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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화제의 얼굴

작고한 남편 뒤이어 같은 지역에서 국회의원 당선된 김선미

■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박진숙 ■ 사진·박해윤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4. 05. 10

2년 전 갑작스럽게 사망한 남편 고 심규섭 의원을 대신해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했던 김선미씨가 이번 총선에서 남편의 금배지를 되찾아 화제다. 약국을 운영하며 두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주부였던 그가 남편의 못 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가슴 찡한 사연.

작고한 남편 뒤이어 같은 지역에서 국회의원 당선된 김선미

“여보, 이제야 당신이 못 다한 일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어요. 앞으로 당신을 생각하면서 더욱 열심히 일 할께요. 사랑해요.”
17대 총선이 끝난 다음날인 4월16일, 경기도 안성에서 김선미 국회의원 당선자(43)는 남편의 무덤을 찾아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그의 남편은 2년 전 작고한 고 심규섭 의원. 심의원은 2000년 16대 총선 때 안성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3선 중진의원인 이해구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돼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2002년 1월 코골이 수술이라는 가벼운 수술을 받다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
“남편이 그렇게 갑자기 제 곁을 떠날 줄 몰랐어요. 가벼운 수술이었거든요. 수술 후 갑작스런 출혈로 생사를 오갈지 상상이나 했겠어요. 수술을 받기 이틀 전쯤 남편이 갑자기 저에게 ‘나를 사랑하냐’고 물었어요. 평소와 다른 남편의 진지한 행동이 이상해서 장난스럽게 ‘싫어한다’고 대답했는데, 그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어요.”
남편을 어루만지듯 무덤에 손을 얹어 쓰다듬던 그의 눈에 어느새 물기가 가득했다.
“허망하게 남편을 보낸 후 살아남은 제가 남편에게 뭔가 해주고 싶었어요. 그 무렵 국회에 가서 남편의 유품을 정리했는데 남편이 못 다한 일이 너무 많더군요. 문득 남편을 거짓말쟁이로 만들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남편이 국민들에게 국회의원이 되면 꼭 이루겠다고 약속했던 일을 제가 대신하기로 마음먹게 된 거죠.”
그는 남편을 대신해 2002년 8월 치러진 보궐선거에 출마했지만 이해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고 말았다. 남편의 뜻을 잇겠다는 꿈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은 시아버지였다. 칠순의 시아버지는 그를 대신해 “죄송하다. 이렇게 끝까지 지켜봐주어서 감사하다”며 찾아온 이들에게 일일이 ‘낙선사례’를 했다. 아들의 뜻을 잇겠다는 며느리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준 시아버지는 선거를 치르는 동안 젊은이 못지않게 적극적인 지원유세를 펼쳤다고 한다. 그에게 시아버지는 영원한 지지자이자 마음 든든한 동지였다.
시아버지의 후원에 힘입어 그는 꾸준한 표밭갈이를 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선거기간 동안 농촌 들녘 곳곳을 누비느라 신발을 세 켤레나 바꿔신었을 정도. 특히 약사 출신이라는 이점을 활용해 경로당과 노인정 등을 돌며 노인질환의 처방을 내놓는 ‘대장금’식 선거운동을 벌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안성은 보수성이 강한 농촌지역이라 ‘미망인’이 정치를 한다며 곱지않게 보는 시선도 많았다. ‘남편의 한풀이가 아니냐’는 비난섞인 말부터 ‘여자가 뭘 하겠어’ ‘저러다 그만 두겠지’라는 말까지 들어야했다.
“남편이 없어서 이런 멸시를 받는구나, 싶어서 많이 속상했어요. 속으로 울기도 많이 울었죠. 하지만 언젠가는 제 진심이 통하리라는 믿음으로 열심히 했어요. 솔직히 지난 보궐선거 때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서, ‘내 남편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다’라는 것만을 보여주기 위해서 뛰었어요. 그런데 보궐선거 후에 생각이 달라졌어요. 그동안 주민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국민들이 바라는 좋은 정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거죠.”

작고한 남편 뒤이어 같은 지역에서 국회의원 당선된 김선미

김선미 당선자는 국회의원 당선이 확정된 후 제일 먼저 남편(심규섭)의 산소를 찾아 당선 사실을 알렸다.


그는 숙명여대 약대 학생회장을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의 낡은 정치풍토를 깨는 작업에 앞장섰다. 우선 돈 안 드는 정치를 하기 위해 ‘조직’을 없앴다. 대도시도 아니고 ‘지연·혈연 의식’이 강한 농촌지역인 안성에서 ‘조직’을 포기한다는 것이 무모할 수 있지만 그는 직접 지역 구석구석을 돌았다. ‘진심은 통한다’고 했던가. 서서히 유권자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성장터에 거의 매일 선거운동을 나갔는데 그곳에서 번데기를 파는 상인 한 분이 따뜻하게 데운 보약 한 봉지를 내미시는 겁니다. 그분이 먹던 보약인데 절 하루 종일 기다렸다면서 먹고 힘내라고 격려해주셨어요. 행여 식을세라 번데기 속에 넣어서 데워주셨는데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코끝이 찡해지더군요.”
때마침 여성계에서 그를 ‘꼭 국회에 진출해야 할 여성후보’중 한명으로 선정, 힘을 북돋워주었다. 이로인해 인지도가 올라갔음은 물론이다. 결국 그는 이해구 의원과 다시 맞붙어 남편의 금배지를 되찾아오는 데 성공했다.
“사실 국회의원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교수가 되고 싶어서 결혼 후에도 약국운영과 박사공부를 병행했어요. 그런데 결혼 5년째 되던 해에 갑자기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셔서 모든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약국도 더 이상 할 수 없었고요. 시아버지께서 당시 교육위원으로 활동하셨던 터라 아버님 뒷바라지를 해야 했거든요. 처음에는 그 일이 무척 힘들었어요. 하지만 나중엔 2백명 정도의 손님상도 혼자서 거뜬히 차려낼 정도로 잘 하게 됐죠.”
85년 결혼한 그는 시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동안 오붓한 부부만의 시간 한번 제대로 갖지 못했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그러다가 2000년, 평소 정치에 뜻을 뒀던 남편의 뒷바라지까지 도맡게 되면서 ‘전업주부’의 역할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한창 남편의 선거운동을 따라다닐 때는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도 쉬지않고 발이 부르틀 정도로 주민들을 만나러다녔다. 뿐만 아니라 남편이 국회의원이 된 후에는 남편을 대신해 지역관리를 하면서 사람들의 의견을 남편에게 전달하는 ‘남편의 분신’처럼 지냈다.
작고한 남편 뒤이어 같은 지역에서 국회의원 당선된 김선미

