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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Talk

중년의 사랑, 순정은 어디에?

2006. 07. 24

친목 모임에서 중년 남녀의 ‘사랑’이 화제에 오르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빡빡한 스케줄에 숨막힐 것 같이 보이는 바쁜 사람들도 “더 늙기 전에 진실한 사랑에 빠지고 싶다”고 호소하곤 한다. 예전에도 춤바람난 ‘자유부인’이 있었고 중년의 사랑은 어느 시절에나 있었지만 요즘은 그게 공론화된다는 게 때로 당혹스럽다. 사랑은 껌처럼 흔해졌지만 가슴 졸이고 마음 설레던 순정은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것 같다.

중년의 사랑, 순정은 어디에?

“도대체 뭐가 문제야, 왜들 그러는 거야.”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지만 수시로 모여 식사도 하고 유치한 이야기에 키들거리고 서로 문제가 있으면 독수리 오형제처럼 똘똘 뭉쳐 위로도 해주는 모임이 있다. 그 모임에서 두목(?) 역할을 하는 가수 조영남씨가 어느 날 이렇게 물었다.
“다들 30대 이상의 성인이고 겉으로는 분명히 정상인데 말야. 수년간 자주 만나왔는데도 어째서 단 한 사람도, 단 한 건도 자기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없냐고. 갑자기 사랑에 빠졌다거나, 사랑 때문에 숨이 막힌다거나, 불륜이라 괴롭다거나 고백을 하는 인간도 없고 사고쳐서 언론에 나온 사람도 없잖아.”
마치 우리들에게 숙제를 안 한 학생을 나무라듯 따졌다. 언뜻 듣기엔 우리가 비정상이고 인간들의 절체절명의 행복인 ‘사랑’을 직무유기한 죄인인 것 같아 새로운 사랑을 지금 하면 ‘불륜’의 여주인공이 될 이 아줌마까지 숙연해졌다. 그런데 40대 후반의 노총각이 이의를 제기했다.
“아니 우리들이 마치 성불능이기라도 한 듯 매도하는데 그게 아니죠. 나도 사랑도 하고 데이트도 하지만 형(조영남씨)에게 일일이 보고를 하거나 그 상대를 보여주지 않을 뿐이라고요. 우리가 친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라 꼭 결혼해야 할 사람이란 확신이 서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또 미리 소개하면 그 사람 앞에서 내 흉만 실컷 보고, 망신 줄 게 뻔한데 왜 그런 일을 하겠어요.”
나도 힘을 받아 항변했다.
“사랑이 어디 혼자 노력해서 되는 일이냐고요. 나 혼자 짝사랑하는 일이야 지금도 조인성이나 장동건 등에 넋을 잃지만 그 얘길 어떻게 해요. 여중생도 아닌데. 또 유부녀인 내가 누군가와 사랑하면 불륜인데 사고를 치란 말이에요? 또 누가 나랑 사고쳐 주냐고요. 그리고 우리야 원래 평범하고 조신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선생님이야말로 ‘사랑학 교주’에다 애인은 많을수록 좋다고 공언하는 자유인이면서도 정작 진지한 사랑에 대한 고민이나 연애를 한다는 이야기는 없잖아요.”
상황은 역전됐다. 조영남씨는 갑자기 풀이 죽어 한숨을 푹 쉬었다.
“맞아.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냐. 나이가 드니까 더 그래. 며칠 전에 A와 같이 극장 가서 ‘죽이는 영화니까 꼭 봐야 한다’고 거품 물고 강조하니까 어이없다는 듯 쓸쓸한 눈빛으로 ‘그 영화, 나랑 봤잖아요’ 하는 거야. 애틋한 마음은 마음이고, 기억력은 점차 희미해지고, 몸은 자꾸 말을 안 듣고….”

마음만큼 몸과 기억력이 따라주지 않아 코미디가 되는 중년의 사랑
갑자기 분위기는 코미디가 돼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모임만이 아니라 중년 CEO들이나 아주머니들의 모임에서도 ‘사랑’이 유난히 화제가 되는 일이 많아졌다. 기업경영에 골몰하고, 직원들 다루기에 신경쓰고, 빡빡한 스케줄에 숨막힐 것 같은 근엄한 경영인들이 “더 늙기 전에 진실한 사랑에 빠지고 싶다”고 하거나 “어떻게 하면 여자 마음을 움직여 작업에 성공하는지 궁금하다”고 털어놓는 것을 보고 솔직히 놀랐다.

