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돌리자는 2002년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 최고 의장상을 수상했다.
콘돌리자 라이스(48)는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안보보좌관이다. 그는 부시 행정부에서 ‘매파’인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비둘기파’인 콜린 파월 국무장관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여 부시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모든 현상을 정확히 분석하고 주요 현안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그는 2008년 미 대선의 여성 대통령 후보로 자주 언론에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라크와 북한 등을 ‘악의 축’으로 규정할 만큼 남성적이고 진취적이지만 백악관 회의를 끝낸 뒤에는 직접 커피잔을 정리하는 세심한 면모도 갖고 있다. 또한 커피잔을 함께 정리하자고 콜린 파월에게 말했다가 “남자는 그런 것을 안 한다”는 시큰둥한 대답이 돌아오자 “진짜 남자라면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되받아 콜린 파월을 머쓱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다.
아울러 그는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와 협연할 정도로 뛰어난 피아노 연주 실력을 갖고 있고 패션 감각도 뛰어나 세련된 정치인으로 손꼽힌다.
흑인 차별이 여전히 심했던 1950년대 미국 남부에서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어떻게 그 모든 것을 갖출 수 있었을까. 그의 이런 화려한 성공 뒤에는 부모의 남다른 교육이 뒷받침돼 있다.
흑인인 그는 성장하면서 불평등한 사회 현실에 시달려야 했지만 목사인 아버지(그의 아버지는 라이스 가문 최초의 엘리트로 덴버 대학에서 흑인학 교수 및 학장으로 활동했다)에게서 헌신적이면서 강인한 성격을 배웠고, 고교 교사였던 어머니의 열성적인 교육으로 자신의 천재성을 일찍 발견해낼 수 있었다.
그의 고조모는 하녀로 일했다. 고조모뿐만이 아니라 그의 조상들 대부분이 백인들의 집안일을 돌보던 하인이었다. 하지만 자손들에게만큼은 구차한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부지런히 읽고 쓰는 것을 배웠고, 자식 교육에 열성적으로 매달렸다. 세대가 지나면서 라이스가의 교육열은 점점 더해졌고 유색인종이 진학할 수 있는 대학을 찾아 이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목화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자식의 학비를 댔고 마침내 자손 중 한명이 장로교 목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가 바로 콘돌리자 라이스의 아버지다.
스탠퍼드 대학의 커잇 블래커 교수는 콘돌리자 라이스의 가계에 대해 “할아버지대에서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사촌과 이모, 삼촌들 모두 대학을 졸업한 흑인 가계는 극히 드물다”며 높이 평가했다.
더구나 그의 선조들이 인종 차별이 심한 시기를 거치면서도 이런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세대를 거쳐 온 라이스식 교육열이 콘돌리자 라이스를 미국 최초의 흑인 안보보좌관으로 만든 것. 그를 특별하게 만든 라이스식 교육법은 그가 아주 어려서부터 시작됐다.
요요마와 협연중인 모습. 콘돌리자는 대학교 1학년 때까지 피아노를 전공하다 국제학으로 바꿨다.
콘돌리자(이하 콘디, 그의 애칭이다)라는 이름은 그의 어머니가 지었다. 피아니스트이자 오르간 연주자였던 그의 어머니는 이탈리아어인 ‘콘돌체자(con dolcezza·부드럽게 연주하라는 의미)’에서 딸의 이름을 따왔다.
이름에서부터 음악과 가까운 콘디는 피아노 교사였던 외할머니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피아노와 친해졌다. 음 감각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앞에 앉아 양손으로 건반을 두드리며 외할머니가 연주하는 모습을 흉내내곤 했다. 이를 유심히 관찰하던 외할머니는 일찌감치 콘디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콘디는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빨리 피아노를 익혀 네살 때 첫 연주회를 열 정도였다.
위대한 음악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음악적인 재능은 물론 부모의 헌신적인 후원, 3세 이전의 조기 교육, 음에 대한 깊은 감성이 있어야 한다. 콘디는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면서 ‘음악 신동’이 될 수 있었다.
콘디의 친구는 “콘디와 놀려면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어요. 가장 최근에 배운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곡을 끝내야만 밖으로 나왔거든요” 하고 회상했다. 물론 콘디도 그 또래 아이들처럼 소꿉놀이나 학교놀이 등을 즐겼지만 밖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열살이 되던 해, 콘디는 흑인 학생에게도 막 문을 열기 시작한 남부 버밍햄의 음악학교에 입학했다. 흑백 학생 통합 교육이 실시된 후 최초로 입학한 흑인 학생인 콘디는 이곳에서 경쟁적으로 피아노 연주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배워 음악 감성을 한층 더 성숙시켰다. 이러한 음악성은 그의 정서와 지능 발달에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다.
아이의 능력을 빨리 파악한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기 자식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아이가 소화하기 어려운 과제를 안겨 주고 완벽하게 이해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이렇게 아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아이에게 부담을 주어 주눅들게 하는 지름길이 된다. 반면 아이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아이가 훨씬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범하게 키우는 것도 문제다.
