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역사(Living History)’라는 제목의 힐러리(56) 회고록은 6월8일 자정부터 판매되기 시작해 6월9일 20만부가 팔린 것을 포함해 일주일 동안 무려 60만부가 팔려나갔다. 논픽션 부문 최고 기록이다. 초판으로 1백만부를 찍은 사이먼 앤드 슈스터 출판사측은 이에 부랴부랴 50만부 추가 인쇄에 들어갔다.
비록 힐러리라 할지라도 ‘초판 1백만부는 무모한 도전이 아닐까’ 하면서 지켜보았던 출판업계는 이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자 혀를 내두르고 있다. 미국 최대의 서점 체인인 반스 앤드 노블(Barnes & Noble)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리지오는 “대통령인 남편의 섹스 스캔들이라는 엄청난 시련을 의연하게 극복했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힐러리를 고난이 많은 우리 시대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며 인기의 비결을 해석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힐러리의 인기는 판매 첫날 사인회에서부터 그 조짐을 보였다. 힐러리는 독자들을 위해 오전 11시부터 한시간 동안 뉴욕 맨해튼 미드 타운에 있는 반스 앤드 노블에서 사인회를 갖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뉴요커들은 새벽 5시부터 서점 앞에 몰려들어 긴 줄을 만들었다. 서점측은 기다리는 독자들을 위해 새치기 방지용 손목표시줄을 2백50개 준비했으나 예상보다 긴 줄을 만들고 있는 독자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못해 손목표시줄 1천개를 더 준비하고 사인회도 2시간30분으로 연장했다.
책 시판을 앞두고 ABC TV가 원로 앵커 바바라 월터스를 동원해 힐러리와 한시간짜리 인터뷰를 방영했을 때도 미국내에서 무려 1천3백50만명이 시청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그날 CBS TV의 토니상 시상식 중계를 본 시청자 7백90만명을 크게 앞지른 것.
회고록과는 관계없이 힐러리의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도 기획되고 있다. 케이블영화 제작회사인 A&E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클린턴과 힐러리의 영욕을 담은 2시간짜리 영화를 내년초 방영을 목표로 연내 제작을 마칠 계획이라고 최근 발표했다. 배우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나 회사측은 힐러리 역으로 샤론 스톤과 접촉중이라고 밝혔다. 이 영화는 게일 쉬가 쓴 베스트셀러 전기 ‘힐러리의 선택’을 토대로 만들어진다.
책이 나오고 일주일 후인 6월16일 뉴욕 포시즌 레스토랑에서 열린 출판기념 파티에서 클린턴은 완벽한 ‘외조’를 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였다. 정계, 출판계 스타들이 대거 참석한 파티에서 클린턴은 활짝 웃으며 힐러리를 이렇게 소개했다.
“상원의원과 결혼해서 함께 사는 것은 무척 재미있다. 그런데 베스트셀러 작가와 함께 사는 것은 훨씬 더 재미있다. (손에 든 책을 높이 치켜들면서) 사람들이 내 손을 계속 보려고 하지 않는가.”
이에 힐러리는 “남편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과 같은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사람이 돼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고 화답했다.
힐러리가 세상에 선보인 책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기에 세상이 이처럼 떠들썩할까. 사이먼 앤드 슈스터 출판사가 선금 4백만달러(우리 돈으로 48억원)를 비롯해 총 8백만달러(96억원)를 주기로 한 힐러리 회고록의 내용이 점점 궁금해진다. 대통령의 부인이 털어놓은 ‘아주 특별한 내용’이 담긴 책을 산 독자가 가장 먼저 펼쳐보았을 법한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을 다룬 내용은 이렇게 정리돼 있다.
93년 퍼스트레이디가 됐을 때의 힐러리(왼쪽). 클린턴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털어놓기 몇 개월 전인 98년 1월, 가족여행을 떠나 해변에서 다정하게 춤을 추고 있는 두 사람.
“빌이 자신과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공개적으로 시인해야 했던 98년 8월은 공교롭게도 오사마 빈 라덴으로부터 미국이 공격받은 시기였다. 그해 8월5일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에 대한 무기 사찰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발표하더니 8월7일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대사관에서 동시에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2백64명이 숨지고 5천여명이 다쳤다. 냉전은 종식되고 중동과 북아일랜드 등 분쟁지역의 갈등도 줄어들어 세계는 평화스러웠지만 이같은 폭탄 테러가 호시절이 끝났음을 알렸다. 정보기관들은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인이 이슬람 세계의 테러리즘을 조직하고 있으며 그들의 공격이 점점 대담해지고 강력해지고 있다고 알려왔다.
