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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궁금한 사람

역사추리소설 ‘열녀문의 비밀’ 펴낸 작가 김탁환

“10년 후 내 딸들이 여자로서의 삶을 고민할 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썼어요”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김성남 기자

2005. 08. 02

현재 KBS에서 방영 중인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원작자 김탁환 한남대 교수가 최근 새로운 역사추리소설 ‘열녀문의 비밀’을 펴냈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져 화제를 모으는 그를 만나 소설 뒷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역사추리소설 ‘열녀문의 비밀’ 펴낸 작가 김탁환

“혼자걷고 혼자 밥 먹고 혼자 그림자 밟으며 이 소설을 썼다. 백탑파 시리즈를 격년으로 펴내겠다는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켜 다행이다.”
인기리에 방영 중인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원작자인 한남대 문예창작과 김탁환 교수(37). 그가 정조 대왕 초기 연쇄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개혁과 수구 세력 사이의 암투를 그린 ‘방각본 살인사건’에 이어 2년 만에 백탑파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열녀문의 비밀’을 펴냈다.
‘백탑파(白塔派)’란 영·정조 시대 탑골 백탑(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10층석탑) 아래 모여 시문을 공부하던 지식인 그룹으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등이 핵심 인물이라고 한다. 이들 중 다수가 서얼(서자와 그 자손)이라는 신분의 한계로 출세 길이 막혔기에 당시 연경(북경)을 통해 서구 과학과 신문물을 접하며 유교사회의 혁신을 꿈꿨다고. 김 교수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백탑파 시리즈를 2년마다 펴내 최소한 다섯 편의 이야기를 열 권으로 완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정조 때는 근대 문물이 유입되고 근대적 각성이 이뤄진 시대였어요. 그 속에서 새 시대를 꿈꾸었던 역동적이고 활달한 실학자들을 한 작품에 풀어놓기엔 너무 방대했어요. 그래서 시대의 여러 측면과 인물들을 차례로 조명하는 연작을 계획하게 됐죠.”
역사추리소설 ‘열녀문의 비밀’ 펴낸 작가 김탁환

“조선시대 가장 강력한 개혁이 시도됐던 정조 때 젊은 지식인들에게 매혹됐다”는 그를 만나기 위해 대전 한남대를 찾았을 때 그의 소설을 읽으며 샤프하면서도 중후한 사람일 거라는 예상이 빗나갔음을 알았다. 쑥스럽게 첫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순박한 시골 청년 같았다. 생각했던 것과 분위기가 다르다고 하자 그는 뜬금없이 “작가는 다중인격자”라고 말한다.
“작가의 안에는 수많은 캐릭터가 존재해요. 제 소설 ‘불멸의 이순신’에는 총 1백30명의 인물이 나오는데, 그것은 곧 제 안에 1백30명이 들어있다는 거죠. 참, 저 수염 깎으면 진짜 소년 같다고들 해요(웃음).”
그런데 결코 수염을 깎을 생각이 없다고 한다. 수염은 그에게 부적 같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2003년 겨울, ‘불멸의 이순신’을 개작할 때였는데 슬럼프가 왔어요. ‘이러다 죽겠다’ 싶을 만큼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었어요. 제가 고통스러워하니까 누가 스타일을 바꿔보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수염을 길렀는데 거짓말처럼 그때부터 글이 술술 풀렸어요. 그 후 ‘불멸의 이순신’도 잘 되고 백탑파 연작도 두 편이나 내고…. 모든 게 순탄하게 잘 되니까 이젠 수염을 깎기가 두려워요.”
그는 수염 덕분에 이번 소설도 잘되길 바란다며 소년 같은 미소를 지었다.
연암 박지원의 글 ‘열녀 함양 박씨전’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이번 소설 ‘열녀문의 비밀’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한 열녀의 삶과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역사추리소설 ‘열녀문의 비밀’ 펴낸 작가 김탁환

방각본 살인사건을 해결한 지 6년이 지난 1784년, 야소교도(예수교도) 쫓기에 바쁜 의금부도사 이명방에게 특명이 내려진다. 규장각의 젊은 학자 김진과 함께 경기도 적성으로 내려가 열녀 김아영에 얽힌 의혹을 밝혀내라는 것.
병약한 남편을 여의고 2년간 열심히 일해 시가의 가세를 일으킨 후 자결했다는 김아영의 행적에 대한 수사를 하면서 두 사람은 김아영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김아영은 농기구를 개량하고 집안의 노비들을 교육하며 생산을 독려했을 뿐만 아니라 상업을 배우기도 하는 등 시대를 한참 앞서간 여인이었던 것. 두 사람은 ‘이토록 치열했던 여인이 남편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자살했겠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고 진실을 추적해나간다.

