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난 것은 지난 8월16일 토요일 오후,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 입구에서였다.이날 고현정씨(32)가 아이들과 함께 보러온 공연은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영어 뮤지컬 ‘쎄사미 스트리트 라이브’. 미국 오리지널 팀이 내한해 ‘브로드웨이 스타일 어린이 뮤지컬’로 불리는 화려한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는 입소문이 퍼진 탓인지 공연장 입구는 많은 사람들로 혼잡했다.
그러나 그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두 아이를 낳은 엄마라고 하기엔 너무나 날씬한 몸매와 환하게 빛나는 얼굴이 멀리서도 눈에 띈 것. 뮤지컬에 나오는 캐릭터 분장을 한 사람들을 보느라 정신이 팔린 아들 해찬(6)과 딸 해인(4)을 챙기는 그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가 “기자세요?” 하며 깜짝 놀라 한걸음 물러섰다.
그가 기자를 보고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난 95년, 현재 신세계 경영지원실 부사장으로 있는 남편 정용진씨(35)와 결혼 이후 ‘유학설’ ‘패션사업 진출설’ ‘불화설’ 등 온갖 소문에 시달렸지만 일체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던 그에겐 예기치 않은 기자와의 만남이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아이들 사진은 안돼요. 부탁이니 아이들은 사진 찍지 마세요.”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자 황급히 아이들을 껴안은 그. 그러나 “아이들의 사진은 나가지 않을 것이며, 단지 근황만을 취재하고 싶다”고 기자가 설명하자 그제야 경계심을 푸는 눈치였다.
이날 외출은 아들 해찬이가 다니는 영어유치원 학부모들과 한 약속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해찬이 또래의 아이들과 손을 잡고 나타난 학부모들은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며, 그간의 안부를 묻는 등 시종 활기찬 분위기였다. 그 가운데에 서있는 그 또한 아이를 기르는 젊은 엄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냥 아이들 데리고 공연 보러 온 건데….”
“아직도 팬들의 관심이 많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묵묵부답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한달에 대여섯번 정도 그와 만나 집안 이야기며 아이들 육아 이야기를 나눈다는 측근에 따르면 요즘 그는 아이들과의 외출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올해 네살이 된 딸 해인이가 제법 자기 표현을 하게 되자 평소에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은 그가 도움이 될만한 공연이나 행사를 찾아다니고 있다고.
“이른바 ‘로열 패밀리’라고 불리는 집안이라 교육에 엄격한 부분이 있겠죠. 아들 해찬이가 정재계 상류층 인사들의 자제들이 많이 다닌다는 강남의 영어학교와 사립유치원에 다니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그런 교육에만 치중하는 것은 아니더군요. 그는 ‘아이들에겐 자유로운 사고와 창의력이 가장 중요하다’며 다양한 경험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어요.”
또한 각종 행사가 많은, 더구나 대가족인 삼성가의 아이답게 예절교육에도 신경을 쓴다고 한다.
“고현정씨의 좌우명이 ‘항상 공손하고 정직하게 살자’라고 해요. 왜 명문가의 자녀들은 주변에서 늘 모시는 사람들이 있으니 조금 건방지고 이기적으로 자랄 수가 있잖아요. 그는 그런 부분에 가장 신경을 쓰는 것 같아요. 명문가의 자녀이기 이전에 건강한 사회인으로 키우겠다는 거죠. 그래서인지 해찬이는 늘 예의바르고, 공손한 아이예요.”
예술의 전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아직도 그는 기자 만나는 것 자체를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실제 이날 만난 해찬이는 유치원 학부모들에게 일일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공연장 입구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친구들을 하나하나 챙기는 모습도 보였다. 기자에게도 “아저씨 누구세요? 왜 사진 찍어요” 하며 먼저 관심을 보였다. 생김새는 해찬이나 해인이나 아빠를 쏙 빼닮은 모습.
“해찬이는 아빠를 닮아서 리더십도 있고 사교성도 좋은 것 같아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늘 웃으며 인사하고, 또 친구들 사이에서도 주로 리드를 하는 편이죠. 반면 딸 해인이는 엄마를 닮아서인지 낯을 좀 가리고, 조용한 편이에요.”
외아들이 낳은 손자, 게다가 또래들에 비해 영특하고 예의바른 아이들이라 그런지 시어머니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내리사랑’도 대단하다고 한다. 지난 7월20일에는 며느리와 아이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함께 여행을 하는 등 열흘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지난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에 이어 국내 갑부 3위, 여성 재산가 1위에 오른 이명희 회장은 현재 미국 LA에 체류중.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씨의 3남5녀 가운데 막내딸인 이회장은 명문가의 상속녀로 출발했지만 이후 CEO로서 능력을 발휘해 신세계를 유통업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아 경영 능력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현재는 전문 경영인인 구학서 사장에게 경영을 맡기고, 1년에 한두 번만 본사에 들러 경영 상황에 관한 종합 보고를 받고 있는 상태. 다른 기업처럼 성급하게 2세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기보다는 전문 경영인에게 전권을 맡기는 ‘대범함’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사실 정용진 부사장이 고현정씨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삼성가 안에서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었다고 해요. 다소 보수적인 삼성가의 분위기엔 당대 톱스타를 집안의 며느리로 받아들이는 데에 대한 우려가 컸겠죠. 하지만 정부사장이 마음을 이미 굳힌 상태였고, 이명희 회장 또한 아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부정적인 시선은 사라졌다고 해요. 이회장의 열린 사고가 드러나는 대목이죠.”