생전의 심규섭 전의원 모습.


“남편이 국회의원에 출마한다고 했을 때 처음엔 반대했어요. 나만의 남편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었죠. 나중에는 남편이 원하는 일을 하도록 제 고집을 꺾고 적극적으로 밀어줬어요. 그런 절 보고 남편은 늘 희생만 한다며 안쓰럽게 생각했어요. 저는 저대로 남편을 편하게 살도록 하고 싶어서 잔소리 한번 하지 않았죠. 그래서 남편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나 봐요. 절 지탱해줄 버팀목이 없어진 것 같고, 특히 아이들에게 아빠 자리를 어떻게 채워줘야 하는지 막막하더군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게 이야기하던 그였지만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자 금세 목이 메어왔다. 그는 훌쩍 커서 어느새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아들과 초등학교 3학년인 딸에게 가장 미안하다고 했다. 2년 전, 정치에 뛰어들겠다는 엄마를 가장 심하게 말렸던 사람이 바로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빠를 잃은 지 얼마되지 않은 상태에서 엄마마저 잃을 것 같아 불안했던 것. 한창 엄마 손이 필요했던 시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들의 바람을 무시한 채 정치에 뛰어든 엄마를 아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아들을 이해시키기까지 꼬박 1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다못해 제가 ‘네가 그렇게 싫으면 엄마는 선거 안 나가도 돼’ 라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아이가 반색을 하며 ‘왜? 힘들어? 하기 싫어?’ 하더라고요. 그렇지는 않다고 하니까 아이가 ‘그럼 동생은 내가 돌볼 테니까 걱정말고 잘 하라’고 하더군요. 자기도 이젠 다 컸다면서.”

작고한 남편 뒤이어 같은 지역에서 국회의원 당선된 김선미

김씨는 자신의 출마가 ‘죽은 남편의 한풀이 출마가 아니냐’는 시선을 받을 때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그가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사이 아들은 어느새 어른처럼 의젓해진 것이다. 이제 아들은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지원군이다. 지난 2월에 열린 당내 경선에서 그가 일등을 했다는 발표가 나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와 품에 안기며 감격의 눈물을 흘린 사람도 아들이었다.
“다른 후보들은 아내가 같이 다니는데, 저는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니까 ‘엄마가 불쌍하다’며 울더군요. 아이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국회의원 선거 때는 아들이 울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 더욱 당당하게, 자신감있게 선거운동을 했어요.”
국회의원 선거 당일 날, 아들은 안성 끝자락에 있는 사회복지시설로 자원봉사를 나갔다고 한다. 투표를 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 엄마를 알리고, 투표율도 높일 나름의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복지시설에 있는 사람들이 엄마인 김선미씨보다는 상대후보에 대한 이야기만 하자 불안한 마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아들은 “걱정된다, 엄마 괜찮냐”고 말하며 울먹였고, 결국 김 당선자도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는데 아들을 또 울려서 미안할 뿐이에요. 저처럼 엄마 노릇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결혼 초부터 지금까지 집안일이다, 선거다 하면서 아이들이 꼭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지 못했으니까요. 둘째아이는 초등학교 입학할 당시에 한글도 떼지 못하고 들어갔어요. 막 한글 공부를 가르쳐야 할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나서 몇 달 동안 정신없이 살다보니까 시기를 놓쳤던 거예요. 학교 입학한 후 받아쓰기 시험만 보면 40점, 50점을 받아오는데 정말 속상하더군요.”
그랬던 딸도 지금은 무엇이든 스스로 척척 챙기는 아이로 자랐다. 공부도 따라잡아 이제는 엄마의 시름도 덜어주고 있다. 하지만 어디 엄마 마음이 그런가.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딸을 보면 마음이 더 아프다고 한다.
“제가 아이의 식사를 챙겨주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딸아이가 제 밥을 챙겨줘요. 잠잘 때도 제 이불부터 덮어주고요.”
그에게 있어 남편의 빈자리를 아이들이 채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저는 ‘엄마’가 아니라 ‘부모’예요. 아빠의 몫까지 보듬어주어야 하니까요. 앞으로는 당당한 모습만 보여줄 작정입니다. ‘심규섭 아내’라는 꼬리표도 떼야지요. 그리고 저처럼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고 어린 아이들을 힘겹게 키우는 여성들을 위해 앞장설 생각이에요.”
남편의 뒤를 이어 자신의 노력만으로 당당히 국회의원이 된 김 당선자. 그는 지금 종착지가 아니라 새로운 출발선에 다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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