돌을 수건에 싸서 발밑에 둔 채로 공부한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 어려운 형편에 매달 학원비 20만원을 꼬박꼬박 챙겨주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결국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부산광역시 수학경시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했다. 부산 전체에서 15등 정도의 성적으로, 초등학교 때 그를 밀어내고 학교 대표로 선발됐던 친구보다 높은 등수였다.

과학 적성은 최하위, 하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영재학교에서 최상위 성적 거둬
이처럼 극복하기 어려울 것 같은 벽을 만나면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으로 그를 넘어서는 게 현근군이 말하는 자신의 재능이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도 그랬다. 한국과학영재학교(이하 영재학교)는 지난 2003년 과학영재들의 교육을 위해 설립된 특수학교. 우리나라에 영재만을 위한 학교가 생긴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 전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전국 경시대회 최우수상 수상자들이 즐비했고, 학생들은 고등학교 물리·화학 정도는 배우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노력파’ 현근군은 설 자리가 없었다. 입학 전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능력검사가 실시됐는데, 과학 사고력 분야에서 100점 만점에 60점을 받은 것이다. 한 선생님이 “현근아, 미안한 말인데 머리가 좋은 것 같지는 않구나”라고 말했을 정도로 최악의 성적이었다.

어려운 가정환경 딛고 미국 프린스턴대 합격한 김현근

경제적 어려움이 찾아오기 전, 부모와 단란하던 한때(왼쪽). 한국과학영재학교 교정에 어머니와 함께 선 김현근군.


“함께 입학한 1백44명 가운데 저를 제외한 1백43명이 저보다 뛰어나다고 생각될 때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내가 남보다 잘하는 유일한 것이 공부라고 생각했는데, 그 부분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하게 되니까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했죠. 게다가 다른 아이들은 심심풀이로 학교 강당에 있는 그랜드피아노로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치고, 미술선생님이 ‘흥분된다’는 표현을 쓸 정도의 그림을 그려내는, 말 그대로 ‘천재’들이었거든요.”
현근군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공부만 했다. 영재학교는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자정이면 무조건 잠자리에 들게 했는데, 그는 새벽 3시 전엔 침대에 누운 적이 거의 없었다고. 기숙사에 불이 켜져 있는 게 적발되면 기합을 받았기 때문에 12시가 넘으면 불빛이 복도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문틈을 수건으로 꽁꽁 메우고 전기 테이프를 붙였다. 그러다가도 걸리면 아예 화장실 변기 칸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공부하곤 했다고 한다.
“모든 과목이 다 어려웠지만, 특히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가 제일 어려웠어요. 컴퓨터를 잘하는 친구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대충 이해할 것 같다가도 문제를 풀려고 하면 머리가 멍해졌죠. 그러면 다시 그 친구에게 가서 질문을 했어요. 그 친구는 아마 ‘저 머리로 어떻게 영재학교에 들어왔을까’ 했을 거예요. 정말 ‘아니, 그게 아니라…’라는 말만 수십 번을 했으니까요.”
다른 친구들은 한 번만 설명을 들으면 ‘아, 그거구나’ 하며 이해하는 부분을 그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고는 모두 잠든 밤에 혼자 프로그래밍 코드를 외우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자신이 그렇게 머리가 나쁜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열심히 공부했지만 1학년 첫 시험에서 그가 거둔 결과는 참담했다. 수학은 같은 반 18명 가운데 11등, 물리는 12등을 한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100점 만점에 71점밖에 받지 못했다. 그때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운 건 ‘열등감’과 ‘절망’이었다고 한다. 평범한 자신이 불가능한 것을 갖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꼴사납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 번도 공부 때문에 힘들다고 말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기숙사에 오신 어머니께 완전히 망가진 몰골로 투정을 부렸죠. 묵묵히 지켜보시던 어머니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다보면 너도 모르게 생활이 즐거워질 거야. 절대로 상대적으로 너를 평가하지 말았으면 해’라는 편지를 보내셨어요. 그 편지가 절 변화시켰죠. ‘최선을 다해서 후회를 남기지 않으면 그만이지 결과가 뭐 중요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그는 다른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최선을 다하는 것에 만족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정말 거짓말처럼 공부가 즐거워졌다고. 공부를 안 하고 있을 때는 불안하고 허전하다가도, 온 신경을 집중해 공부를 시작하면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얻을 수 없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노력은 그가 영재학교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영재학교에 다닐 때도 현근군의 집은 여전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모든 교육비용을 나라가 지원하기 때문에 1년에 1백만원 정도의 수업료만 내면 됐는데, 이것조차 내기 어려웠다고. 우등생에게 학기마다 1백50만원씩 지급되는 장학금을 받으려면 그는 좋은 성적을 거둬야만 했다.
현근군은 미친 듯이 공부했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무조건 외웠다. 시험기간에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씻지도 않아서 친구들 사이에서 ‘폐인’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특히 그를 괴롭히던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시험 범위 전체를 통째로 외웠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느껴질 때까지 공부에만 매달린 결과, 그는 마침내 기말시험에서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4.5점 만점에 4.38점. 전교 3등을 차지한 것이다.



어려운 가정환경 딛고 미국 프린스턴대 합격한 김현근

현근군은 “공부는 머리 좋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엉덩이 무거운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말을 믿는다. 천재가 아닌 자신이 천재보다 더 공부를 잘한 것은 노력과 오기 덕분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자마자 바로 집에 보냈어요. 학비는 분기별로만 내면 되니까 그전에 먼저 필요한 생활비로 쓴 거죠. 그래서 등록금 낼 때가 다가오면 부모님은 다시 돈을 구하느라 동분서주하셨어요. 여기서 메우고, 또 저기서 메우고…. 그렇게 겨우겨우 외줄타기하듯 3년을 보냈죠. 그래도 전 행복했어요. 영재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어서, 또 장학금까지 받을 만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어서 말이에요.”
현근군은 스스로에 대해 “긍정적이지만 낙천적이지는 않은 성격”이라고 소개했다. ‘하면 된다’고 믿지만 무턱대고 ‘잘 될 거야’라고 생각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성격은 그를 끝없이 몰아붙였고, 그는 동급생 가운데 가장 좋은 성적인 평점 4.23점(4.3점 만점)으로 영재학교를 졸업했다. 미국 아이비리그의 명문 프린스턴대학 입학자격도 얻었다. ‘진짜 노력파’라는 평가를 들으며 얻어낸 결과였다.
이만큼 노력했으니 이제는 좀 쉬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외국 유학을 선택한 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계에서 모인 우수한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을 평가하고 한 단계 더 발전시키고 싶다는 것이다.
“유학생활이 쉽지는 않을 거예요. 10년 후 세계를 이끌어갈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서 아마 전 또 높은 벽에 부딪히겠죠. 하지만 제가 갈 수 있는 끝이 어디일지 궁금해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어서 또 한 번 장애물을 뛰어넘고 싶어요.”
현근군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온 과정을 담은 책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다’의 첫머리에 ‘공부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라고 적었다. 쉽지 않은 길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걸어온 이 젊은이에게, 앞으로도 늘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기를 진심으로 빌고 싶어졌다.

여성동아 2006년 7월 5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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