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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10년 무명생활과 희귀병 발병, 부부 사랑으로 극복한 트로트 가수 정삼 부부

■ 글·최희정 ■ 사진·홍중식 기자

2004. 04. 12

최근 ‘미쓰 리’란 재미있는 노래로 인기를 얻고 있는 가수 정삼은 망막혈종이란 희귀병을 앓고 있다. 그는 10년 동안의 무명생활 끝에 겨우 인기를 얻으려는 순간 그만 희귀병을 앓게 돼 좌절하기도 했지만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로 다시 무대에 섰다. 이들의 진한 부부애를 취재했다.

10년 무명생활과 희귀병 발병, 부부 사랑으로 극복한 트로트 가수 정삼 부부

트로트 가수 정삼(33·본명 정훈)은 요즘 들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TV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랴, 신곡 녹음하랴…, 제때 끼니를 챙겨 먹지 못할 때가 많다. 차안에서 새우잠을 잘 때도 있다. 그래도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1집 앨범을 낸 것이 92년이었으니 무명생활 10여년 만에 찾아온 ‘대박’같은 행운이 그저 꿈같기 때문이다. 모두 아내 김유리씨(32) 덕분이다.
MBC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던 김씨는 남편을 돕기 위해 지난 1월 무용단 일을 그만두었다. 20년 동안 공들여왔던 무용인의 길을 포기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의외로 김씨의 표정은 담담하다.
“저보다 예술적인 끼가 더 많은 사람인데 저를 위해 자기 꿈을 포기한 거지요. 아내가 없었다면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자꾸 아내 것을 빼앗는 것 같아 그저 미안할 따름이에요.”
두 사람이 무명의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며 알콩달콩 살아가는 사연은 지난해 여름 KBS ‘인간극장’에 소개돼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방송을 본 후 “하는 일마다 잘 안돼 상심하고 있었는데 둘이 사는 모습을 보고 힘을 얻었다” “앞으로 나오는 앨범은 모두 사겠다”는 등 격려를 보내왔다. 특히 월드컵스타 이운재 선수가 직접 전화를 걸어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할 때는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오늘이 있기까지 설움도 많았다. TV에 출연 시켜주겠다는 말만 믿고 목돈을 건넸다가 떼이고, 앨범을 만들어주겠다던 사람이 돈만 챙긴 뒤 잠적해버리는 일들을 겪으면서 살던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다른 가수가 한달에 5백만원 받고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 그는 15만원만 받아도 황송했다. 그나마 TV 무대에 한번 서보지 못한 무명가수인 그에게 선뜻 무대를 내주는 곳은 많지 않았다.
“낮에라도 돈을 벌려고 중고트럭을 사서 포장마차를 하기도 했지만 텃세가 심해 오래 하지 못했어요. 덤핑물건을 잡아 장사도 해봤지만 오히려 손해만 봤고요. 아내가 나중에는 ‘그냥 집에 가만히 있으면서 노래 연습을 하는 게 자기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정삼은 늘 아내에게 빚진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하지만 김씨는 남편 때문에 살맛이 난다고 한다.
“낮에는 방송국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포장마차를 할 때도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새벽까지 장사하다 보니 잠이 늘 부족했고, 너무 힘들어 춤을 추다 코피도 여러번 쏟았는데도요. 남들처럼 아기 낳고 집을 사기 위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오빠에게 새 앨범을 만들어주고 싶어 열심히 일했어요. 오빠를 꼭 한번만이라도 TV 무대에 서게 하고 싶었죠.”
사기를 당하고 몇 차례 장사에 실패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김씨는 악착같이 1천만원을 모아 남편의 세번째 앨범을 만들어주었다.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노래 ‘미쓰 리’는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재미있는 노래 가사에 쿵짝거리는 반주지만 그 안에는 그들 부부의 눈물과 한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삼은 기획사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매니저도 없었기에 그동안 앨범이 나오면 그냥 묻혀졌다. 그래서 이번엔 김씨가 만사를 제쳐두고 방송국 PD들을 찾아다니며 적극적인 홍보를 펼쳤다. 그 때문인지 차츰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TV 출연 요청이 오는가 하면 밤업소에서 서로 출연해달라고 했다.

10년 무명생활과 희귀병 발병, 부부 사랑으로 극복한 트로트 가수 정삼 부부

데뷔 10년 만에 ‘미쓰 리’라는 트로트곡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정삼과 부인 김유리씨.


그런데 이제 막 행복이 시작되려는 그들에게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터졌다. 지난해 8월이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왼쪽 눈이 뿌옇게 안 보이더라고요. 처음에는 방송 스튜디오 조명이 너무 강해 눈이 아픈가 보다고 생각하고 일주일 동안 안약만 넣었어요. 그런데 점점 사물이 안 보이는 거예요. 잘 안보이니까 어지럽기도 하고.”
안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단순한 증상이 아닌 것 같아 병원에 가서 종합검사를 받았다. ‘망막혈종’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망막혈종은 망막에 있는 혈관에 주름이 잡히는 병으로 1만명 중에 1명 정도 걸리는 희귀병이다. 문제는 원인도 알 수 없고 뾰족한 치료방법도 없다는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수술을 했어요. 의사도 수술을 하면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해도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는 않을 거라고 하더군요.”
예전처럼 완벽하지는 못해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겠지 하는 한줄기 희망을 갖고 수술을 받았지만 그의 병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나 물건이 찌그러져 보여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운전도 할 수 없고 계단을 올라갈 때는 손발을 모두 사용해 더듬거리며 올라가야 한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무대 위에 설치한 화려한 조명이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조명만 켜지면 세상이 빙빙 돌아가는 것 같다고 한다.
10년 무명생활과 희귀병 발병, 부부 사랑으로 극복한 트로트 가수 정삼 부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로지 무대에 서기 위해 지난 10년 동안 남모르게 흘렸던 땀과 눈물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고 마이크를 잡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자신의 병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는 현실이 암담하기만 했다.
하지만 김씨는 남편이 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곁에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왕 남편의 매니저를 하기로 한 이상 남편의 손과 발, 그리고 한쪽 눈까지 되겠다는 생각에 얼마전부터는 운전연습도 시작했다. 아내의 지극정성에 정삼 역시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았다.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서로 끈끈한 사랑을 이어가는 이들 부부의 모습을 보고 가수 설운도가 직접 ‘내사랑 유리’라는 곡을 만들어주었다.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며 서로 힘을 주는 두 사람에게서 봄 햇살보다도 더 따사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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