중년의 사랑, 순정은 어디에?

CEO들과 모임을 갖고 있다는 한 인테리어 회사 여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다들 일만 하다가 늙어가기가 억울한가봐요. 그런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는데 다들 마음뿐이지 정작 실행에 들어가라면 못해요. 워낙 바쁜데다가 기억력도 나빠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일들이 생기거든요. 자기가 지난번에 했던 말도 기억 못하고 내가 그에 관해 얘기하면 ‘어떻게 알았냐’며 깜짝 놀라고, 어딜 가자고 약속해서 기다리고 있으면 ‘오늘은 뭐 하시냐, 별 스케줄 없냐’며 천진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와요. 물론 사랑을 하면 누구나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간다지만 그건 마음 일부일 뿐이지 몸이나 정신력은 따라오지 못하니 더 서글퍼지더군요.”
피카소나 괴테, 그리고 80세에도 재혼해 아이까지 낳은 앤터니 퀸 등 할아버지였어도 열정적인 사랑을 한 이들도 많다. 그러나 분명 그들도 수시로 “아이고, 숨차서 못하겠다”라고 하거나 “그런데 여기가 어디야” 등의 노인스런 대화를 했으리라.
아줌마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분이 재미있는 농담을 해줬다.
“요즘 남편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여자는 한심한 여자라고 한대요. 남편 말고 애인이 하나 더 있으면 양심 있는 여자, 애인이 둘이면 세심한 여자, 넷이면 그땐 좀 심해서 욕이 나오는지 ‘네 이년~’이라고 하더군요. 그 이상 애인이 많은 여자는 뭐라고 하냐면, 열심히 사는 여자래요. 호호호.”
물론 1950년대에도 춤바람난 ‘자유부인’이 있었고 중년의 사랑은 어느 시절에나 있었지만 요즘은 그게 공론화된다는 게 참 신기하고 당혹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몸도 마음도 정신도 건강하고 젊고 싱싱했던 시절엔 정신은 너무 어리고 마음은 유치하고 몸은 열정에만 들떠 제대로 된 사랑을 하기 힘들었다. 시간은 많고 돈은 없고 질투심에 부글부글 끓다가 사소한 일에 삐치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 세상을 좀 알고 사람에 대한 이해심과 포용력도 생기면 시간은 없지만 경제적 여유는 생겨 근사한 레스토랑에도 가고 고급 명품도 선물해줄 수 있고 우아하고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다시 마음은 유치해지고 몸은 후들거려 엇박자가 된다고 한다.

껌처럼 흔해진 사랑, 순정은 어디에?
무엇보다 이미 가정이 있는 이들의 경우에 아무리 다시 시작한 사랑이 운명적이고 목숨을 바꿀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해도 ‘불륜’이란 낙인이 찍히고 배우자들이나 자녀들에게 상처를 입히기에 선뜻 박수를 쳐주기 어렵다. 서로의 가정을 깨지 않는다 해도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서로 즐기는 쾌락이거나 이기적인 사랑이 아닐까.
물론 예전의 첫사랑을 40년 만에 만나 처음 그대로의 가슴 떨림을 재확인한 커플도 있고, 노인학교에서 만난 할아버지와 사랑에 빠져 재혼한 65세 할머니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20대 신부 못지않게 수줍어하긴 했다.
하긴 요즘은 네 살짜리 유아원생들도 조숙해져서 ‘사랑한다’고 언약식을 하기도 하고 부모들끼리 예비 사돈 모임도 갖는다고 한다. 밸런타인데이에는 초콜릿을 사들고 가는 초등학생들이 수두룩하다. 사랑엔 국경도 나이도 없지만 워낙 정보와 상품이 넘치다보니 사랑도 너무 흔해지고 욕구와 표현 과잉의 시대가 된 것 같다. 또 사랑은 껌처럼 흔해졌지만 혼자 가슴 졸이고 밤새워 편지 쓰고 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순정을 보여주는 이들은 드물어졌다. 사랑도 싸구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나보다.

유인경씨는…
중년의 사랑, 순정은 어디에?
경향신문에서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 편집위원. 얼마 전 ‘대한민국 남자들이 원하는 것’을 펴낸 뒤 KDI, 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 등 ‘아저씨’들이 많은 곳에서 강의 초빙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그의 홈페이지(www.soodasooda.com)에 가면 그의 다른 칼럼들을 읽어볼 수 있으며 진솔한 대화도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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