7월에는 시어머니 초대로 두 아이와 열흘 동안 미국 여행 다녀와
측근의 말처럼 이회장은 아들과 고현정의 결혼에 “무엇보다도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며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연예인이라는 타이틀이 아닌, 사람 됨됨이를 보고 판단하면 된다고 설득했다는 것.
결혼 이후 며느리 고현정씨에 대한 사랑도 각별하다고 한다. 만인의 인기를 얻었던 연예인, 그것도 인기 절정의 순간 명문가의 며느리로 들어온 그가 혹시라도 마음 상할까, 적응하지 못할까 여러모로 돌봐주었다고 한다.
“이회장은 고현정씨가 자연스럽게 삼성가에 적응하도록 신경을 많이 썼어요. 사실 연예인의 생활도, 명문가의 생활도 평범하지 않잖아요. 명문가 며느리로서의 예절과 마음가짐에 대해 그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시어머니였기에 그와 관련한 각종 소문들이 불거질 땐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고 한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지난해 고려대대학원에 입학했으나 언론의 조명 탓에 휴학을 결정했을 때도, 지난 연말 단순한 교통사고가 갖가지 억측 속에서 크게 확대됐을 때도 그에게 잔잔한 위로의 말을 건넨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회장에 대한 고현정씨의 존경심도 각별해요. 시어머니로서, 그리고 같은 여자로서 배울 것이 참 많다고 하더군요.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도 이회장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어요.”
이회장이 전문 경영인에게 전권을 맡기고 물러선 사이 아들 정용진 부사장은 경영 수업에 한창이다. 롯데 신동빈 부회장, 현대백화점 정지선 부사장 등과 함께 ‘유통업계 2세 3인방’으로 불리는 정부사장은 95년 신세계에 입사, 기획조정실 상무를 거쳐 지난 2001년 경영지원실 부사장에 올랐다.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지만 그는 경영 참여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세계 관계자에 따르면 거의 매주 신세계 사장과 이마트 대표 등을 만나 사업확장 및 신규 출점 등의 현안 업무에 대해 의논한다고. 또한 자신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스타일로, 특히 할인점인 이마트 부문에 주력하고 있다.
“적극적인 성격으로 아침 출근이 이르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고현정씨의 아침도 일찍 시작된다고 해요.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들 유치원 보내고 나면 오전이 후딱 지나간다고 보통 주부들처럼 푸념도 해요.”
전문 경영인과 경영주 2세의 경영분리 성과로 신세계그룹은 계열분리 직전인 96년 14억원 적자에서 지난해 2천4백24억원의 순이익을 내는 알짜 그룹으로 성장했다. 매년 전년 대비 40% 이상 급성장해온 덕분에 재계 순위도 지난해 30위권 밖에서 22위로 뛰었다.
지난 2001년 2월 시누이 유경씨의 결혼식에 참석한 모습. 측근은 시중에 떠돌던 불화설과는 달리 시어머니의 사랑과 남편의 배려로 그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전했다.
근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좀처럼 입을 열지 않은 그에게 “요즘 남편과 외출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한때 불화설이 돌기도 했는데 부부 사이가 좋아진 것이냐?”고 묻자 잔잔한 웃음을 보였다.
“제가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 것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전 이제 연예인도 아닌데…. 그냥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어느 정도 근황을 취재했다. 가십 기사로 쓰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말라”는 기자의 말에 그는 다소 안도의 눈빛을 보였다. 그리고 자신을 이해해달라며 재차 주문했다.
그와의 만남 이후 측근에게 사실을 전하자 측근 역시 “그를 이해해주세요. 사실 연예인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 전에는 연예인이었지만 요즘은 그냥 한 집안의 며느리, 아내, 엄마잖아요. 그도 공부를 할 수 있고, 여행을 다닐 수 있고, 요리도 배울 수 있는 것인데 매번 언론의 조명 때문에 일을 그르쳤어요. 여느 주부들보다 더 행동 반경이 좁혀진 셈이죠. 그냥 자연인으로, 보통의 주부처럼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고 말했다.
사실 명문가의 며느리들에게 해외 유학과 대학원 진학은 그리 특별한 일이 못된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대외활동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고, 공익적인 활동에 대해 집안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그러나 그는 연예인 출신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아 명문가 며느리로서의 기본적인 대외 활동에도 제약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지난해 대학원 입학이 알려지면서 곧바로 휴학을 했잖아요. 딸 해인이를 낳은 후 ‘이제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고 했는데 좌절된 거죠. 그 뒤로 진로를 조금 바꾼 것 같아요. 해인이가 크면서 돌볼 일도 많아졌고, 또 내후년이면 해찬이도 학교에 들어가니 아이들 교육에 더 매달려야겠다고 하더군요. 아마 당분간은 특별한 대외활동 없이 아내로서, 엄마로서만 살아갈 것 같아요.”
지난 8월5일 영화 ‘바람난 가족’의 시사회에 참석했다가 방송 카메라에 모습이 잡히기도 했던 그. 당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던 그는, 그러나 기자의 카메라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이 카메라에 잡힐까 걱정하는 모습.
“아이들 사진은 내보내지 않겠다는 걸 약속해주세요. 엄마 때문에 아이들까지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아요. 많은 말씀을 드릴 수 없어 죄송합니다.”
정중하게 부탁을 한 그는 어린 남매에게 “아저씨한테 인사해야지” 하며 인사를 시켰다. “안녕히 가세요” 하며 꾸벅 인사를 하는 아이들 뒤로 그가 엷은 웃음을 띠며 서 있었다.
이날 만난 그의 모습과 측근의 말을 종합해보면 세간에 떠돌던 불화설은 단지 소문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톱스타와 명문가의 만남, 영원한 관심거리일 수밖에 없는 그 인연이 갖가지 소문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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