빌은 그들을 고립시키려는 전략을 세웠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빌과 그의 안보팀은 미국 안팎의 위협에 대처하는 전략을 세우고, 국민의 관심을 끌어모으려 했지만 언론과 의회, 미 연방수사국(FBI) 등은 대통령의 사생활을 캐내고 수사하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나는 빌이 대배심에 나가 증언하기 3일 전 (우리 부부의 친구인) 밥 바넷과의 대화에서도 빌에 대한 내 믿음을 드러냈다. 그가 ‘만일 (르윈스키 스캔들을 수사해온) 스타 검사가 대통령에 대해 뭔가 캐낸 걸 공개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 나는 ‘스타가 말하는 건 뭐든 믿지 않는다. 내 남편도 결점이 있겠지만 나한테 거짓말은 절대 안한다’고 대답했다.”
클린턴과 르윈스키 사이의 스캔들 소문에 대해 거의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클린턴은 계속 발뺌을 했고, 그의 말은 부인인 힐러리에게는 통했던 것 같다. 그러나 클린턴이 거짓말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회고록은 클린턴의 고백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인 (98년8월) 15일 아침 나는 침대 머리맡에서 빌로부터 ‘(르윈스키와의 사이에) 부적절한 친밀함(inappropriate intimacy)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빌은 그들(클린턴과 르윈스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떠듬거리며 내게 털어놓았다. 남편은 부끄러워했고 내가 화를 낼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 숨을 한번 쉬고 나서 나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남편에게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무슨 소리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왜 거짓말을 했어.’ 나는 남편이 그날 아침 사실을 고백할 때까지도 그가 어리석게도 르윈스키에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일 뿐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라고 믿었었다. 나는 점점 더 격분했다. 남편은 선 채로 ‘미안해, 미안해, 당신과 첼시를 보호하고 싶었어’ 하는 말만 되풀이했다. 남편에게, 10대인 딸에게도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고 말하자 남편의 눈에선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아내로서, 나는 그의 목을 비틀고 싶었지만(As a wife, I wanted to wring Bill’s neck,…) 마침내 남편을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계속 사랑하기로 결정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힐러리에게 클린턴을 용서하라고 권했다. 힐러리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결혼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힘든 시간을 거쳐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거나 “당신 남편이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대배심 직후 가족여행을 떠났을 때부터 몇달 동안 남편과 냉각기가 지속됐다고 힐러리는 책을 통해 밝혔다. “가족 중 개만이 유일하게 남편을 기꺼이 따라다녔으며 그는 아래층에서, 나는 위층에서 잤다”고 털어놓은 것.
힐러리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스캔들의 뒷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에게 한편의 드라마를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자신이, 대통령인 남편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국민들은 어떻게 오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려는 목적이 더 큰 듯하다. 섹스 스캔들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힐러리는 오사마 빈 라덴을 비롯한 국제 테러리즘과 대응 현장을 연결짓고 있다.
“빌은 이틀 후 대배심에 나가 네시간 동안 증언을 했고, 오후 6시25분경 깊은 분노와 갖가지 상념에 찬 표정으로 백악관 2층으로 올라가 밤 10시쯤 예정된 대국민 연설문을 준비했다. 많은 보좌진이 빌을 도와주러 왔지만 나는 1층에 머물렀다. 8시경 내가 빌이 있는 방으로 들어서자 누군가 TV를 꺼버렸다. 거기서 들리는 소리를 내가 들으면 견디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세계가 빌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이 TV에 허약한 모습으로 비춰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빌은 깨닫고 있었다. 빌은 혼돈에 차 있었고, 그것은 쳐다보기 끔찍한 것이었다. 내가 말했다. ‘빌, 이건 당신의 연설이야. 당신은 스스로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당사자야. 오직 당신 자신만이 무얼 말할지 결정할 수 있어’ 하고. 그런 상황에서 내가 가장 원한 것은 휴가였다.”
