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유학 무전무학(有錢有學 無錢無學)’이라는 말이 있다. 부잣집 자녀들은 부모의 도움을 받아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만, 가난한 집 아이들은 꿈을 펼칠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 채 사회의 낙오자가 되기 일쑤인 세태를 꼬집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가난해서 성공할 수 없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인 검사들을 지휘 감독하는 총책임자, 검찰총장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할 만큼 어려운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인간 승리’의 주인공은 지난 4월 34대 검찰총장으로 취임한 김종빈 총장(57)이다.
김 총장의 프로필에 고향은 전라남도 여수로 돼 있다. 하지만 실제 그가 나고 자란 곳은 여수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40km 이상 떨어진 해안 마을 ‘장등’이라고 한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도로가 뚫리지 않아 연락선을 타고 1시간 넘게 뱃길을 헤쳐야만 들어갈 수 있던 이 ‘깡촌’에서 김 총장은 동네 20여 가구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집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때 종빈이네 집 재산이라고는 밭 6백 평 있는 게 전부였어요. 마을 전체가 가난했지만, 그 집은 우리가 봐도 ‘너무 불쌍하다’ 싶게 어려웠죠. 밥 대신 늘 고구마나 보리 삶은 걸 먹었고, 도시락도 싸오는 걸 본 기억이 없어요. 하지만 참 반듯하고 공부를 잘했죠. 선생님들이 다 예뻐했어요.”
김 총장의 초등학교 1년 선배인 김현오씨(58)는 어린 날의 김 총장을 “착하고 똑똑해서 매년 급장, 부급장을 도맡아하던 아이”로 기억했다. 집은 어려웠지만 초등학교 시절 김 총장은 형, 누나와 함께 바다낚시 다니기를 좋아하고, 해거름까지 연을 날리며 뛰어 노는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특별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성적은 늘 1등이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똑똑한’ 막내아들을 제대로 뒷바라지할 수 없는 현실에 마음 아파하던 김 총장의 부모가 그를 여수의 한 보육원에 보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종빈이 어머니가 아는 사람을 통해 보육원에 가면 공짜로 밥도 먹여주고, 중학교도 보내준다는 얘기를 들었나봐요. 집에서 고생시키느니, 차라리 보육원에 보내는 편이 낫겠다 생각한 거죠. 그 집은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형, 누나들 가운데 중학교에 간 사람이 없었거든요.”
김 총장의 고향 이웃 주민은 “고아만 받아주는 보육원에 어떻게 종빈이가 들어갈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시 그 집으로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보육원에서 중학교 마쳐
이런 사실은 김 총장의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지난 3월 말 검찰총장 인준을 위한 국회 인사청문회 당시 공개된 김 총장의 생활기록부 보호자란에는 부친인 고 김태석씨 대신 ‘박이래’라는 낯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 박씨는 60년대에 여수시 관문동에서 보육원을 운영했던 인물이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 시절, 부모 형제를 떠나 ‘고아’와 같은 생활을 해야 했던 김 총장의 중학교 시절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담임교사는 생활기록부의 의견란에 “…보육원에 있기 때문에 약간 기가 없는 것 같으나, 교과 면이 탁월하게 좋으며 뛰어남”이라고 적어놓았다. 2학년 담임교사의 평가도 “침착하고 착실하며 통솔력이 있으며 매사 좋으나 환경이 좋지 못함”으로 되어 있다.
어려운 환경을 잊기 위해 더 공부에 매달렸을 김 총장은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뒤 보육원을 나와 여수 시내에서 입주 가정교사로 일하며 학업을 이어갔다고 한다. 김 총장의 한 고등학교 동창은 “당시 여수에는 ‘여수제면’이라는 상점이 있었는데, 종빈이가 그 집에 살면서 아이를 가르치던 게 기억난다”며 “종빈이는 3년 내내 가정교사로 일하면서도 늘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고 회상했다.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남달랐던 김 총장의 어머니는 농사짓는 틈틈이 바닷가에 가서 파래나 미역을 뜯어다 팔고 각종 행상과 날품팔이를 하며 아들을 뒷바라지했지만 비싼 학비를 대기는 역부족이었다고. 그래서 김 총장은 늘 주경야독하며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김 총장은 이 같은 성실함 덕에 고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돌파하곤 했다. 67년 대학입시에서 고려대 법학과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하려 했을 때의 일. 사정을 알게 된 고등학교 은사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그토록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렇게 대학을 포기할 수는 없다”며 등록금 모금에 나섰다. 이 ‘사건’은 당시 지역 신문에 실릴 만큼 화제를 모았고, 결국 김 총장은 지역민들이 모아준 십시일반의 성금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난한 가정환경을 딛고 검찰총장 자리에 오른 김종빈 총장(가운데)이 대검 간부들과 함께 청사를 나오고 있다.
김 총장의 사법시험 동기이며 오랜 친구인 한 변호사는 “김 총장은 대학시절에도 계속 가정교사를 하는 등 스스로 돈을 벌면서 공부했다. 지금 부인은 그때 가르친 제자 가운데 한 명”이라고 귀띔했다.
이처럼 남다른 노력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김 총장은 78년 이후 27년간 검찰에 몸담아 오는 동안 기획과 수사 분야의 전문가라는 평을 들어왔다. 대검 중수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2년 김대중 전 대통령 차남인 홍업씨 등을 구속하며 동교동계 비리를 밝혀내는 수사를 지휘해 이름을 알렸고, ‘이용호 게이트’ 수사를 맡아 검찰 선배인 신승남 전 검찰총장과 김대웅 전 광주고검장을 소환 조사하며 ‘칼날 검사’의 위용을 보이기도 했다. 2003∼2004년 대검 차장 시절에는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맡았는데, 과로로 인해 왼쪽 눈 실핏줄이 터져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하자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이 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수사 자문을 구했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능력 있는 검사에서 검찰총장으로 변신한 김 총장의 행보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73년 제15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고향에 내려와 “이제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법률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던 김 총장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는 고향 선배 김현오씨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김 총장이 서민들의 편에 서서 생각하는 훌륭한 검찰총장이 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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