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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인생

“보육원에서 자라 사시 합격” 김종빈 검찰총장 숨은 성공 스토리

■ 글·송화선 기자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5. 05. 31

지난 4월 취임한 김종빈 검찰총장이 끼니조차 제대로 잇기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끊임없는 노력으로 오늘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극심한 가난 탓에 부모 손을 떠나 보육원에서 자라야 했던 어린 시절과, 가정교사 자리를 전전하며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 마침내 고시에 합격하기까지의 감동 스토리 전격 공개.

“보육원에서 자라 사시 합격” 김종빈 검찰총장 숨은 성공 스토리

‘유전유학 무전무학(有錢有學 無錢無學)’이라는 말이 있다. 부잣집 자녀들은 부모의 도움을 받아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만, 가난한 집 아이들은 꿈을 펼칠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 채 사회의 낙오자가 되기 일쑤인 세태를 꼬집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가난해서 성공할 수 없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인 검사들을 지휘 감독하는 총책임자, 검찰총장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할 만큼 어려운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인간 승리’의 주인공은 지난 4월 34대 검찰총장으로 취임한 김종빈 총장(57)이다.
김 총장의 프로필에 고향은 전라남도 여수로 돼 있다. 하지만 실제 그가 나고 자란 곳은 여수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40km 이상 떨어진 해안 마을 ‘장등’이라고 한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도로가 뚫리지 않아 연락선을 타고 1시간 넘게 뱃길을 헤쳐야만 들어갈 수 있던 이 ‘깡촌’에서 김 총장은 동네 20여 가구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집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때 종빈이네 집 재산이라고는 밭 6백 평 있는 게 전부였어요. 마을 전체가 가난했지만, 그 집은 우리가 봐도 ‘너무 불쌍하다’ 싶게 어려웠죠. 밥 대신 늘 고구마나 보리 삶은 걸 먹었고, 도시락도 싸오는 걸 본 기억이 없어요. 하지만 참 반듯하고 공부를 잘했죠. 선생님들이 다 예뻐했어요.”
김 총장의 초등학교 1년 선배인 김현오씨(58)는 어린 날의 김 총장을 “착하고 똑똑해서 매년 급장, 부급장을 도맡아하던 아이”로 기억했다. 집은 어려웠지만 초등학교 시절 김 총장은 형, 누나와 함께 바다낚시 다니기를 좋아하고, 해거름까지 연을 날리며 뛰어 노는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특별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성적은 늘 1등이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똑똑한’ 막내아들을 제대로 뒷바라지할 수 없는 현실에 마음 아파하던 김 총장의 부모가 그를 여수의 한 보육원에 보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종빈이 어머니가 아는 사람을 통해 보육원에 가면 공짜로 밥도 먹여주고, 중학교도 보내준다는 얘기를 들었나봐요. 집에서 고생시키느니, 차라리 보육원에 보내는 편이 낫겠다 생각한 거죠. 그 집은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형, 누나들 가운데 중학교에 간 사람이 없었거든요.”
김 총장의 고향 이웃 주민은 “고아만 받아주는 보육원에 어떻게 종빈이가 들어갈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시 그 집으로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보육원에서 중학교 마쳐
이런 사실은 김 총장의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지난 3월 말 검찰총장 인준을 위한 국회 인사청문회 당시 공개된 김 총장의 생활기록부 보호자란에는 부친인 고 김태석씨 대신 ‘박이래’라는 낯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 박씨는 60년대에 여수시 관문동에서 보육원을 운영했던 인물이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 시절, 부모 형제를 떠나 ‘고아’와 같은 생활을 해야 했던 김 총장의 중학교 시절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담임교사는 생활기록부의 의견란에 “…보육원에 있기 때문에 약간 기가 없는 것 같으나, 교과 면이 탁월하게 좋으며 뛰어남”이라고 적어놓았다. 2학년 담임교사의 평가도 “침착하고 착실하며 통솔력이 있으며 매사 좋으나 환경이 좋지 못함”으로 되어 있다.

“보육원에서 자라 사시 합격” 김종빈 검찰총장 숨은 성공 스토리

어려운 환경을 잊기 위해 더 공부에 매달렸을 김 총장은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뒤 보육원을 나와 여수 시내에서 입주 가정교사로 일하며 학업을 이어갔다고 한다. 김 총장의 한 고등학교 동창은 “당시 여수에는 ‘여수제면’이라는 상점이 있었는데, 종빈이가 그 집에 살면서 아이를 가르치던 게 기억난다”며 “종빈이는 3년 내내 가정교사로 일하면서도 늘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고 회상했다.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남달랐던 김 총장의 어머니는 농사짓는 틈틈이 바닷가에 가서 파래나 미역을 뜯어다 팔고 각종 행상과 날품팔이를 하며 아들을 뒷바라지했지만 비싼 학비를 대기는 역부족이었다고. 그래서 김 총장은 늘 주경야독하며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김 총장은 이 같은 성실함 덕에 고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돌파하곤 했다. 67년 대학입시에서 고려대 법학과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하려 했을 때의 일. 사정을 알게 된 고등학교 은사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그토록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렇게 대학을 포기할 수는 없다”며 등록금 모금에 나섰다. 이 ‘사건’은 당시 지역 신문에 실릴 만큼 화제를 모았고, 결국 김 총장은 지역민들이 모아준 십시일반의 성금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보육원에서 자라 사시 합격” 김종빈 검찰총장 숨은 성공 스토리

가난한 가정환경을 딛고 검찰총장 자리에 오른 김종빈 총장(가운데)이 대검 간부들과 함께 청사를 나오고 있다.


김 총장의 사법시험 동기이며 오랜 친구인 한 변호사는 “김 총장은 대학시절에도 계속 가정교사를 하는 등 스스로 돈을 벌면서 공부했다. 지금 부인은 그때 가르친 제자 가운데 한 명”이라고 귀띔했다.
이처럼 남다른 노력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김 총장은 78년 이후 27년간 검찰에 몸담아 오는 동안 기획과 수사 분야의 전문가라는 평을 들어왔다. 대검 중수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2년 김대중 전 대통령 차남인 홍업씨 등을 구속하며 동교동계 비리를 밝혀내는 수사를 지휘해 이름을 알렸고, ‘이용호 게이트’ 수사를 맡아 검찰 선배인 신승남 전 검찰총장과 김대웅 전 광주고검장을 소환 조사하며 ‘칼날 검사’의 위용을 보이기도 했다. 2003∼2004년 대검 차장 시절에는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맡았는데, 과로로 인해 왼쪽 눈 실핏줄이 터져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하자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이 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수사 자문을 구했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능력 있는 검사에서 검찰총장으로 변신한 김 총장의 행보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73년 제15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고향에 내려와 “이제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법률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던 김 총장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는 고향 선배 김현오씨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김 총장이 서민들의 편에 서서 생각하는 훌륭한 검찰총장이 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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