힐러리는 클린턴의 고백을 들었을 때 침대 머리맡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힐러리는 휴가에서 돌아온 클린턴이 오사마 빈 라덴의 거점을 확인하고 미사일을 쏘았지만 국민들은 ‘스캔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잉공격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했다고 꼬집고 있다. 물론 회고록은 자신 위주로 정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백악관에서 겪은 수많은 경험담을 담은 힐러리 회고록에는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는 인물들을 공격하는 내용도 들어 있고, 자신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부분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해놓았다. 그래서 그의 회고록 열풍이 며칠간 이어지자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일부 매스컴은 “도대체 의미도 없는 책을 왜 썼는지 모르겠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책이 인기몰이를 하는 가운데 힐러리는 회고록 판촉을 겸해 영국을 방문, 현지 TV와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르윈스키에게 유감의 뜻을 표했다. 영어로는 ‘소리(sorry)’로 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미안하다는 의미가 아니며 ‘안됐다’거나 ‘유감스럽다’는 의미가 더 강했다. 르윈스키에 대한 공개적인 유감 표현은 이번이 처음이다. 힐러리는 또 “남편을 이미 용서했다”고 거듭 밝히며 “우리는 같이 늙어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힐러리의 이같은 표현은 사실 남편이 자신을 배신한 바람둥이가 아니라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리려는 반대파들의 음모에 찬 조사 때문에 어리석은 남편이 걸려들어 가족은 물론 주위 사람들까지도 피해를 입게 됐다는 견해에 기초하고 있다. 오랫동안 주장해온 ‘음모론’의 연장인 셈이다. 이번에도 힐러리는 “사람들이 내 남편의 임기를 빨리 끝내도록 하기 위해 누군가를 파괴하기를 원했다”면서 “(그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있었다”고 표현했다. 자신이 회고록을 쓴 이유에 대해서도 “정치적 악의에 따라 남편이나 우리의 결혼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까발려놓음으로 해서 우리 부부와 가족이 사적으로 겪은 고통스런 경험을 책에 담으려 했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힐러리는 남편의 스캔들이 불거진 직후에도 TV에 출연해 음모론을 제기했었다. 클린턴을 죽이기 위한 보수 우파의 음모에 따라 섹스 스캔들이 터진 것이란 주장이다. 클린턴은 고향인 아칸소 주지사에 출마했을 때부터 섹스 마약 스캔들로 공격을 받아왔다. 어떤 잡지는 한 갑부의 재정지원을 받아가면서 클린턴의 스캔들을 캐는 데 사운을 걸다시피 하고 쫓아다니기도 했다. 실제로 바람둥이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클린턴에 대한 공격 소재는 무궁무진했지만 르윈스키와의 관계는 특히 위증 등 범법행위까지 덧붙으면서 클린턴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명문 예일대 출신으로 미국 1백대 변호사에 뽑힐 만큼 똑똑한 힐러리. 그에게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 때문이다. 힐러리는 시사주간지 ‘타임’과 한 인터뷰에서 2008년 대통령 선거 출마 여부를 묻는 질문에 “출마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6월13일 런던에서 한 TV 인터뷰에서도 대선 출마여부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대선후보로 나설 의사도, 계획도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미국 내에선 힐러리 스스로 2008년 대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한 걸 두고 내년 대선 출마 가능성도 희박해진 셈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람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일 것이다. 그동안 힐러리는 내년 대선에서 부시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민주당 후보로 거론돼 왔으며 민주당 내 9명의 경선 후보들도 힐러리가 나선다면 양보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 ‘힐러리가 출마할 경우 승산이 높다’고 나온 바 있기 때문이다.
섹스 스캔들의 한쪽 당사자인 르윈스키는 요즘 뉴욕에 살고 있다. 21세에 대통령에 접근했던 그는 올해로 29세. 스캔들이 잠잠해지면서 자신이 디자인한 모자와 핸드백 등을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사업을 벌이기도 한 르윈스키를 그냥 놔둘 미국이 아니다. 그는 지난 4월말부터 인기 케이블 TV인 폭스 TV의 ‘미스터 퍼스낼러티’ 프로그램 사회자를 맡아 방송을 타고 있다.
젊은 여성이 가면을 쓰고 나온 여러 명의 남성들 중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차례로 탈락시키고 남은 한명을 선택하는 이 프로그램에서 르윈스키는 젊은 여성의 친구로 나와 로맨틱한 충고를 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밥 돌 전 상원의원과 함께 CBS TV의 주간 시사토론 프로그램을 맡은 지 얼마 안돼 르윈스키가 TV 진행자로 발탁된 것을 두고 항간에선 짓궂은 캐스팅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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