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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황주리의 그림 에세이

“고색창연한 길처럼 늙고 싶다”

2003. 08. 29

“고색창연한 길처럼 늙고 싶다”

그대안의 풍경, 2000, 캔버스에 아크릴, 60×80cm


우리집 앞 56사단 입구에 아스팔트 길이 깔렸다. 매끄러운 아스팔트의 감촉이 눈으로도 느껴진다. 그 길 끝에 달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만한 내일이 떡 버티고 서 있었으면 좋겠다.
저 멀리 어디쯤의 소실점 근처에서 문득 잊어버린 것들을 떠올린다. 어느 가을날,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나를 업고 서 있던 풍경, 우리집 개 ‘파미’가 잠에서 깨어나 눈부셔하던 모습, 그리 단단할 것도 없는 약속 하나로 가슴 부풀던 사랑의 기억들, 그 사랑의 대상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학 시절, 끝이 없을 듯 보이는 계단을 한참 올라 종종걸음으로 점심 채플 시작 시간에 맞춰 밀고 들어가던 이화여대 대강당의 단단한 문. 그 이후로도 이 세상에는 쉽게 열리지 않는 문들이 수없이 많았던 것 같다. 그 문 앞에서 누군가 나를 기다렸다가 손을 내밀어 따뜻이 잡아주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러나 모든 문 앞에서 우리는 모두 혼자다. 문이 열리지 않으면 열릴 때까지 두드리자.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으면 문 앞에서 서성이는 일을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까짓 안 열린다고 제발 자살은 하지 말자. 그러나 어쩌면 삶에 필요한 용기와 죽음에 임하는 용기는 그 뿌리가 다를지 모른다.
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색창연하게 늙어가는데, 사람의 길은 왜 그렇지 못할까? 문득 길처럼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누구에게도 삶은 만만치 않으리라. 어느새 오십년을 혹은 육십년을 걸어온 우리의 누추하지만 대견한 그림자가 길 위에 새겨진다. 그 길에서 누군가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마주치고 싶은 9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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