콘디의 어머니는 콘디가 보통 아이들보다 영특하다는 것을 알고는 다섯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당시 학교의 교장은 콘디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을 만류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콘디를 조기 입학시킨 후, 교사로 재직 중인 페어필드 고교를 휴직하면서까지 뒷바라지에 나섰다. 콘디가 집에서도 학교 정규교육 못지않은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홈스쿨링을 시작했는데, 정규교육보다 더 조직적으로 교과 시간을 편성해 가르쳤다. 이런 열성 덕분에 콘디는 1학년과 7학년 과정을 건너뛰었다.
아이에게 무한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
콘디가 예술적인 삶을 살기를 희망했던 그의 부모는 스케이트도 가르쳤다.
콘디의 부모는 아이의 교육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콘디가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음악, 발레, 외국어, 스포츠 등을 가르쳤다. 콘디의 어머니는 아이가 지적이며 예술적인 삶을 살기를 희망했고, 그런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
“부모님은 저에게 모든 기회를 제공하셨어요. 자식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관심, 칭찬을 아끼지 않았죠. 그분들은 제가 무엇을 하든지 반드시 성취할 거라고 믿었어요.”
또한 그의 어머니는 콘디가 많은 책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글을 깨치기 전부터 피아노 악보를 읽어서인지 콘디는 책읽기도 수월하게 시작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각 학년의 필독서로 선정된 도서목록에 따라 문학 작품을 읽었다.
“독서는 특히 어머니가 강조했던 부분이라 피할 수 없는 일과 중 하나였어요. 북클럽이라면 어디든 가입을 시키셨죠.”
이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콘디는 ‘책벌레’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책읽기를 즐겼고, 책을 통해 배운 지식과 간접 경험들은 그가 한층 더 성숙한 인간이 되는 토대가 되었다.
다섯살 때 콘디의 모습
콘디의 부모는 콘디가 가능한 많은 지식과 문화적 소양을 쌓도록 유도했다. 또한 어릴 때부터 콘디를 성숙한 인격체로 대했고 언제나 ‘최고’로 대우함으로써 콘디가 자신에 대해 자긍심과 소중함을 갖도록 애썼다.
콘디의 어머니는 딸의 양말에 달린 레이스까지 일일이 다림질해서 신길 정도로 딸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또한 당시 의류 코너에서 옷을 살 때 흑인과 백인이 이용하는 탈의실이 달랐는데 그의 어머니는 점원에게 “백인 전용 탈의실을 사용할 수 없다면 다른 매장에서 돈을 더 얹어주고서라도 같은 옷을 구입하겠다”고 말해 결국 콘디가 백인 전용 탈의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콘디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그의 부모는 학교 연습실에서 밤늦도록 피아노 연습을 하고 귀가하는 딸을 위해 중고 스테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를 구입했다. 피아노 값을 갚으려면 큰돈이 필요했지만 딸을 위한 선택이었다.
“피아노는 부모님이 절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말해주는 선물이었어요. ‘나를 위해 1만1천달러(우리 돈으로 약 1천3백만원)나 지불한 거야’ 하고 생각하니까 나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는 부모님의 사랑이 느껴졌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심어준다
당시 아무리 ‘억척 어머니’라 해도 해결해줄 수 없는 일들도 있었다. 흑인이기에 받아야 했던 사회의 부당한 대우가 그것.
당시 콘디가 살던 곳에서는 흑인에게 서커스 구경이나 키디랜드 같은 놀이동산의 입장이 허용되지 않았다. 1년에 단 하루 흑인도 입장이 가능했지만 부모는 콘디를 그곳에 데려가지 않았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시위였다. 대신 콘디의 부모는 딸이 이런 현실로 인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애썼다.
“아버지는 제게 ‘우리는 키디랜드에 갈 필요가 없어. 디즈니랜드에 갈 거니까’ 하면서 위로해주셨어요.”
그는 대학에 입학할 때도 크게 좌절해야만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이미 강의를 듣고 있던 세인트 메리즈 아카데미에 진학했는데 입학 1주일 만에 ‘입학 취소’ 판정을 받았던 것. 이 학교도 콜로라도주의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백인 학생들만 다닐 수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가 어리석어서, 혹은 더는 뭔가를 이루기 어려운 현실이야, 하는 따위의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한 거죠. 난 원하는 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모든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고, 언제나 딸에 대해 자신감과 확신, 자부심을 갖고 저를 키워준 부모님 덕분이죠.”
어려서부터 콘디는 ‘두배는 더 열심히’라는 인생관을 갖고 모든 일에 임했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흑인이기 때문에 남보다 두배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열심히 피아노를 쳤고 프랑어 등 외국어 습득에도 열심이었다.
콘디의 부모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 가운데도 언젠가는 흑인이 높은 사회적 위치에 오를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자식 교육에 공을 들였다. 그리고 콘돌리자 라이스는 이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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