‘열녀문의 비밀’은 10년 뒤 내 딸들이 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써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진실은 윤곽을 드러낸다. 자유로운 사고를 가졌던 김아영은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인물이었고,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당대의 규범이 그녀를 비참한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물론, 이것이 끝은 아니다. 소설 말미에는 반전도 숨어 있다.
“역사엔 항상 긍정적 발전과 이에 대한 반동이 동시에 존재해요. 청나라를 통해 새 문물과 근대적 요소들이 들어오면서 동시에 반동적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그중 하나가 윤리 기강을 바로 세우는 것, 열녀를 강화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천주교도이면서 열녀인 여성을 내세워 시대 속에 대립됐던 두 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고 했어요. 동시에 시대를 돌파하려 했던 여성들과 이들의 감춰진 에너지를 드러내려고 했고요.”
전작 ‘방각본 살인사건’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작중 김아영과 기생 계목향이 공동 창작한 소설 속의 소설 ‘별투색전’을 등장시킨다. ‘별투색전’은 ‘사씨남정기’나 ‘소현성록’ 등 그 이전에 나온 소설의 여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여 누가 더 나은가를 겨루는 내용.
이에 대해 그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인데, ‘나, 황진이’에 이어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열(烈)이라는 개념을 통해 들여다보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원래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이 조금 있었는데, 딸 둘을 키우면서 더 많은 관심이 생겼다고 한다.
“여덟 살과 다섯 살 된 딸 둘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10년 후에 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어요. 그래서 책머리에도 ‘10년 후, 예영과 문영에게’라고 썼죠. 딸 예영이와 문영이가 자라 이 다음에 여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할 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김아영과 계목향처럼 진취적인 여성으로 살길 바라요.”
그가 ‘열녀문의 비밀’을 생각해낸 것은, 3년 전 제주 바닷가에서였다고 한다.
“3년 전, 지도교수로서 학생들 수학여행을 따라 제주도에 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저만 남겨놓고 학생들이 모두 어디론가 놀러나가 한낮에 홀로 바닷가에서 맥주 캔을 홀짝거리는데, 갑자기 영감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는 전부터 열녀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었지만 추상적인 생각에 그쳤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신기할 정도로 모든 게 구체적으로 떠올랐다는 것. 넘실대는 제주 바다에서 김아영과 계목향이란 주인공을, 그리고 유교와 천주교의 충돌이란 아이디어를 건져올린 그는 소설을 탈고한 후 가족과 함께 그 바닷가를 다시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네 덕분에 소설 잘 썼노라”고 인사하고 돌아왔다고.
그는 보통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1백50권 정도의 책을 읽는데, 책값만 1백만 원 정도 든다고 한다. 그렇게 풍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하기에 그가 창조해낸 인물들의 초상과 당대 사회는 장면마다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은 완성되기도 전에 TV나 영화계의 관심을 끈다.

“교양을 담은 소설들이 다시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
대하소설 ‘불멸의 이순신’이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서포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다룬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은 KBS의 ‘HD TV문학관 100선’을 통해 올 11월 중 방송될 예정이며, ‘방각본 살인사건’도 시나리오 작업이 끝나 곧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열녀문의 비밀’도 곧 영화기획사와 계약을 할 예정이라는 그는 자신의 소설이 활발하게 영상으로 옮겨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 “애초에 소설을 쓸 때 영상화를 고려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원작자로만 만족하지 않는 그는 지난 6개월 동안 30년대부터 6·25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로맨스를 직접 시나리오로 써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살짝 귀띔해준다. 이야기꾼으로서의 그의 열정과 욕심이 정말 대단한 셈이다.
그는 지금까지 독자들이 편안하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역사추리소설을 주로 내놓았다.
“90년대 이후 소설에서 교양이 많이 약해지더군요. 하지만 소설 읽는 재미야말로 교양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역사소설을 쓰고 있지요. 교양을 담은 소설들이 다시 부활했으면 싶어요.”
그가 역사소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는 것은 서울대 대학원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부하는 동안 문학사 곳곳에 이야기 재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음을 깨달으면서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강해졌다고 한다. 그는 “고전문학을 공부한 소설가는 아직 나 하나 밖에 없을 것”이라며 자신을 ‘문학계의 돌연변이’라고 말한다.
10년 전, 연구자와 소설가 사이에서 방황하다 결국 ‘창작’을 선택했다는 그는 지금까지 11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모두 여러 권짜리 장편이라 권수로 따지면 33권이나 된다. 이런 다작은 그의 철저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날마다 2백자 원고지 20장씩을 꼬박꼬박 쓴다는데, 이것은 3년 정도 쓸 소설들을 계산기로 두들겨 나눈 분량이라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이야기꾼으로 장인이 되기 위해 저 스스로 고립되려고 노력했어요. 그렇게 해서 제가 얻은 것은 ‘소설’이요 잃은 것은 ‘전부’예요. 청춘도 친구도 희망도 기억도 곁에 없죠. 가끔은 어떡하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싶을 때도 있지만, 후회는 안 합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기적이란 없는 거니까요(웃음).”
‘전부’를 내주고 그가 바라는 기적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독자들이 자신의 소설을 읽고 각자의 인생을 찬찬히 되돌아보았으면 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참 소박하고, 어찌 보면 참 대단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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